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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건물 벽에 각종 입시, 자격증, 취업 정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학원 건물 벽에 각종 입시, 자격증, 취업 정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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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고등학교가 글로벌 인재를 육성한다고? 또 뭐야 수월성 교육을 강화했다고? 사교육계에서 그 말 믿는 사람 없죠. 이미 날고 긴다고 하는 애들 한 곳에 모아 놓고 그만큼 'SKY' 대학 못 보내면 그게 이상한 거죠."

소주가 두 병 정도 비어갈 무렵에야 김영규(44. 가명) 원장은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이미 시계는 22일 새벽 1시로 넘어가고 있었다. 8년째 입시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외고 폐지론'에 할 말이 많다고 했다. 심야 학원 운영을 단속하는 '학파라치'에 걸리지 않기 위해 학원 문은 밤 10시에 이미 걸어 잠갔다.

안주로 주문한 꼼장어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그는 "너무 지겹게 들어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글로벌 인재' '경쟁력 강화' '수월성 교육'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 말들은 대부분 거짓말"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먹고 살기 위해" 그런 수사를 동원해 학생들을 모집한다. 서울의 모 외고와 지리적으로 멀지 않은 그의 학원은 이른바 '외고 전문학원'이다.

"외고 폐지한다니까 외고 교장들이 '우리가 글로벌 인재 육성에 기여했다'고 하잖아요. 그거 100%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외고 들어간 애들은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준비한 애들이에요. 이미 사교육 시장에서 '빵빵하게' 배울 거 다 배우고 들어간 애들입니다. 외고에서 특별히 가르칠 게 없어요. 그냥 공부 잘 하는 애들 모아 놓은 장소에 불과하지."

외고 당사자들이 들으면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김 원장은 "외고는 사교육 시장에서 선행 학습을 한 아이들이 낮에 들러서 복습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선행학습-복습-다시 선행학습'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바로 외고 준비생과 외고생들의 일상이다. 이중 복습의 한 부분이 이뤄지는 곳이 바로 외고라는 곳이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김 원장의 학원에도 초등학교 3, 4학년들이 외고 준비를 위해서 문을 두드린다. '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 싶고, 부모가 재력이 좀 되면' 바로 외고 등 특목고 준비에 돌입한다고 한다.

김 원장은 "상담을 많이 하는데, 가장 맘이 아플 때는 경제력이 안 되는데도 자식을 외고에 보내려는 학부모들을 만날 때"라고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외고를 준비한다고 치면 10년을 사교육 시장에서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교육 없이 외고 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학원에도 외고 준비생의 90% 이상은 강남-서초-송파에 삽니다. 그들이 우리 학원에서만 하는 공부가 끝인 줄 압니까? 집에서, 오피스텔에서, 또 그룹 과외 받아요. 초등학생 저학년 사교육비만 평균 약 150만 원 든다고 보면 돼요. 근데 이걸 중산층 서민 학부모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중학교 가면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데?"

반에서 15등 정도 하는 친구들도 외고 등 특목고 준비에 뛰어들다

그는 이명박 정부 출범 뒤 "좀 말리고 싶은 학부모들이 늘어났다"고 했다. 이유는 이런 것이다. 과거에는 반에서 1~2등 정도 하는 초등학생들이 외고를 준비했다. 그때는 당연히 경쟁도 그리 치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특목고를 늘린다고 하니까 상황이 달라졌다. 반에서 15등 정도 하는 친구들도 외고 등 특목고 준비에 뛰어 든 것이다.

한 마디로 '특목고 열풍'이 분 것이다. 김 원장은 "외고가 폐지되면 이 경쟁은 한 풀 꺾일 것이고, 괜한 경쟁에 뛰어들어 고생하는 아이들도 줄어 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학고를 보라, 과학고 열풍이 분 적이 있나"라며 "과학고는 그 수가 굉장히 적기 때문에 정말 똑똑하고 천재성이 있는 아이들만 준비한다"는 근거를 댔다.

