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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노가 아닌 한복을 입습니다.' 카우나스 시내에서 열린 한복 홍보 행사.
 '기모노가 아닌 한복을 입습니다.' 카우나스 시내에서 열린 한복 홍보 행사.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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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라고 하면 대개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을 먼저 떠올린다. 그렇지만 몇 년 전 아프리카와 아랍에 소개된 드라마 <대장금>은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필자는 작년에 튀니지에서 이를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동유럽에서 한류는 아직 미미해 보인다. 올해 폴란드의 한 방송국에서 한국 드라마로서는 최초로 KBS의 <추노>가 정식으로 방영되었지만, 아시아에서처럼 한국 문화 바람이 불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실망하긴 이르다. 가요와 영화,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한국 문화는 이곳에서도 조용히 확산되고 있다. 이 기사에서 소개하려고 하는 리투아니아의 한류클럽도 그러한 예 중 하나다.

한국에서는 설날 연휴가 끝나가던 올해 2월 17일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에서는 이전에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한국 전통 고사(告祀)가 열려 현지 언론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고사를 주재한 이들은 바로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리투아니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동아리인 '한류클럽' 회원들. 인터넷과 지인들을 통해 한국 문화를 즐겨오던 현지 학생들이 한류를 확산시키고자 작년 가을 동아리를 결성하고 발족식 일자로 한국의 설날을 선정했던 것. 그들은 한국인들이 액운을 쫓고 좋은 기운을 모시기 위해 거행하는 고사를 재현해 관심을 끌려 했다.

돼지머리 쓸까 말까? 전국으로 중계된 한국식 고사

'한류클럽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가을 학기 시작 직후 열린 신입생 맞이 행사에서 선배들이 술과 고추 등을 갈아서 섞어 만든 약간은 짓궂은 음료수를 꽹과리에 담아 들이키는 신입회원들.
 '한류클럽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가을 학기 시작 직후 열린 신입생 맞이 행사에서 선배들이 술과 고추 등을 갈아서 섞어 만든 약간은 짓궂은 음료수를 꽹과리에 담아 들이키는 신입회원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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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처럼 실제 돼지머리를 구해서 고사를 지낼 것이냐 말 것이냐 등 준비 과정에서 크고 작은 논쟁이 벌어졌다.

이들은 리투아니아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 돼지머리 대신 돼지 그림을 사용해 고사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고사 장면이 리투아니아의 최대 방송사 중 하나인 <례투보스 리타스> 텔레비전의 저녁 뉴스를 통해 전국에 중계되는 등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아직 대사관을 비롯한 어떠한 공관도 진출해 있지 않은 리투아니아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선도하는 한류클럽 회원들은 한국 문화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11월 27일, 한류클럽을 이끌고 있는 세 임원(라우라, 리타, 아우드로녜)과 함께 리투아니아의 한류를 논하는 작은 좌담회를 마련해보았다.

2대 회장을 맡고 있는 라우라는 한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리투아니아 친구들이 소개해준 한국 가요를 접한 것을 계기로 한류에 폭 빠졌다고 말했다. 라우라는 그 후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인들과 친분을 쌓으며 한류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고 한다.

리타는 단짝친구인 라우라를 통해 한류를 접했으며, 아우드로녜는 미국 드라마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할 즈음 우연히 본 한국 드라마 <꽃보다 남자>가 큰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미국과 리투아니아의 기존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움을 한국 드라마와 가요에서 찾을 수 있었다는 것. 이 세 학생은 한류를 접한 것을 계기로 한국어에도 관심을 갖게 돼 한국어 학습도 열심히 하고 있다.

한국 아이돌 브로마이드와 동방신기 해체 특집 기사 실은 청소년 잡지

샤이니. 동방신기, 2PM, MISS A 등 리투아니아 청소년 잡지에 실린 한국아이돌 가수의 브로마이드.
 샤이니. 동방신기, 2PM, MISS A 등 리투아니아 청소년 잡지에 실린 한국아이돌 가수의 브로마이드.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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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말하는 한국 가요의 인기는 예상 밖이다. 이들은 몇 달 전 카우나스 지역 라디오에서 빅뱅의 노래를 소개하는 등 라디오에서는 이미 한국 가요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아우드로녜는 친구들과 라디오를 듣다가 호기심에 SS501의 노래를 신청했는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 노래가 전파를 타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필자도 현지 라디오에서 빅뱅의 '거짓말'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쇼핑센터에서 한국 노래를 틀어주는 일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의 한 대기업은 올봄부터 한국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활용해 신형 텔레비전을 홍보했다. 보아, 동방신기, 2NE1 등의 화려한 뮤직비디오를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위치한 전시장에서 소개해 관심을 끈 것이다.

이들은 현재 공식적으로 한국 가요의 순위를 매기는 작업은 하고 있지 않지만, 한류클럽 회원들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룹은 빅뱅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한때는 동방신기가 최고 인기그룹이었으나 해체 이후 그 틈새를 성공적으로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클럽 내에서 2PM이나 비스트 등의 인기도 상당하다고 한다.

