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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뒤 대통령직인수위에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어젠다>라는 삼성경제연구소의 비공개 보고서 한 편이 전달되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뒤 대통령직인수위에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어젠다>라는 삼성경제연구소의 비공개 보고서 한 편이 전달되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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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은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된 뒤 곧바로 <리더십을 위한 지침>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250여 명의 학자를 동원해 만든 1000쪽 분량의 보고서에는 '레이거노믹스'라 불리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비롯해 구소련과의 신냉전을 앞세운 외교·안보 정책, 신보수주의에 기초한 사회 정책 등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레이건 정부가 집권한 8년 동안 이 보고서 내용의 약 60%가 실행에 옮겨졌다고 한다.

2008년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는 '미국진보센터'가 <미국을 위한 변화 : 제44대 대통령을 위한 진보 청사진>을 발표했다. 657쪽의 이 보고서에는 지난 3월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한 '전국민건강보험' 도입안을 비롯해 이라크에서의 단계적 철군안, 부자들에 대한 최고소득세율 인상안 등 사회·경제 민주주의의 확산을 향한 오바마 정부의 정책 과제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들 과제는 하나하나 현실로 옮겨지고 있다.

헤리티지재단과 레이건 정부 그리고 미국진보센터와 오바마 정부의 만남은 비교적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한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뒤 대통령직인수위에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어젠다>라는 이름의 비공개 보고서 한 편이 전달되었다. 보고서를 작성한 곳은 다름 아닌 '삼성경제연구소'였다. 삼성경제연구소와 참여정부의 어색한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여러모로 불편해 보이는 이 만남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참여정부 출범 6개월 만인 8월 15일 광복 경축사에서 노 전 대통령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로 들어가야 한다"며 이른바 '국민소득 2만 달러론'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나섰다. 이는 '금융허브론', '산업클러스터 조성방안' 등과 함께 삼성 보고서에 담긴 주요 정책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참여정부가 집권 2년을 갓 넘겼을 무렵 그는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철 지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진보집권플랜>(조국·오연호 공저, 오마이북 펴냄)이란 제목을 보며 문득 떠오른 기억들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과연 그것이 참여정부의 한계이거나, 비슷한 시기에 여의도에 자리잡기 시작한 이른바 386세대의 한계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한국 진보·개혁 세력 전체의 한계였다. 국가를 운영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것은 비단 참여정부와 민주당, 또는 386세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엔 국가를 운영할 청사진이 없었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니 확인할 길은 없지만 민주노동당의 상황도 아마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령, 신용평가사 무디스를 앞세운 월 스트리트의 파상공세 앞에서 과연 '집권 민주노동당'이라면 이라크 파병을 피해 갈 수 있었을까. 2010년 오늘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이 처한 위태로운 상황은 그 어떤 가정도 허망하다 말하고 있다.

왜 <진보집권플랜>인가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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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진보집권플랜>이란 제목을 보며 가슴이 뛰었던 것은.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자신만만한 제목과 달리 글쓴이에 이름을 올린 건 단 두 명뿐이다. 게다가 한 사람이 묻고 한 사람은 답했다니 주인공은 한 명인 셈이다. 어쩌면 제목만으로 위의 사례들과 비교하는 것이 무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비슷한 기대를 품게 만드는 제목인 것만은 분명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떠오른 생각이 한 가지 더 있긴 하다. 제목을 그대로 풀어 보면 '한국 진보 세력의 집권 계획', 다시 말해 보수 정부를 무너뜨리고 진보 정부를 세우기 위한 계획이니 이명박 정부 입장에서는 '역성혁명' 음모가 담긴 책일 뿐이다.

보수의 시절이 조금 더 길어져, 그리하여 시대가 조금만 더 거꾸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조국 교수는 법정에서 자기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을지도 모른다. 세월이 하 수상한 요즘, '불온한' 책 제목을 보며 문득 든 또 하나의 생각이다.

