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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속 어머니(김민경 분)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속 어머니(김민경 분)
ⓒ 선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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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며 안타까워 했지만 솔직히 저는 박수를 치며 봤습니다. '우리 중필이가 이걸 보면서 조금이나마 웃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누구도 미국에 대항하지 못하는데 (테러 세력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지금도 그 사람(오사마 빈 라덴)이 살아있다면 백악관을 폭파하면 좋겠어요. 미국인들이 많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2002년 4월, 홍익대 재학중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들 조중필씨의 5주기 추모제 자리. 미국에서 발생한 9·11 테러를 두고 고 조중필씨의 어머니 이복수(69)씨가 한 말입니다. 사건 발생 전만 해도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던 이 어머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미국에 대해 극심한 원한을 품게 된 것일까요.

기억하고 싶은 않은 1997년 4월 3일, 그리고 이태원

제가 조중필씨의 어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1999년 9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모 인권단체의 민원실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0대 후반이었던 이복수씨는 한 뭉치의 서명 용지를 들고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만난 이복수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사연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음', 그 자체였습니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 제가 조중필씨 사건을 처음 접한 것은 언론 보도를 통해서였습니다. 1997년 4월 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그곳에서 한 대학생이 숨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피해자는 홍익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조중필(당시 23세)씨. 사건이 일어난 그날 조씨는 국기원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친 후 여자친구를 데려다 주기 위해 이태원동으로 갔다고 합니다.

문제가 발생한 곳은 여자친구의 집 근처 햄버거 가게였습니다. 여자 친구가 음료수를 시키는 동안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던 조씨는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조씨는 주한미군 군속 자녀인 아더 패터슨(당시 17세)과 에드워드 리(당시 18세)가 휘두른 잭나이프에 무려 9군데나 찔려 그 자리에서 절명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들은 바로 체포됐지만 수사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조씨를 살해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그들은 "그저 재미로 그랬다"고 답했습니다. 체포된 에드워드는 경찰에 이렇게 진술했다고 합니다.

"친구였던 아더 패터슨과 함께 햄버거 가게에 있었는데 그때 패터슨이 나에게 새로 산 잭 나이프를 자랑했다. 패터슨과 장난을 치고 있던 중 화장실에 들어가는 조씨가 눈에 띄었다. 그러자 패터슨이 나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그를 따라갔다."

잠시 후 조씨를 따라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패터슨은 아무런 의심없이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조씨를 향해 잭나이프를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이 사건 앞에서 저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기에 이 억울한 죽음에 대해 살인자는 응당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이복수 어머니를 처음 만난 1999년 9월 전까지 말입니다.

죽은 이는 있는데 죽인 자가 없는 '살인 사건'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중 한 장면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중 한 장면
ⓒ 선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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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놀랍게도 제 생각은 지극히 순진했습니다. 저를 찾아와 그동안 자신이 겪어야했던 기막힌 사연을 전하는 그 어머니 이야기는 충격과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어머니는 눈물로 말했습니다. "내 아들은 죽었는데 살인범은 없다고 합니다, 아무도 살인범으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앞뒤 상황은 이랬습니다. 살인 혐의로 1심 법정에 세워졌던 패터슨과 에드워드.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범행 사실을 전면 부인하며 서로가 서로를 살인범이라고만 주장했답니다. 이렇게 공방만 거듭하던 중 '6개월 이상 구속 상태에서 심리할 수 없도록' 돼 있는 형사소송법 규정에 따라 1심 심리를 종결하던 날이었습니다. 판사가 그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분명 칼을 휘둘러 조중필씨를 살해한 사실은 맞습니까?"

그들은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불행의 씨앗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고심 끝에 아더 패터슨에게 '증거 인멸과 폭력 등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그리고 에드워드에게는 '조씨를 살해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살인 혐의를 면한 패터슨은 항소를 포기하고 수감 생활을 하던 중 1998년 8·15 특사로 석방됐습니다. 판결이 난 지 1년 4개월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혐의에 대해 억울하다며 항소했던 에드워드는 항소심에서 살인죄는 면하지 못했지만 미성년자인 점 때문에 20년형으로 감형됐다고 합니다. 유가족들은 '죄질에 비해 너무 적은 형량에 억울함을 느꼈지만 이렇게라도 사건이 마무리 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후 엄청난 반전이 그들을 허탈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대법원 판결에서 사건의 모든 것이 엉클어지면서 결과가 뒤집어진 것입니다. 그때까지 살인혐의로 기소됐던 에드워드에 대해 대법원은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시켰습니다. 그리고 1998년 9월 30일, 다시 열린 고등법원 재판에서 놀랍게도 에드워드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바로 당일 석방됐습니다. "정말이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고 묻는 어머니의 황망한 표정을 저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검찰 비웃듯 오산 미군기지 통해 도망친 패터슨

이처럼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검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국적을 가진 이들이 연루된 사건이었기에 이 사건의 수사에 관여한 미 범죄수사단(CID)은 처음부터 패터슨을 진범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 검찰은 미 범죄수사단(CID)과 달리 에드워드가 이 사건의 살인범이라고 고집했고 결국 그를 살인죄로 기소했습니다.

