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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20분, 동행들이 새벽 열차를 타고 강릉에 가는 것을 배웅하고 방에 올라가 자리를 깔았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 우와, 여긴 정말정말 시골이구나, 생각했다. 말 그대로 산골짝이 아닌가.

어린 시절 외가 마루에서 자던 느낌이 이랬나. 강릉만 해도 열대야라는데 여기는, 너무너무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분다. 민둥산역에는 쓰지 않는 열차를 개조해 만든 침식객차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역무원들이 야근할 때 교대로 잠을 잘 수 있게 만든 곳인데, 열차가 철판으로 돼 있다 보니 단열이 전혀 안 되어서,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요즘 같은 한여름에도 새벽이면 추워서 깬다고 한다. 어쨌거나 여행자는 선풍기가 따로 없는 산바람, 강바람이 차고 맑아서 그저 좋다.

밤이고 낮이고,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회회 분다.
 밤이고 낮이고,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회회 분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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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로 여행이 내게 가르친 소통, '고객님'이 아닌 '사람'으로서

아침에 눈을 떠보니 창밖은 이미 대낮처럼 환하다. 열 시간은 잔 듯 상쾌한 기분이라 아차, 늦잠을 잤구나 싶었다. 하지만 시계를 보니 시간은 여덟 시 정각. 기차 시간이 여덟 시 반이니, 맞게 일어났다.

다섯 시간 밖에 안 잤는데도 상큼하기 그지없는 기분에 흡족해하며 짐을 챙겼다. 내일로 숙소를 이용하면 역시 기차역이 가까워 편리하다. 지난 밤 역무실에서 함께 강원랜드와 내 여행 코스에 대해 수다 떨던 역무원께 인사를 하고 기차에 올라탔다. 간밤에 비가 온 모양이지. 땅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

내일로 여행을 하며 배운 것 중에는 코레일 직원들에 대한 것도 있다. 표를 끊고, 표에 적힌 좌석을 찾아 앉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리면 그만인 여행에서는 역무원과 소통할 일이 별로 없다. 기껏 해야 '○○역 너무 불친절해요!'와 같은 민원성 댓글 정도? 그나마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통해 승차권을 예약하게 되면서 역에 있는 직원들과는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난 돈 냈고, '고객'으로서 서비스를 이용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내일로 티켓은 코레일 홈페이지나 모바일로 예약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직접 역에 가거나 전화, 각 역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채널을 통해서만 발권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처음엔 좀 귀찮았다. 일반 승차권은 클릭 몇 번이면 결제까지 원스톱인데, 내 이름과 주민번호 등의 개인정보를 알려주어야 하고 발권한 역에서 나라는 승객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부담이었다. 그냥 오는 듯 가는 듯 스치는 듯 철저한 개인으로, 눈에 띄지 않는 익명의 소비자인 것에 익숙해서다.

인간의 사회성은 분명 학습된다. 티켓을 발권하고, 내일로 숙소를 예약하고 또 몇 가지 문의를 하기 위해서 게시판의 글, 이메일, 전화 등으로 들어본 적도 없는 역의 직원들과 소통했고, 여러 차례 같은 과정을 거치며 그에 편안하고 익숙해진, 모종의 재미마저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니까 시골 사람들이 살갑고 도시 사람들이 쌀쌀맞은 건 그저 익숙한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낮은 지붕이 서로 맞닿은 골목의 주택가에 살든, 단절의 상징이라는 고시원이나 아파트에 살든 간에 인간은 누구나 소통하고 싶어하고, 조금만 익숙해지면 얼마든지 정다운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민둥산역에서 머문 날 새벽, 1일 역무체험 비슷한 걸 해봤다. 이러다 코레일 취직하는 거 아닌가 몰라~
 민둥산역에서 머문 날 새벽, 1일 역무체험 비슷한 걸 해봤다. 이러다 코레일 취직하는 거 아닌가 몰라~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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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거쳐간 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나에게 표를 팔고, 그에 따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가 아니었다. 젊은 여행자를 따뜻한 미소로 맞아 주고, 짐을 맡기고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잠잘 곳도 마련해 주는,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같은 존재였다. 어떤 역의 직원은 "백반 1인분 시키기가 뭣해서요"라며 아침밥을 사주기도 했고, 어떤 역에서는 교통편이 애매한 근처 관광지를 둘러보고 오는데 바쁘지 않은 시간이라며 차로 데리러 와 준 적도 있다.