"(이 대담은) 진보·개혁 진영이 왜 이명박에게 정권을 빼앗겼는지 성찰해보고, 그렇다면 어떻게 재집권을 할 것인지, 재집권을 하면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 등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대담을 제안한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가 밝힌 기획 의도다. 집권에 이르는 길과 집권 뒤에 가야 할 길, 비슷한 듯 다른 두 개의 길 모두를 그려내겠다는 뜻이다. 집권 전략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집권'이라는 거대한 수레를 끌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두 개의 바퀴가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단단한 두 개의 바퀴가. 책 제목을 보며 혹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지 모를 당신을 위해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진보·개혁이 묻지 않는 100가지 질문들

사람이 다섯 살 무렵에는 매일 100여 차례의 창조적 시도를 하고 65개의 질문을 하는 반면, 마흔다섯 살 무렵이 되면 하루에 단 두 번 새로운 시도를 하고 6개의 질문만을 던진다고 한다. 40년의 시간 동안 채워진 지식의 양이 가져온 자연스런 결과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두고 우리는 흔히 '늙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책에도 진보·개혁의 '조로(早老)'를 지적한 대목이 나오는데, 어쩌면 진보·개혁 세력이 너무 빨리 늙어 버린 것은 너무 빨리 '질문하기'를 포기한 탓일지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류사에 남은 굵직한 창조의 뒤에는 늘 그에 어울리는 질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왜 멀쩡한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지, 왜 도구는 인간의 힘을 빌려야만 움직일 수 있는지, 대체 왜 고된 노동의 몫이 노동자들에겐 돌아가지 않는지… 바로 그런 질문들이 인류의 역사를 힘차게 밀어왔던 것이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궁금해했을 법한, 하지만 누구도 애써 답을 찾지 않았던 그런 질문들 말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너무 빨리 질문하기를 포기해 버렸지만, 정작 아무런 답도 가지고 있지 못한 진보·개혁 세력들을 향해.

이 책의 첫 번째 질문은 프롤로그에, 당신이 미처 긴장하기도 전에 스치듯 지나간다. '왜 우리는 진보·개혁의 편에 서야 하는가'란 질문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1장에 해당하는 '플랜1'의 제목으로 이어진다. '왜 진보가 집권해야 하는가'. 시답지 않은 질문이라 여길 수도 있다. 당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뚜렷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기 때문에. 하지만 당신 주변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못 믿겠다면 당신의 생각을 한 번 들려줘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1장의 첫 번째 질문, '과연 진보의 집권은 가능할까'. '예'와 '아니오'로 나뉜 길을 따라가는 심리 테스트라면 어느 쪽이든 망설임 없이 고를 수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질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의 모든 질문에는 늘 '왜'라는 귀찮은 호기심이 따라다닌다. 다시 '과연 진보의 집권은 가능할까'.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집권을 가능케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명박 정부의 높은 지지율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삼성에 대한 이중 잣대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진보·개혁 진영의 혁신은 왜 이렇게 더디기만 할까', '이른바 386세대의 보수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1장에 등장하는 굵직한 질문들을 꼽아 보았다. 모두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으니 어림잡아 100여 개에 달하는 질문이 등장하는 셈이다. 2~5장에서는 진보·개혁 세력이 마련해야 할 정책 대안들을 사회·경제 민주화, 교육, 남북 문제, 권력 등의 사회 분야로 나눠 묻고 있고, 마지막 6장에서는 진보·개혁 세력이 통합을 이룰 수 있는 방안과 더불어 몇몇 대권 주자들에 대한 인물평을 묻고 있다. 진보·개혁의 집권을 바라는 이들이라면 마땅히 답을 내놓아야 할 질문들이다.

나는 이 책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이들 '질문'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익숙하게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뒤집어 의심해 보고 새로운 답을 찾아내려는 치열한 모색이기 때문이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도 없는 법이라 하지 않던가.

