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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19일, 5명의 남성이 바다로 나갔다. 요트 프런티호에 몸을 실은 이들은 여수→거문도→제주도 찍고 다시 거문도→백도→여수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바다로 향한 것. 이들이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항해를 재구성해봤다. - 기자 말)

 해상왕 장보고 후예들 450km 바닷길 체험에 나서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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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9일 오후 6시, 여수 밤바다는 비교적 잔잔했다. 이날 해상엔 0.7m의 잔잔한 파도가 일었고 4.9m/s의 북서풍이 불어 을씨년스런 초겨울 밤바다 풍경을 연출했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오늘을 위해 한 달 전 바로 이 요트로 거문도 세일링을 마치고 "올해가 가기 전 더 큰 바다에 도전하리라"는 당찬 포부를 가졌었다. 그렇게 준비한 시간들이 모이고 모여, 마침내 현실로 다가온 것. 이 순간이 제발 꿈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고민도 많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가장으로서 위치 때문일까? 부모님 생각, 마눌 생각, 자식 걱정이 앞섰지만 대장부라면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꼭' 이루는 의연함도 필요하다.

출발 1시간 전, 소호동 해경파출소에 출항신고를 마친 일행은 해경으로부터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해상날씨가 좋지 않아 목적지인 제주항까지는 출항이 어렵다는 소식이다. 우리는 일단 거문도를 경유해 그 이후는 기상 상황을 봐서 판단하겠노라며 신고를 마쳤다.

일행이 탄 배는 순전히 바람의 힘에 의존해야 하는 30피트 크기의 '프론티어'란 이름의 요트. 이번 항해는 여수→거문도→제주도 찍고 다시 거문도→백도→여수로 되돌아 오는 왕복 450km의 바닷길 횡단이다. 직선거리로 재면 여수에서 거문도까지는 약 85km이다. 또 거문도에서 제주도까지는 그보다 적은 75km 정도다.

2박4일 일정으로 여수, 거문도, 백도, 제주도를 왕복하며 450km의 멋진 세일링을 펼친 바닷길을 지도로 표시했다.
 2박4일 일정으로 여수, 거문도, 백도, 제주도를 왕복하며 450km의 멋진 세일링을 펼친 바닷길을 지도로 표시했다.
ⓒ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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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트에 몸을 맞기고 바다 횡단에 나서다

해상왕 장보고를 꿈꾸며 바닷길 횡단길에 나선 5명의 사나이. 오른쪽부터 강황식씨, 이용수씨, 김정선씨, 박종원씨, 김선호씨 모습.
 해상왕 장보고를 꿈꾸며 바닷길 횡단길에 나선 5명의 사나이. 오른쪽부터 강황식씨, 이용수씨, 김정선씨, 박종원씨, 김선호씨 모습.
ⓒ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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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프론티어호의 선장인 강황식(45·YNCC 근무) 스키퍼, 키잡이 이용수(46· YNCC 근무)  헬름스맨, 전방 감시인 박종원(56·폴리미래 근무) 바우맨, 우현 돛 줄 관리자 김정선(27·취업 준비생) 스타보드맨, 좌현 돛 줄 관리자 김선호(27·취업 준비생) 포트택으로 구성되었고 조리장은 공동으로 하기로 했다.

더구나 5명의 일행들은 전문 뱃사람이 아닌 직장동료와 취업준비생으로 요트라는 한조각 일엽편주(一葉片舟) 위에 뜻을 함께한, 그야말로 바다와 요트를 사랑하는 피 끊는 순수 마니아들에 불과했다.

선장의 신호에 따라 좌현과 우현의 돛 줄 관리요원들은 밧줄을 힘차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11m의 마스트 높이까지 돛을 펼치자 바람을 받은 프론티어호는 서서히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부풀어 오른 돛은 바람을 모아서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

여수-제주간 450km를 항해한 프론티어호의 내부 침실 모습
 여수-제주간 450km를 항해한 프론티어호의 내부 침실 모습
ⓒ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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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소호동 요트경기장을 떠난 일행은 어느새 가막만에 위치한 백야도 등대 앞을 유유히 지나고 있었다. 배에 부딪쳐 갈라지는 파도소리만 적막한 바다의 고요를 깨트린다. 요란한 엔진보다는 자연 그대로에 의존해야 하는 이들의 여행은 어쩌면 잠시 속세를 떠나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항해인지도 모른다.