한 시즌에 거쳐가는 내일로 여행자만 해도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니까 한결같이 친절하기 힘들 법도 한데, 대개 한 번 왔다 가면 그뿐일 여행자를 정성스럽게 대하는 이들에게서 매번 깊은 감동을 받는다. 돈 내고 이용하는 숙소에서도 받기 어려운 종류의 감동이다.

송천과 골지천 '어우러지는' 아우라지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어우러짐에 대해 생각하며, 정선선을 타고 아우라지로 들어간다. 아우라지는 송천과 골지천이 '어우러진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정선아리랑의 가사 유래지이기도 하다.

무엇을 보자는 목적 하에 어떤 곳에 가기도 하지만 그냥 그곳에 가보고 싶어 가는 일도 있다. 강원도 여행 지도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우라지에 별 관광거리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유명한 정선 레일바이크를 타러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레일바이크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하루에 몇 차례 다니지도 않는 정선선의 종점 아우라지까지, 끝까지 한 번 가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지금은 일반 열차가 다니지 않는 철로. 풍경열차와 레일바이크 코스로만 이용되고 있다.
▲ 아우라지 기찻길 지금은 일반 열차가 다니지 않는 철로. 풍경열차와 레일바이크 코스로만 이용되고 있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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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은 패키지 관광이 많아서인지 코스가 너무나 정형화된 경향이 있다. 어딜 가면 무얼 꼭 봐야 하고, 무엇이 유명하다는 식이다. 물론 괜히 이름난 게 아닐 테니 대체로 들은 바를 좇아 다니게 되지만, 이름 없는 길,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 유명 관광지에서 한 뼘만 벗어나면 있는 숨은 진주를 놓친다면 너무 아쉬운 일이다.

관광지가 아닌 곳에 대해서 "가 봐야 아무 것도 없다"며 폄훼키도 하고, 막상 유명한 곳에 와서도 "와 보니 별 것도 아니네"라며 무감동한 사람들이 많은 걸 안다. 그러나 조금만 마음을 연다면, 길가의 돌멩이 하나라도 걸작 예술품으로 보이지 않을까?

천연기념물 어름치를 형상화한 일종의 스낵바. 코레일관광개발에서 운영하며, 간단한 식음료를 판매한다.
▲ 어름치 유혹 천연기념물 어름치를 형상화한 일종의 스낵바. 코레일관광개발에서 운영하며, 간단한 식음료를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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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지를 가로지르는 오작교
 아우라지를 가로지르는 오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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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로 떠난 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처녀의 마음
▲ 아우라지 처녀상 객지로 떠난 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처녀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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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오래된 선로를 따라 걷는다. 눈앞에는 나즈막한 산이 보이고, 선선한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 온다. 건널목을 지나니 아우라지가 나온다. 새하얀 구름다리 건너편에 작은 정자와 함께 그다지 크지 않은 아우라지 처녀상이 보인다. 그 옆으론 꽤 기다랗게 돌다리가 놓여있다. 하얀 돌이 가지런히 늘어선 모습에 얼른 건너 보고 싶어 설렌다. 사뿐한 걸음으로 구름다리를 넘었다. 배로 건너갈 수도 있다 한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 주게
싸리골 올 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싸이지
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 <정선아리랑> 애정편

옛날 아우라지를 사이에 두고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살고 있었다. 둘은 함께 싸리골에 동백을 따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간밤에 내린 비로 물이 불어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었다. 그 안타까움을 노래한 것이 이 <정선아리랑>의 사랑가 부분이다.