진보 청사진을 위한 '밑그림'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 조국 서울대 교수가 8월 10일 오후 서울 방배동 한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 조국 서울대 교수가 8월 10일 오후 서울 방배동 한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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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서울대 교수가 내놓은 대답들을 읽고 있노라면 그가 지난 7개월 동안 얼마나 진지하게 이 대담에 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마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거침없이 답을 내놓고 있다. 게다가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설명하듯 친절하게 답하고 있기까지 하다(대담이니까). 그의 그런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혼자다. 날고 긴다는 참모진들에 둘러싸인 대통령 후보도 아니다. 그런 그에게 헤리티지재단과 같은 싱크탱크 만큼의 몫을 기대하는 것은 분명 무리다. 그런 점에서 그가 내놓은 해법 하나하나를 두고 평가를 내리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니 서두를 필요가 없는 일이다.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가 풀어가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책으로 옮긴 대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때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조국 교수의 외모에 반한 탓일까, 책 앞머리에 오연호 기자는 그의 내공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곤란에 빠뜨릴 정도로 몰아붙이진 않았다. 덕분에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돌려 읽을 수 있는 책이 탄생했다. 그것은 이 책에 '여백'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으로 누군가가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비워둔 자리들이다. 그것을 채우는 일이 바로 우리 모두의 숙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감히 '밑그림'이라 말하고 싶다. 진보의 청사진을 위한 밑그림, 5000만 명에 달하는 우리 국민이 살 커다란 집을 짓기 위한 밑그림이다. 앞으로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갈 집의 청사진이 마련된다면 분명 이 책과 많이 닮아있을 것이라 믿는다.

왜 '조국'인가

지난달 22일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진보집권플랜> 출판기념  강연회가 조국 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진보집권플랜> 출판기념 강연회가 조국 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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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사족일 수도 있다. '왜 조국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아마 책의 제목만큼이나 '조국'이라는 이름에 눈길이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덧붙인다. 대체 왜 '그'일까.

"진보를 이야기하면서도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매력있는 진보는 정치 쪽에서 불가능한 걸까요? 노무현 이후 누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연호 기자의 말이다. '노무현만큼 매력있는 진보 정치인',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민들이) 신명을 바쳐 지지할 수 있고 함께 세상을 바꿔보고 싶은 사람", 그것이 오연호 기자가 찾아 헤맨 그 무엇이었고, 결국 그는 '조국'이란 인물을 찾아낸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의 반듯한 외모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의 서재 어딘가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글귀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권력의지가 있었다. 그것은 현재로서는, 우리가 흔히 말해온 정치인의 권력의지라기보다는 더 큰 의미의 권력의지다. 즉 우리가 반드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불타는 의지가 있었다."

역시 오연호 기자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과연 조국 교수에게 '불타는 의지'가 있는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우리 국민이 함께 세상을 바꿔보고 싶은 사람인지도 물론 아직은 자신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선택된 이유가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니 과연 그가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하는 괜한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 덧붙이자면, 나는 그가 이 무모한 대담을 선뜻 받아들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권력의지에 대한 믿음이 절반쯤은 생겼다.

가슴 뛰는 이 책을 권한다

이 책을 자신의 왼쪽에 놓을지 오른쪽에 놓을지를 고민하는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제껏 숱하게 보아온 모습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물론 이 책이 모범답안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밑그림만을 두고 서둘러 작품을 평가하려는 어리석음도 문제이거니와 수십 년이 지나도록 똑같은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게으름도 문제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새로운 정책과 새로운 인물 그리고 새로운 정당이 필요하다면 우선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 새로운 기준은 우리 사회의 평범한 다수가 공감할 수 있고, 가장 힘없는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의 변혁에서 최고의 덕목은 열정이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된 것은 아니네. 지혜가 있어야 하네. 지혜와 열정의 통일 이것이 승리의 별자리를 점지해 준다네."

고 김남주 시인이 유언처럼 남긴 시 '마지막 인사'의 한 구절이다. 열정과 지혜. 결국 이 책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당신에겐 '권력의지'가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의 '집권 플랜'은 무엇인가. 앞으로 남은 2년 동안 함께 만들어가야 할 숙제다. 수천, 수만 명이 머리를 맞대면 삼성경제연구소 몇 개라도 넘어설 수 있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가슴을 뛰게 하는 책을 만났다.


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오마이북(2010)


태그:#진보집권플랜, #조국, #오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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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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