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벽을 세우는 작업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음료수를 들고온 푼수 아내가 창틀 사이에서 기분좋게 폼을 잡고 있다. "인효 엄마는 빠지라니께..." "그래? 나를 찍겠다고 하는 줄 알았지."
 벽을 세우는 작업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음료수를 들고온 푼수 아내가 창틀 사이에서 기분좋게 폼을 잡고 있다. "인효 엄마는 빠지라니께..." "그래? 나를 찍겠다고 하는 줄 알았지."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혼자서 재미있게 잘 살았네요."

언젠가 어떤 진보 단체의 모임에서 자기 소개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동안 우리 네 식구의 적게 벌어 잘 먹고 잘 싸워가며 잘 살아 온 얘기를 늘어놓았더니 누군가 내게 볼멘소리로 말했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등지고 혼자서만 잘 살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부대껴 살아가면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당한 말씀이었습니다. 맞는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와 접근 방법이 달랐습니다. 어디서건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뱃속 편하게 땅을 일구며 재미있게 살다보면 저절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세상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과 함께 2년 가까이 아파트 생활을 했지만 찾아오는 손님들은 불평불만 가득한 이웃집 아줌마들과 돈 갚으라고 독촉하는 은행이며 세금 고지서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누군가와 생명 평화를 논의할 짬도 없었습니다.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돈벌이에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시골 생활을 하면서 양심 바른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그들과 함께 시민사회 활동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부조리한 세상에 관심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터전, 고흥에서도 그 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전화선조차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살아간다고 결코 도피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사람들 속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난 여름 집안으로 날아온 장수풍뎅이 손님. 곱게 돌려보냈다.
 지난 여름 집안으로 날아온 장수풍뎅이 손님. 곱게 돌려보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는 산간 오지, 바다와 같은 대자연, 생명의 진면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자연 속에서는 생태적인 만남이 있기 마련입니다. 생태적인 사람과 사람이 만나다 보면 세상의 아픔과 세상의 즐거움을 만나게 되고 대자연에 거스르는 세상의 부조리와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을 직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망각하고 살아 온 본래의 생태적인 즐거움을 되찾기 위해 그 어떤 일을 도모하게 됩니다. 생면부지의 낯선 땅, 아무리 산간 오지라 해도 갈아놓은 맨 흙밭에 바람을 타고 꽃씨도 날아오고 풀씨도 날아오는데 사람인들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우리 집을 포함해 집 두 채 달랑 있는 바닷가 오지임에도 번듯한 새집에 깃들어 기운이 펄펄 살아난 아내는 이사 오자마자 이력서를 챙겨 방과 후 강사 자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큰 도시에 비해 문화적 여건이 낙후한 고흥에는 미술 전공자들이 귀했던 모양입니다. 아내는 지난 봄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세 군데의 초등학교에서 강사 자리를 얻었습니다. 당장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했던 아내였기에 그 일자리로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애들을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지난 봄부터 아내가 방과 후 학습 강사로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에서 그림을 배우는 동네 아이들이 놀러왔다.
 지난 봄부터 아내가 방과 후 학습 강사로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에서 그림을 배우는 동네 아이들이 놀러왔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어떤 놈여 나보고 할아버지라고 한 놈이..." 수염이 허옇게 탈색되어 가고 있는 나보고 "할아버지! 할아버지!" 불러댔던 녀석이 손을 번쩍 들고 있다.
 "어떤 놈여 나보고 할아버지라고 한 놈이..." 수염이 허옇게 탈색되어 가고 있는 나보고 "할아버지! 할아버지!" 불러댔던 녀석이 손을 번쩍 들고 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바닷가에 야외 영화관을 만들었습니다