하지만 미 범죄수사단이 최초 진범으로 지목했던 패터슨은 수감된 지 1년 4개월만에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고, 이어 에드워드가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아 석방됨으로써 결국 이 희대의 살인사건은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가 없는 기막힌 사건"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때문에 어머니에겐 3대 독자였던 조씨를 '그저 재미 삼아 죽였다'는 진짜 범인 패터슨은 지금까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저 남은 것은 14년 동안 풀리지 않은 어머니의 한과 처절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한편,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검찰의 그 다음 대응이었습니다. 에드워드가 무죄로 석방됐을 때 검찰은 사건의 진범일 수밖에 없는 패터슨에 대해 즉각적으로 출국 금지 조치를 취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조씨 가족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패터슨의 출국 금지 기간을 연장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담당 검사의 실수라고 했지만 이같이 황당한 검찰을 비웃듯이 패터슨은 에드워드가 무죄 석방된 바로 다음날 오산 미군기지를 통해 미국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 기상천외한 희대의 사건이 발생한 지 14년이 지난 지금, 게다가 이제 공소시효가 반년 밖에 남지 않아 미제(未濟)로 처리될지 모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믿을 수 있으십니까?

서러움에 거리에서 눈물을 쏟아야만 했던 어머니

13일 오후 2시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등 시민사회 단체 회원들이 이태원 살인사건 용의자 패터슨의 즉각 송환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13일 오후 2시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등 시민사회 단체 회원들이 이태원 살인사건 용의자 패터슨의 즉각 송환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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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의 어머니가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국의 검찰, 그리고 미국으로 도망가 버린 패터슨에 대한 분노로 어머니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심정과 고통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모든 어머니들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이복수 어머니에게 조중필씨는 정말 남다른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어렵게 낳은 3대 독자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매 학기 장학금을 받으며 늘 부모에게 효도했던 착한 아들이었다고 어머니는 회상했습니다. 그런 아들을 그저 "재미삼아 죽였다"고 말하는 살인범들마저도 단죄하지 못하는 형편에 처했으니 그 분노와 울분이 어머니의 삶을 바꿔놓을 수밖에요.

그렇게 나선 거리에서, 여러 집회장에서, 그리고 낯설기만 한 인권단체를 찾아다니며 어머니는 미국으로 도망간 패터슨의 송환과 살인자의 처벌을 요구하는 서명을 받고자 거리로 나섰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자식을 위해 부끄러움도, 그리고 발이 부어 오르는 고통도 참으며 그 어머니는 매일 매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어머니. 그렇게 혼자 다니시면서 서명을 받아봐야 얼마 받지도 못하실 텐데 어떠세요?"

너무나 딱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물어봤는데 어머니의 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겪는 몸의 고통보다 '매일 매일 거리에서 만나는 또 다른 절망과 서러움' 때문에 더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의 억울한 사연을 전하며 이름 하나만 적어달라고 내미는 서명용지를 본 후 자신을 향해 던지는 뭇사람들의 차가운 눈빛과 냉대가 무엇보다 서럽다며 어머니는 제 앞에서 끝내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 서러움이 복받쳐 몇 번이고 거리에서 눈물을 쏟아야 했다며 말입니다.

사람들은 미국과 관련된 어떤 사건에 대해 부정적인 서명을 요구하는 어머니를 마치 사상범이나 몹쓸 병균이라도 가진 사람 취급하듯 피하는가 하면, 심지어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망갔다고 합니다. 처음엔 그것이 서러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답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무관심이 사실은 내 모습이었다"고 독백했습니다. 그들의 무관심과 냉대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불행한 일이 결코 나한테만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명을 부탁하는 말에 놀라 도망치던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느낀 섭섭함을 잊을 수 없다던 그 어머니의 눈물이 오늘 가슴 아프게 떠오릅니다.

14년 맺힌 어머니의 한, 이제는 풀려야 한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한 맺힌 서명을 받아가던 어머니가 목 메이도록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들의 살해범 아더 패터슨이 마침내 미국 사법당국에 검거되어 살인 혐의로 한국 정부에 송환될지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2012년 4월에 공소시효가 끝나는 이 사건, 불과 6개월의 시간 동안 과연 정의가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지 저는 걱정과 불안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가 없었던 이태원 조중필 살인사건. 이제 이 기막힌 사건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저는 자국 국민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해 줄 의무가 있는 한국 정부와 검찰이 적극 나서주기를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그것이 조씨의 어머니가 국민으로서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해 겪어야 했던 지난 14년간의 고통을 위로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요.

못다 핀 꽃, 고 조중필씨의 안타까운 넋을 기리며 이복수 어머니가 겪으며 지나온 고통과 상처가 이제 아물기를 기원합니다.


태그:#조중필, #어머니, #이태원 살인사건, #아더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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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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