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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정리 기구인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는 지난해 12월, 5년간의 활동을 끝냈다. 하지만 아직 한국현대사의 과거사 정리는 미완성이다. 특히 1950년대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의 국가폭력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집단학살 희생자들의 유해는 지금도 당시 학살 장소나 개인 연구실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망자의 유골을 그대로 "나 몰라라" 내버려 두는 국가는 문명국이 아니다.

 

노용석 박사(현 부산외국어대 연구교수)는 지난 5년간 진실위에서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최선봉 현장에서 일했다. 그는 인류학자로서 필자와 지난 2007년 자국민에 대한 '킬링필드'가 자행된 캄보디아를 방문해 국가기관이 어떻게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유해를 보관하고 넋을 기리고 있는지 연구했다. (킬링필드의 나라 캄보디아를 다녀와서)

 

'킬링필드' 캄보디아도 끝까지 하는 유해 발굴

 

진실위 활동은 이제 끝이 났지만, 현 정부는 발굴한 학살 피해자 유골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나 정책이 없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지금도 제대로 안치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야 할 형편에 처해 있다. 그 유골들이 만약 대통령이나 총리, 장관의 부모·형제 유해라면 이렇게 손 놓고 있었을까?

 

노용석 박사는 "아직까지 한국 정부는 집단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이나 관리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기초적인 논의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관련 일을 시급히 추진해 사회통합을 이루고 참혹한 역사의 반복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남미 국가들은 발굴된 유해 신원확인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많은 예산을 들이고 있지만, 한국은 신원확인은 고사하고 현재 유해 발굴이 중단된 상태라고 지적했다.

 

노 박사의 말대로, 정부는 현재 발굴된 유해의 안장을 위한 어떠한 복안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뒤처진 캄보디아도 발굴된 유해의 위령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의 처신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음은 노용석 박사와 지난 3일과 4일 이메일로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 지난 5년간 진실위에서 일하며 전국적으로 실시한 한국전쟁 중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유해발굴을 현장을 지휘했다. 상항을 정리한다면?

"2005년 12월 진실위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이후 과거사 정리와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중에서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국가기구의 공식적 활동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유해 발굴을 실시했다. 발굴은 전국 10개 지역(경산코발트광산, 충북 청원 분터골, 대전시 동구 낭월동, 전남 구례군 봉성산 일대, 경남 산청 외공리, 전남 진도군 갈매기섬, 전남 순천시 매곡동,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일대, 충남 공주시 상왕동 일대, 경남 진주시 문산읍 일대)에서 이뤄졌고, 모두 1617구의 유해와 5600점의 유품을 발굴했다."

 

- 한국전쟁 중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민간인학살 희생자 규모는 약 8~10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한 유해는 빙산의 일각 아닌가.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 사상자 수는 아직도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진실위에서 발굴한 유해가 그 사상자 중 극히 일부라는 건 명확하다. 진실위는 2007년 유해 발굴에 앞서 전국의 민간인 학살 유해 매장 추정지 169개 장소에 대한 기초조사를 실시했는데, 이중 발굴 가능한 지역이 59개 지역이었다. 이중 진실위는 10개 지역만 발굴했다.

 

또한 이 10개 지역 발굴 역시 모두 완료되지 않았다. 경산코발트광산, 충남 공주시 상왕동, 경남 진주시 명석면 일대, 대전시 동구 낭월동 등의 발굴은 예산과 시기 등의 문제가 겹쳐 완료하지 못한 채 방치돼 있다. 그리고 2007년부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실위 조사가 본격화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유해 매장추정지도 수십 여 곳에 이른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유해 발굴은 새로운 기초조사를 실시해 보다 정확한 현황을 파악해야 한다."

 

"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 국가는 장의사 역할 해야"

 

- 유해 발굴을 통해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실체가 한국 사회에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유해발굴의 가장 큰 의의와 성과는 무엇인가.

"유해 발굴은 과거 일어났던 학살 사건의 결정적 증거물을 찾아내는 작업이자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죽은 자의 몸은 말이 없지만, 발굴의 정황은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나는 유해 발굴이 비단 위와 같은 법의학적이고 '증거 찾기'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유해 발굴은 억울한 희생을 당해 50여 년 동안 산천에 방치된 후 떠돌고 있는 영령들을 비로소 제대로 된 의례로 위로하는 과정이다.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 유해 발굴을 거대한 '사회적 의례'의 한 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본다. 정부는 현재까지 소위 '호국영령(예를 들어 전사군인 등)'에 대한 발굴 및 의례만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하고 있다.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을 국가가 해야 할 의무적인 의례로 여기지 않았다. 

 

진실위에서 실시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은 국가가 최초로 민간인을 대상으로 '국가의례'를 실시하고, 장의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런 사례는 향후 국가 공권력에 짓밟힌 민간인들을 위해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답을 제시할 것이다."