또한 15세까지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청소년 잡지 <유스톄>에 올해 6월부터 매 호 한국 아이돌 스타들의 브로마이드가 등장했다. 동방신기, 2PM 같은 남성 아이돌 스타들 위주였지만, 얼마 전 Miss A의 브로마이드도 제작되어 여성 가수들에 대한 인기도 점차 올라가고 있음을 대변해 준다. <유스톄>는 동방신기의 해체가 결정될 무렵, 그와 관련한 특집기사를 내보낼 만큼 큰 관심을 보였다.

그 외에도 asianmusic.blogas.lt 등의 인터넷 공간을 통해 한국 가수 및 신곡 정보가 실시간으로 제공되고 있다.

청소년 잡지 <유스톄(Juste)>에 실린 동방신기 해체 관련 특집 기사.
 청소년 잡지 <유스톄(Juste)>에 실린 동방신기 해체 관련 특집 기사.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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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층은 얇지만 적극적으로 한국 가요 즐기는 리투아니아 젊은이들

들어온 지 몇 년 안 된 한국 가요가 적잖은 리투아니아 젊은이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비결은 무엇일까? 한류클럽 회원들은 입을 모아 아이돌의 춤 실력을 꼽았다. 이들은 한 번만 들어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정도의 독특하고 강렬한 리듬이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리투아니아는 물론이거니와 케이블 방송에 늘 등장해 현지 젊은이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러시아 음악에서도 한국 아이돌들처럼 강렬한 춤과 노래를 동시에 선보이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리투아니아에서 음악을 비롯한 한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층은 아직 매우 얇은 게 사실이다. 동호회는 한류클럽 한 곳 뿐이고, 한국의 음반 기획사가 정식으로 진출한 것도 아니며, 정식 음반이 발매된 적도 없다. 지금은 이곳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한 불법 다운로드나 클럽 활동 등을 통해 자발적으로 한국 음악을 찾아서 듣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이곳에서 일본 음악이 유통되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일본 음악은 이미 많이 전파됐고, 유럽의 MTV를 통해 일본 음악이 소개되는 일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또한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에서 개최되는 크고 작은 가요제에 일본 그룹이 참여하는 일도 많다. 그리고 카우나스에서는 이미 몇 년 전에 비슷한 계기로 결성된 일본 문화 클럽도 활동하고 있다. 일본 문화 클럽은 일본 정부와 현지 대사관을 통해 여러 가지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음악을 매개로 한 한류 확산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아직 수는 적지만, 한류클럽을 중심으로 한국 문화 확산에 노력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류클럽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가하는 학생들은 대략 20명 정도. 그렇지만 페이스북에 개설된 누리집에 가입한 회원의 수는 150명을 넘어섰다. 그중에는 요즘 점점 늘어나고 있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리투아니아와 인연을 맺은 한국인도 적잖이 있지만, 대부분은 거리나 시간 문제 때문에 한류클럽 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리투아니아 젊은이들이다. 오프라인 모임에 참여하지는 못하지만 인터넷 공간을 통해 한류에 대한 따끈따끈한 정보와 감상을 나누는 것이다.

한류클럽 회원들은 한국 관련 행사가 열릴 때마다 솔선수범해 자원봉사를 하고, 새로운 정보를 주변과 공유하며 활동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또한 한국 영화 상영회, 한국 음식 체험. 한복 체험 등 다양한 행사를 주최하며 한국 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운영하는 한류클럽 누리집.
 페이스북에서 운영하는 한류클럽 누리집.
ⓒ 한류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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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요리 체험 행사로 열린 김밥 만들기.
 한국 요리 체험 행사로 열린 김밥 만들기.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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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가요 시장, 한류가 확산될 틈새 충분

필자가 느끼기에 리투아니아 등의 가요 소비 추세가 변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 팝송과 러시아 가요를 식상해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틈새시장이 생긴 것. 터키 음악이 그 틈새를 잠시 메운 적이 있지만 꾸준한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고,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음악이 다시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모양새다.

MTV를 비롯한 유명 음악채널을 통해 한국 가요를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가요제나 축제 등에 한국 가수들이 참가해 현지인들과 접촉을 늘려나간다면 음악을 매개로 한 한류는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도 충분히 공감을 얻고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리투아니아 한류클럽이 한국 가요계에 던지는 쓴 소리
"리투아니아에서 한류는 우리 손에 맡겨주세요!" 그동안 리투아니아 청소년 잡지에 나온 한국 아이돌의 사진을 보여주며 환히 웃는 리투아니아 한류 3인방.
 "리투아니아에서 한류는 우리 손에 맡겨주세요!" 그동안 리투아니아 청소년 잡지에 나온 한국 아이돌의 사진을 보여주며 환히 웃는 리투아니아 한류 3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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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에서 한류클럽의 세 임원이 한국 가요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들은 이상해 보이는 점도 여럿 지적했다.

라우라는 "뮤직비디오에서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것 등을 이유로 방송 금지가 됐다는 소식을 접하면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주관적인 잣대 아니냐는 지적이다. 

아우드로녜는 "일시적 유행이나 추세에 따라 리듬과 분위기가 결정되며, 심지어 한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았던 모티브가 다른 그룹의 작품에서 금방 엿보이는 일이 다반사"라고 아쉬워했다. 또한 지나치게 미국의 팝음악만을 모델로 추구하다보면 질 저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도 밝혔다.

리타는 "미성년자가 많은 여성 그룹 멤버들의 의상이 지나치게 야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리타는 "만약 보수적인 리투아니아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태그:#한류, #빅뱅, #동방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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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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