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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를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인사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의 공판이 열린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인사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의 공판이 열린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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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요… 여보세요."

지난 2일 한명숙 전 총리의 13차 공판. 검사의 신문을 제지하던 김형두 재판장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오전부터 밤까지 계속되는 '공판 강행군'을 하루 걸러 진행하면서도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았던 김 재판장이 그런 표정을 지어보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발단은 마지막 공판까지 반복된 검찰의 '반칙'이었다. 변호인측 피고인 신문이 끝난 후 반대 신문에 나선 노만석 검사는 피고인에 대한 모욕적 신문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단이 모두 빼기로 합의한 질문을 한 전 총리에게 던졌다.

"(제주도 골프빌리지에서) 골프 친 것을 감출 의향이 없다고 했는데 왜 본명이 아니라 가명으로 골프를 했는지 말씀할 수 있나요? (잠시 뜸을 들이다) 그리고 가명으로 한 것은 검찰 수사로 확인돼서 객관적으로 드러난 것인데 설명해 줄 수 있나요?"

검찰이 합의를 깨고 반칙을 하자 당장 변호인단의 항의가 이어졌고 재판부는 강한 유감을 나타냈다. 김형두 재판장이 검사를 향해 이례적으로 "여보세요"라고 쏘아붙인 것도 이때였다.

김 재판장은 "어제 그 질문이 모욕적이라고 해서 바꿨는데 그걸 다시 반대신문하면서 물어보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지적했다. 노만석 검사가 "어제 제가 그 자리에 없어 몰라서… "라는 변명을 내놓자 김 재판장은 더 단호한 목소리로 "또 하나 지적할 것은 (한 전 총리가 가명으로 골프를 쳤다는 게) 객관적으로 입증됐다고 하는 데 그건 검찰의 생각일 뿐"이라고 면박을 줬다.

반복됐던 검찰의 반칙... 불리한 전세 역전시키려 무리수

검찰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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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검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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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검찰의 반칙은 그동안 여러 차례 반복됐다. 그 때마다 검찰의 증거 제출 및 증인 신문 방식이 형사소송법과 형사소송규칙에 어긋난다는 재판부의 지적이 이어졌지만 검찰의 무리수는 계속됐다.

지난 달 15일 4차 공판에서 검찰은 정식 증거로 제출되지 않은 자료를 증인 신문에 이용하려다 재판부의 제지를 받았다.

이날 공판에서 2006년 12월 20일 문제의 총리공관 오찬에 참석했던 강동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 "오찬이 끝난 후 4명이 거의 동시에 나왔다"고 증언하자 권오성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 부장검사는 검찰 내부 보고용인 면담보고서를 제시하면서 "서초동의 한 식당에서 면담할 때는 정세균 전 산업자원부 장관과 증인이 먼저 나왔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면담보고서를) 법정에 정식 증거로 내든지 아니면 제출되지 않은 자료는 사용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불과 4일 후인 지난 달 19일 7차 공판에서도 검찰은 증인 신문을 하다 재판부로부터 주의를 받았다.

검찰은 한 전 총리 시절 의전비서관이었던 조아무개씨를 상대로 곽영욱 전 사장이 건넸다는 5만 달러 사용처를 추궁하면서 "한 전 총리가 재직하는 동안 해외출장비를 쓰지 않고 모두 모았다 해도 2만 달러에 불과한데 연 10만 달러에 달하는 아들 유학비용을 그걸로 충당할 수는 없겠죠?"라고 묻다가 제지를 당했다.

김형두 재판장은 "유학비용과 출장비를 정확히 계산해서 사실을 물어야지 왜 자꾸 증인의 의견을 묻느냐"고 지적했다. 이에 이태관 검사가 한 전 총리의 해외 순방 일정을 제시하면서 '암산'으로 출장비를 계산하려다 "갑자기 계산하려니 힘들다"며 황급히 신문을 마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지난 달 26일 9차 공판에서는 검찰의 증거 신청이 형사소송법에 어긋난다며 거부당하기도 했다.