아우라지 처녀상에도 사연이 있는데, 이는 뗏목을 타고 객지로 떠난 임을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이란다. 송천과 골지천이 합수해 큰 강을 이루고 있다보니 강을 따라 먼 길 나서는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뗏목과 나룻배가 많이 이용됐다. 요즘 아우라지에선 여름마다 뗏목축제를 열기도 한다.

구름다리를 건너자 나타난, 초목이 우거진 산책로
 구름다리를 건너자 나타난, 초목이 우거진 산책로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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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지 처녀상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니, 초목이 우거진 산책로가 나온다. 여행을 다니며 나무도 풀도 많이 보았지만 이곳은 무언가 분위기가 남다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달랐다. 발자국을 떼어 놓을 때마다 서로 다른 새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흔히 볼 수 있는 새가 아니었다. 어릴 적 동화책을 읽을 때, 새소리를 '뾰로롱'이라고 표현하는 의성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아, 정말로 '뾰로롱 뾰로롱'하고 우는 새가 있었다. 새소리가 노랫소리와 같다는 비유가 비로소 이해된다.

도시, 아니 웬만한 시골에서도 만나기 힘든 미루나무에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 미루나무 도시, 아니 웬만한 시골에서도 만나기 힘든 미루나무에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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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 처음 만난 '미루나무'

아름다운 새소리에 귀가 황홀하고, 처음 만나는 신기한 나무들에 눈을 빼앗겼다. 몇 분이나 시선을 머물게 했던 그 나무의 이름이 미루나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사실 미루나무라면, 어릴 적 부른 동요의 가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름으로는 그닥 낯설지 않은 나무다. 하지만 그 미루나무가 어떻게 생겼다는 걸,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내 세대만 해도 이렇게 동요를 이해하지 못한다. 요즘 어린이들은 더할 것이다. '애들이 애들답지 못하다'고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몇 달 전,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초등학교 이삼 학년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아이들이 입을 모아 2NE1의 <I don't care>를 부르는 걸 듣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합창이라도 하듯 무진장 열심히 부르고 있었다. 아이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그 애들이 2NE1은 본 적이 있어도 미루나무를 본 적은 없을 것이니.

아우라지에 놓인 돌다리
 아우라지에 놓인 돌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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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는 송림의 등산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길을 따라서 계속 다른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심심치 않은 길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 길의 끝까지 걸어갔다오고 싶었지만, 기차 시간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아우라지에 들고 나는 열차가 하루에 딱 두 번씩밖에 없어서다.

하지만 절대로 돌다리를 건너는 일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런 돌다리를 건너보는 게 얼마만이지? 아니, 진짜로 건너본 적이나 있었나?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랬지, 옛 속담을 상기하며 조심조심 건너편 뭍에 이른다.

맑은 곳의 공기를 한껏 폐에 집어넣고 다시 돌다리를 건너 오는데 소나기가 후두둑 쏟아진다. 어찌나 세차게 내리는지, 첫 디딤돌을 밟을 때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돌다리를 다 건넜을 즈음엔 하얀 돌이 새까맣게 젖어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떠올렸다.

미루나무를 보고 동요를 이해하고, 돌다리를 건너오며 동화를 이해했다. <소나기>의 두 소년소녀가 사랑했던 곳이 꼭 여기 아우라지였을 것만 같다. 어렴풋한 어릴 적 기억 속에서, 소녀는 소년의 등에 업혀 돌다리를 건넜고 소나기를 맞아 감기에 걸린다. 아, 눈물이 날 듯 아름답다. 청춘이든 소년이든 중년 혹은 노년이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해야 할 일이다.

아우라지, 미루나무, 소나기를 뒤로 하고 집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
 아우라지, 미루나무, 소나기를 뒤로 하고 집으로 가는 기차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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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가적인 풍경의 강원도 정선, 안녕!
 목가적인 풍경의 강원도 정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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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0년 7월 23일에 여행한 기록입니다. 더 많은 사진과 정보는 기자의 블로그에 있습니다.



태그:#아우라지, #정선아리랑, #아우라지처녀상, #미루나무, #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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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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