어느덧 어둠은 남해 바다를 완전히 삼키고 말았다. 여자만을 지나자 백야도 등대 불빛이 길 잃은 어선들의 길잡이가 되어줬다. 어둠의 여신이 야금야금 그믐달을 삼켜버려 한치 앞을 볼 수 없다. 이제 방향감각을 잊지 않으려면 나로도 등대의 불빛을 찾아야 한다. 일행들이 믿는 건 네비게이션과 GPS뿐이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자 네비게이션 마저 고장이 나서 먹통이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그나마 30분마다 여수해경에서 레이더로 우리의 위치를 추적해 확인 전화를 걸어왔고, 우리는 해도를 보고 GPS로 위도와 경도를 파악해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나로도를 빠져나왔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어렴풋이 섬과 섬 사이 불빛 때문에 괜찮았다. 하지만 고흥반도를 벗어나자 먼 바다로 진입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불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높아진 파고로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바람과 파도도 제법 거칠어졌다. 프론티어호는 어둠을 헤치고 시속 12km으로 바닷길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얼마를 왔을까? 8시간의 항해 끝에 저 멀리서 불빛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거문도 도착 1시간 전 멀리서 어렴풋이 보이는 불빛은 낭만이요, 희망의 불빛이다. 점점 더 가까워지자 마치 바다 위의 궁전을 연상케 한다. 불빛의 정체는 섬에 정박한 무역선이었다. 정확히 새벽 3시, 프론티어호는 거문도 항이 있는 동도와 서도 사이 고도방파제에 도착했다. 거문도까지는 정확히 9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긴장이 누그러지자 피곤이 몰려왔다. 우리는 거문도 항에서 소주 한 잔에 지친 피로를 달래며 요트 안에서 이렇게 첫날밤을 보냈다.

20일 새벽, 9시간의 항해끝에 거문도 고도방파제에 정박한 프론티어호의 모습
 20일 새벽, 9시간의 항해끝에 거문도 고도방파제에 정박한 프론티어호의 모습
ⓒ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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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거문도 출항 제주항을 향하여!

한참을 잤을까? 강황식 선장(스키퍼)이 잠을 깨운다. 시간은 어느덧 오전 7시다. 거문도 경비함대에 제주출항 신고를 마치고 돛을 올렸다. 해상 날씨는 어제보다는 나은 편이다. 용왕님께서 우리의 항해를 보살펴 주신 듯하다. 거문도에서 제주까지는 직선거리로 75km이다. 울릉도와 독도가 120km인 것에 비하면 그래도 짧은 거리다. 지금까지는 섬과 섬 사이를 굽이굽이 돌아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부터는 직선코스다.

사방에 보이는 건 오직 바다뿐, 가끔은 배고픈 갈매기가 따라온다. 낮 항해는 야간보다 멀미도 덜해 드넓은 바다만 볼 수 있어도 좋다. 중간쯤 통과하자 제주해경에서 연락이 왔다. 거문도 경비함대에서 연락이 취해져 우리의 위치를 추적했나 보다. 해경에 따르면 고성능 레이더로 위치를 추적하면 바다 위의 부표까지 추적이 가능하다고 하니 한 번 찍으면 결코 벗어 날 수 없다. 가고 또 가기를 반복해 장장 10시간의 항해 끝에 제주항에 다다랐다.

제주 앞 바다에 도착하기 1~2시간 전 해상에서 반가운 삼치잡이 어선을 만났다. 거친 파도 속에서 조업을 하는 모습이 달리 보인다. 홀아비가 홀아비 심정을 알고 과부가 과부의 심정을 알 듯 길고 거친 항해 끝에 바다 생활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됐다. 모두 한 마음이었을까, 우린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생선을 사먹으면서 앞으로 비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생각 없이 먹는 이 생선은 목숨을 건 어부들의 고생이 담겨있기 때문이야."

20일, 프론티어호가 제주 김영마리나 리조트에 도착해 정박되어 있는 모습.
 20일, 프론티어호가 제주 김영마리나 리조트에 도착해 정박되어 있는 모습.
ⓒ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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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간의 항해 끝에 오후 6시 제주 김영요트장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풍차모양의 풍력발전기다. 몹시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24시간 동안 달려 밟아 보는 제주도는 너무도 소중한 대한민국의 땅이다. 또 제주시 옆 김영 요트클럽이 있는 마리나 시설은 너무 잘 돼 있었다. 역시 관광 특구 제주답다. 천혜의 해양환경을 가진 여수시도 이번 세계박람회를 기점으로 마리나 시설을 확충해 해양관광산업이 한 단계 도약했으면 좋겠다.

일행이 예약한 숙소에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니 항해를 하며 쌓인 피로가 개운하게 풀리는 기분이다.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했다는 감사함과 또 무사귀항을 바라는 염원을 담아 일행들은 축배를 들었다. 이렇게 제주에서 둘째날을 맞은 일행들은 초저녁부터 다음날까지 깊은 잠에 빠졌다.

거문도 귀향길... "최악의 세일링을 맛보다"

백도 앞에서 트롤낚시로 삼치를 낚아 올리고 있는 대원들의 모습.
 백도 앞에서 트롤낚시로 삼치를 낚아 올리고 있는 대원들의 모습.
ⓒ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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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낚시로 잡은 고기를 썰고 있는 김선호 대원의 모습
 트롤낚시로 잡은 고기를 썰고 있는 김선호 대원의 모습
ⓒ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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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김영 앞바다 기상상태가 좋지 않았다. 일행 중 한 명이 제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여수로 가잔다. 다시 돌아갈 일이 정말 꿈만 같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일정상 어쩔 수 없다. 아침을 먹고 오전 9시 김영요트장을 출발했다. 이번 여행에서 날씨는 일정이 진행되는 내내 우리를 괴롭혔다.