아내가 주변 아이들에게 애정을 갖기 시작하자 그 마음자리 따라 아내에게 그림을 배우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놀러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의 친구들도 놀러왔습니다. 이사 온 지 2개월도 채 안 돼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되면 풀밭이나 다름없는 집 앞 마당엔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예전에 대학에서 가르치던 방송과 학생들을 위해 장만했던 프로젝트를 이용해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산간 오지 바닷가에 조악한 야외 영화관이 생긴 것입니다. 집 벽에 긴 천을 내걸어 대형 화면을 만들어 놓고 마당에 의자며 집짓다가 남은 판때기를 동원해 영화를 보고 있는데 어둠 속 저만치서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집 벽에 조악한 천을 내걸어 놓고 민박 손님으로 놀러온 <대전시민아카데미> 청소년들과 함께 마당에서 영화을 보았다.
 집 벽에 조악한 천을 내걸어 놓고 민박 손님으로 놀러온 <대전시민아카데미> 청소년들과 함께 마당에서 영화을 보았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아이들과 반딧불이만큼이나 기분 좋은 어른들도 심심찮게 찾아왔습니다. 아는 사람들도 찾아오고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도 찾아왔습니다. <오마이뉴스> 연재 기사를 통해 도시인, 귀농인들뿐만 아니라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이 불쑥불쑥 찾아왔습니다.

복잡한 머리로 찾아와 생각 없이 돌아갔고 생각 없이 찾아와 산과 바다를 담아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멀고 먼 대도시에서 찾아온 그저 반갑고 고마운 손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40대 중후반, 하나같이 자본에 질질 끌려다녀야만 하는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생태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차를 마시며 생태적인 삶을 얘기하고 자연농에 대한 정보를 나누기도 합니다. 술잔을 기울여 가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정치현실과 생명의 강을 몰살시키고 있는 저 추악한 인간 말종들에 대해 분노하기도 합니다.

아내는 초등학교 방과 후 학습 강사로 나서면서 이웃 사람들도 사귀고 때로는 바닷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뭔가를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기운 넘치는 아내에게 바다는 그 기운을 받아낼 수 있는 넉넉한 품이었을 것입니다.

아내가 편한 얼굴로 돌아온 것은 방과 후 학습 강사 일을 하면서 충당되는 생활자금 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바다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개발 지상주의자들에게 충남 공주의 보금자리를 내주면서 뒤틀리기 시작한 아내의 마음자리를 바다라는 대자연이 치유해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잔잔하게 가라앉은 파도가 언제 어떻게 폭풍우를 동반한 거센 파도로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생활의 여유가 찾아들자 아내는 어느 날 기분 좋게 말했습니다.

"집 옆에다가 작은 공간 하나 지을까? 아이들이 놀러오면 책도 볼 수 있게."
"야! 그거 좋겠다, 아주 작은 도서관을 꾸며 놓고 마당에서 뛰어놀다가 싫증나면 책도 보고 그림도 그릴 수 있게 하구, 책 보기 귀찮으면 바다로 뛰쳐나가 해수욕도 하고, 한 달에 한번쯤은 영화도 보여줘 가며 그렇게 살믄 좋겠다. 우리 둘이 번 돈을 합치면 이제 2백만 원이 넘으니께, 생활비 남는 걸루 애들 간식거리도 마련해 놓고..."
"그래, 그러면 좋겠다."
"근디 당장 그 공간 지을 돈은 어떻게 마련하지?"
"그동안 모은 돈도 좀 있고 나머지는 어디서 빌려올 수 있어."

아주 작은 도서관은 스스로 인건비를 줄여가며 새 보금자리를 지어 주었던 윤구씨가 일주일 만에 지었다.
 아주 작은 도서관은 스스로 인건비를 줄여가며 새 보금자리를 지어 주었던 윤구씨가 일주일 만에 지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뚝딱뚝딱 만든 열 평짜리 도서관 겸 화실... 다시 기분 좋게 빈손이 됐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아내가 사고를 쳤습니다. 아주 기분 좋은 사고를 쳤습니다. 아내는 우렁각시처럼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빚을 내고, 그동안 방과 후 강사일과 한여름 민박집을 운영해서 모은 얼마간의 돈을 합쳐 10평짜리 도서관 겸 화실을 뚝딱 지은 것입니다. 새 보금자리를 지어 주었던 이윤구씨가 새집 지을 때 남은 얼마간의 목재와 버려진 문짝을 끼워 달아가며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일주일 만에 기초공사에서 지붕까지 뚝딱 완성시켰습니다.