검찰은 이날 "오찬이 끝난 후 항상 총리가 먼저 문을 열고 나왔다"는 총리공관 경호원 윤아무개씨의 증언이 나온 후 부랴부랴 추가로 조사한 경호팀 직원 4명의 진술조서를 증거로 제출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형사소송법 조항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증거 채택을 거부했다. 김형두 재판장은 "기소 후에는 법관의 면전이 아닌데다 피고인 측의 반대신문 권한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진술은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반칙보다 더 심각했던 부실 수사... 공소장 곳곳에서 누수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인사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지난달 31일 낮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1차 오전 공판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인사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지난달 31일 낮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1차 오전 공판을 마친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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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검찰은 재판 초기부터 불리하게 돌아가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무리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검찰의 궁색한 처지만 도드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반칙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검찰의 부실 수사다. 곽영욱 전 사장을 비롯한 여러 증인들의 진술 번복과 재판 중 공소장을 변경한 사례 말고도 부실 수사의 정황은 여럿 있었다. 

먼저 검찰은 법정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언이 나온 후에야 이를 반박하기 위해 '뒷북 수사'를 벌였다.

검찰은 기소 전까지 총리공관 경호원 중 윤아무개씨 단 한사람에 대해서만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총리공관의 경호 상황과 경호팀의 동선 등에 대해 조사하면서 단 한 사람의 진술에 의존한 것이다. 보통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도 특정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최소 2명 이상의 관계자들에게 '크로스 체킹'(중복 확인)하는 것이 기본인데 검찰은 전직 총리를 기소하면서도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

앞서 살핀 것처럼 검찰은 총리공관 경호원 윤씨가 법정에서 검찰에 불리한 증언을 하자 나머지 4명에 대한 추가 조사를 벌였다. 권오성 부장검사는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추가 수사"라고 강변했지만 누가 봐도 분명한 '땜질 수사'였다.

김형두 재판장도 "경호원 4명에 대한 조사가 필요했다면 기소 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도 검찰은 하지 않았다"며 "이는 검찰의 과실"이라고 지적했다.

환전 기록 못 밝힌 검찰에 변호인 "답답하다"

검찰은 또 "한 전 총리가 곽영욱에게 받은 5만 달러를 아들 유학비용 등으로 썼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한 전 총리의 환전 기록을 꼼꼼히 살피지도 않았다.

검찰은 재판초기부터 지난 2일 결심 공판에 이르기까지 "한 전 총리와 가족들이 여러 번 해외로 출국하고 아들이 미국 유학을 했음에도 한 전 총리와 가족의 환전 기록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 전 총리의 환전 기록은 있었다. 다만 검찰이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백승헌 변호사는 최후진술을 하면서 답답함을 호소했다.

"검찰은 한명숙 전 총리 명의의 환전 및 송금 기록이 없다며 5만 달러를 아들 유학 비용으로 썼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변호인단이 재판부에 낸 자료에 환전 내역이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집중적인 수사를 했다면서 왜 살피지 않았을까요. 답답합니다. 미리미리 살펴서 의심이 가셨다면 혹시라도 이렇게 큰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는 이 재판절차를 미연에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헛된 허망을 가져봅니다."

이날 결심공판을 끝으로 변론은 모두 끝났다. 이제 4일 후면 총리로는 처음으로 뇌물 혐의로 법정에 섰던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선고가 내려진다. 판단은 재판부의 몫이고 제 3자가 섣불리 유무죄룰 점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게 있다. 검찰이 이번 재판에서 보여준 형사소송법을 무시하는 증거 제출, 막무가내식 증인 및 피고인 신문, 또 공소장 곳곳에 누수를 초래한 부실 수사로는 강화되는 공판 중심주의에 적응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재판 결과와 상관 없이 검찰이 이번 재판에서 얻어야할 교훈이다.


태그:#한명숙, #곽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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