 

- 발굴된 유해 중엔 어린이와 여성들도 상당수 있다. 이 유해들은 지금 제대로 된 국가시설보다는 민간차원의 임시 시설에 보관되어 있지 않나.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일대 유해 발굴에서 특히 어린이와 여성들의 유해가 많이 발굴됐다. 한국전쟁 당시 이들은 국군의 '초토화 작전'을 피해 불갑산으로 갔다. 하지만 국군은 빨치산과 연계된 적으로 간주해 이들을 사살했다. 특히 이 지역의 발굴에서는 여성들의 비녀와 당시 어린이들이 가지고 놀았던 것으로 보이는 구슬 등이 발굴돼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렇게 발굴된 유해들은 현재 위령 시설에 안장되지 못한 채 충북대학교에 마련된 '임시안치소'에 보관 중이다.

 

또한 진실위 출범 이전 유족 및 민간기구들에 의해 발굴됐던 유해들(경산코발트광산, 고양 금정굴, 마산 여양리)은 현재 컨테이너나 대학의 실험실 등에서 수년째 방치되어 있다. 나의 바람은 이런 유해들이 하루빨리 올바른 추모시설에 안장돼 '또 다른 억울함'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 심지어 캄보디아조차 킬링필드 희생자들의 유해를 정부 차원에서 관리·보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망자의 유골을 방치하는 게 아닌가.

"198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과거청산과 관련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을 실시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발굴된 유해 모두에 대한 신원확인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예산과 사회 각층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에 비해 한국은 발굴된 유해의 신원확인은 고사하고, 현재 유해 발굴마저 중단된 상태다. 현재까지 발굴된 유해의 안장을 위한 어떠한 복안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뒤처진 캄보디아도 발굴된 유해의 위령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데 말이다."

 

"발굴된 유해마저 방치, 문명국가가 할 일이 아니다"

 

- 유해 발굴 활동을 통해서 경험했던 어려움이나 한계는 어떤 것이 있었나.

"2000년부터 실시하였던 국방부 전사자 유해 발굴은 현재 독자적 법률이 제정되어 이에 기초해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유해 발굴은 보호막 없이 '그저 용감하게' 진행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은 모든 기존 법률(예를 들어 산지보호법, 개발제한구역 등)에 저촉되지 않게 실시해야 했고, 이러다 보니 발굴 환경은 더욱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안타까웠던 것은 사유지 문제 등으로 발굴을 진행할 수 없을 때였다. 발굴 예산이 워낙 부족해 토지보상금 등이 충분히 책정되지 않아 몇 곳은 사유지 및 보상 문제 등으로 발굴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좀 더 강력한 법적 테두리를 그리워하곤 했다."

 

- 우리가 인권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라도 정부에서 방치된 유해에 적극적인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보는데, 국가에 건의하고 싶은 게 있다면?

"대한민국에서도 진실위 활동기간 동안 발굴된 유해를 안장하기 위한 정부의 일부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유해를 안장한다는 것은 단순히 형식적으로 유해를 어딘가로 '치우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 의례'의 과정이자 다시는 참극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교훈적 의미'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 그래서 이 일에는 상당히 많은 노력과 정성이 수반되어야 한다.

 

캄보디아 혹은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발굴된 유해의 안장을 결코 형식적으로 빠르게만 진행하고 있지 않다.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 안장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너무 쉽고 단순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각계 전문가의 자문과 유족의 의견을 청취해 심도 깊은 로드맵을 완성한 후 실시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기초적인 논의조차 제대로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정부가 시급히 추진하는 게 사회통합 및 참혹한 역사의 재발을 막기 위한 중요한 일이다."

 

- 지난 5년간의 진실위 유해 발굴 활동을 통해 감회와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너무나 많은 사연들이 있기에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가 주도 최초의 유해 발굴을 기획하고 실행하였다는 데에 무궁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이렇게 발굴이 종료돼 상당한 자괴감 또한 가지고 있다. 괜히 유족들의 아픈 가슴만 파헤쳐 놓은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사실 진실위의 주요 임무는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유해 발굴은 이 과정에서 조사를 위한 보조수단이었다. 오히려 본격적인 발굴은 진실위 종료 이후 '과거사 연구재단' 등이 마련되어 장기 위령 사업 준비 과정에서 진행되어야 했다. 하지만 정권교체 후 과거사 연구재단 등의 설립은 물거품이 되었고, 현재는 발굴된 유해마저 갈 곳이 없는 상황이다. 국가가 죽여 놓은 사람의 뼈가 정치적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참으로 안타까운 세상이다. 모든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덧붙이는 글 | 노용석 박사는

1969년 대구에서 출생하였고 인류학을 전공하여 2005년 2월 영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취득하였다.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민간인학살을 통해 본 지역민의 국가인식과 국가권력의 형성'으로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연구하였다. 연구 도중 2001년부터 경산코발트광산 유해 발굴에 참여하여 2006년 진실위에 들어오기 전까지 모두 두 차례의 경산코발트광산 유해 발굴을 주도하였다. 2006년 진실위에 유해 발굴 책임자로 들어온 후 2009년까지 10개소의 유해 발굴을 주도하였고, 2010년 진실위 종료와 함께 현재는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의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논문>
2010년 '죽은 자의 몸과 근대성'(한국의 민간인/전사자 유해 발굴 비교 연구)
2010년 '라틴 아메리카의 과거청산과 유해 발굴'


태그:#김성수, #유해발굴, #진실화해, #진실위, #노용석, #과거사위,함석헌평전,이영조,,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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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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