요트는 일반 배와 다르게 바람의 힘을 받아 30~45도로 기울어져, 옆 밀림현상으로 가는 배다. 때문에 기상이 좋지 않으면 멀미가 더욱 심하게 느껴진다. 또 요트는 바람이 거칠게 불어 하늘높이 솟은 마스트(돛대)가 수면까지 닿아도 끄떡없다. 이론상으로는 115도가 기울어져야 배가 뒤집힌다고 하는데 불침선이라 불리는 요트는 수면 아래 2톤의 kell(추)이 달려있어 뒤집혀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난다.

강한 바람으로 비상 상황이 발생했다. 바람이 너무 세 배 기울임이 점점 심해졌다. 선장의 지시에 따라 돛을 1,2,3단 중 가장 낮은 3단 축법으로 바꿔야 했다. 배가 뒤집히지 않기 위해 돛을 내리는데, 선장을 제외하고 모두 밧줄로 몸을 묶고 돛을 내려야 했다. 돛을 내리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또 이번 여행에서 일행 모두는 배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해보는 멀미였다. 오죽했으면 '이 상황에서 멀미를 하지 않은 사람이 비정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세일링중 프론티어호 뒤로 백도의 멋진 비경이 펼쳐져 있다.
 세일링중 프론티어호 뒤로 백도의 멋진 비경이 펼쳐져 있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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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온 사람들은 요트동호인들인데 4년 전  돈을 출자해 이 요트를 구입했다. 우리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세계대회인 통영국제요트대회에 2번이나 출전했고, 여수국제범선축제 역시 2번이나 나갔다. 최근까진 가까운 바다에서 틈틈이 세일링을 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장거리 항해가 이런 멀미를 가져다 줄 줄이야.

거문도에선 은갈치 축제가 한창이었다. 일행은 '거문도에서 은갈치조림에 소주 한 잔 할 수 있겠지?'란 생각에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다. 이후 9시간의 항해끝에 오후 6시쯤 거문도항에 무사히 도착해 모텔에 투숙했다. 여행 중 가장 힘든 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 백도의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5시에 거문도항에서 배를 띄웠다. 이후 2시간의 항해 끝에 백도에 도착했다. 날씨가 제법 잔잔하다. 여행 중 겪은 최고의 날씨다. 백도의 일출과 비경은 그야말로 무아지경에 빠지게 했다.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사진에 담으며 백도를 맘껏 즐겼다. 배 위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자연의 숙연함 마저 느끼게 한다.

이후 백도에서 트롤 낚시로 힘 좋은 삼치와 방어를 몇 마리 낚아 즉석에서 손바닥 크기로 썰었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백미였다. 백도를 뒤로하고 그리운 가족이 있는 여수로 출발했다. 오후 6시, 비로소 소호동 요트경기장에 닻을 내렸다.

"제주도 요트 세일링 통해 인생의 소중함과 자신감을 얻었다"

항해 이틀째 제주도로 향하고 있는 프론티어 뱃머리가 파도에 울렁이고 있다. 파도가 가장 많이 친 3일째는 사진촬영은 엄두도 못 냈다.
 항해 이틀째 제주도로 향하고 있는 프론티어 뱃머리가 파도에 울렁이고 있다. 파도가 가장 많이 친 3일째는 사진촬영은 엄두도 못 냈다.
ⓒ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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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바닷길 체험을 이끌었던 강황식 스키퍼는 "이번 여행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라며 "요트를 타고 제주도를 다녀오겠다는 환상만 가졌다가 자연의 무서움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여행을 통해 축척한 세일링 기술을 얻었고 체력적인 한계, 팀워크의 중요성을 배웠다"며 "살아가는데 있어 인생의 소중함과 많은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또 헬름스맨을  담당한 이용수씨는 "이번 여행에서 야간 세일링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야간 항해 시 배와 부딪힐 뻔한 아찔했던 순간을 경험했는데 대형 선박들이 자동항법 장치만 믿다가 큰 사고로 이어지는 듯하다"며 "내가 좋아서 여행을 갔지만 바람과 파도가 높아 고생했는데 이제 자연에 순응하는 법도 배웠다"고 말했다.

스타보드장을 담당한 취업준비생 김정선씨는 "원래부터 해양 스포츠에 관심이 많아 공부를 해왔다"며 "편안히 제주도에 다녀올 생각으로 떠난 요트여행이었는데 이번에 엄청 고생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요트는 진정한 남자들의 스포츠라고 생각한다"며 "나를 믿고 같이 가준 친구가 정말 고맙고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결실은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이 항해에 참가한 모든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4일간 바다와 원 없이 싸웠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이래서 요트를 타는구나 하는 것을 느낀 시간들이었다. 우리의 다음 목표는 일본이다."


태그:#제주항해, #장보고, #프론티어호, #백도, #세일링, #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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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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