아이들 도서관 겸 화실이 세워지자 이사 오기 전까지만 해도 뭘 해서 먹고 살 것인가 근심이 가득했던 아내의 얼굴색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평생 살고지고 할 고흥 땅, 산간 오지 바닷가에서 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고집불통인 우리 부부가 뜻이 맞아 함께 할 수 있는 재밌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다시 빈손이 되었지만 기분이 좋습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빚을 내지 말고 지원금을 받아서 마을 도서관 형식으로 지으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똥배짱 하나로 겁없이 살아왔듯이 그냥 이런저런 간섭 받지 않고 우리 힘 닿는대로 짓고 싶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지원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간섭이 따르고 부담되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간섭 받고 책임감에 짓눌리게 되면 사는 게 별 재미가 없을 것이니까요.

아이들을 위한 작은 공간은 그동안 우리 부부가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 놓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충남 공주에서 아내에게 그림을 배웠던 아이들이 건네준 그 순수한 돈으로 땅을 구입했고 이제 그 공간을 또 다른 아이들에게 되돌려 줄 일이 생긴 것입니다. 지난 여름 먼길 마다하지 않고 우리집에 찾아와 민박 신세를 지었던 사람들이 건네준 돈을 쑥스럽게 받아 챙겼는데 그걸 기분좋게 되돌려 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집 아이들의 친구 녀석들이 노는 토요일이 되면 종종 놀러와 잠을 자고 가기도 한다. 동네 뿐만 아니라 멀리 면소재지에 사는 녀석들도 놀러온다.
 우리집 아이들의 친구 녀석들이 노는 토요일이 되면 종종 놀러와 잠을 자고 가기도 한다. 동네 뿐만 아니라 멀리 면소재지에 사는 녀석들도 놀러온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는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아이들, 늘 일손 바쁜 엄마 아빠와 살아가는 아이들, 다복한 가정의 아이들, 경쟁 교육에 짓눌려 먼길 떠나 가출하고픈 아이들, 우리 집을 찾아오는 모든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꾸며 더불어 신나게 노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놀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 주는 일입니다. 분수에 넘치는 번듯한 집을 지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 고마움을 누군가에게 돌려줄 일이 생긴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이 될 건물에서는 창문 저만치 바다가 조금 보입니다. 집 옆 산기슭에 터를 다져 지붕까지 말끔하게 올렸지만 아직 장판이며 도배 등 내부 작업이 남았습니다. 그건 우리 부부가 직접 할 것입니다.

그 작업을 마치고 나면 어깨 너머로 배운 솜씨로 멋진 책장을 짜 넣을 것입니다. 책장에 꽂아 놓을 책들은 마련했냐구요? 몇몇 분들이 헌 책을 보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빈 공간은 언젠가 채워질 것이라 믿습니다. 책장에 책이 가득한데 찾아온 녀석들이 놀기만 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아니,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녀석들과 그냥 신나게 놀지요 뭐.

지붕까지 완성한 열 평짜리 도서관 겸 화실. "내려와! 내가 한다니께." "칠하는 건 내가 도사여." 그림쟁이 아내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나무가 상하지 않게 페인트 칠을 했다.
 지붕까지 완성한 열 평짜리 도서관 겸 화실. "내려와! 내가 한다니께." "칠하는 건 내가 도사여." 그림쟁이 아내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나무가 상하지 않게 페인트 칠을 했다.
ⓒ 송성영

관련사진보기



태그:#기분좋은 사고, #아주 작은 도서관 , #아이들을 위한 공간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2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