서울에는 외고가 모두 6개, 과학고는 3개교가 있다. 올해 선발 예정 인원을 보면 대원외고 420명, 대일외고 420명, 명덕외고 420명, 서울외고 350, 이화외고, 210명, 한영외고 360명 총 2170명이다. 그리고 과학고는 한성과학고 140명, 세종 160명, 서울과학영재학교 121명(이미 선발 완료) 총 421명 선발할 예정이다. 물론 외고 과학고 모두 정원 외 모집은 빠진 수치다. 서울에서만 외고생들이 5배가 많다.   

그렇다면 최근 논란대로 외고가 폐지되면 사교육비가 줄어들까? 김 원장은 "총액으로는 줄어들겠지만, 그렇게 크게 줄 것 같지는 않다"고 밝혔다. 그는 "외고가 폐지된 뒤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금 몇 가지 주장대로 외고가 자립형사립고나 국제고로 바뀌게 되면 약간의 조정기를 거쳐 다시 사교육비가 늘어날 것이란 게 그의 주장이다. 사교육계가 자사고나 국제고 입시로 변신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 원장은 스스로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새벽 2시 무렵에야 외고 입시 준비 '가정 학습 교사' 최민국(36. 가명)씨가 합류했다. 그는 대치동은 물론이고 중계동 그리고 목동 등을 돌아다니며 외고 준비생을 가르친다. 그의 '학생 관리 리스트'에는 약 50여 명의 학생이 등록돼 있다. 개별 학습 말고 강의도 한다. 연봉은 "아직 크게 유명하지는 않아서 1억원에서 조금 빠진다"고 밝혔다.

최씨는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로 학원 강사를 하다가 그냥 눌러 앉았다. 그를 잡아당긴 건 고수익이었다. 그는 "연봉 2000으로 시작했는데 여기까지 오는데 약 7~8년이 걸렸다"고 밝혔다.

최씨는 "외고를 준비하는 어린 학생들의 집안은 실제로 상류층인데, 대한민국 상위 1~5%이내의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고 밝혔다. 그는 "상위 1% 이내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가정 교사로 들어가 안착하는 강사들이 진짜 고소득자들"이라고 말했다.

그 역시 "재력이 안 되는데도 강의를 의뢰하는 학부모들을 만날 때가 가장 안타깝다"며 "아들 딸 외고 보내려고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엄마들도 많다"고 했다.

"이젠 교육을 통해 계급과 부가 대물림 된다는 걸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지 않나. 현장에서 보면 더 심하다. 솔직히, 미안하지만 중산층 서민 학부모들에게 '허황된 꿈 좀 꾸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국가가 나서서 조정하지 않으면 교육을 통한 계급 고착화는 바꿀 수 없는 대세다."

"외고는 있는 사람들만의 리그"

김 원장과 최씨 모두 "외고는 있는 사람들만의 리그"라고 강조했다. 섣불리 중산층이 뛰어들면 아이와 학부모 모두 상처 받기 쉽다고 했다. 이들은 "외고 폐지는 곧 있는 사람들만의 리그를 없앤다는 것인데, 과연 잘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술자리가 마무될 즈음 두 사람의 장난 섞인 건배사는 "외고 폐지!"였다. "어차피 외국어 교육도 제대로 안하고, 수월성 교육은 사교육이 다 담당하는데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그리고 "있는 집 아이들만 모아 놓고, 없는 집 아이들은 접근 못하게 하는 학교가 과연 국가의 관리 대상인지 의문"이라며 "고교 등급제를 통해 다시 '있는 집' 아이들만 대학 입시에서 특별대우를 받는 건 공정 경쟁을 어기는 것이고 '없는 집'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교육계 사람들의 건배사 "외고 폐지"는 새벽 4시께야 끝이 났다. 헤어지는 택시 안에서 김 원장은 "특목고 늘린다며 집권한 사람들이 외고를 없애고, 또 사교육비 줄인다는데 도무지 진심이 뭔지 알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태그:#외고 폐지, #외고 폐지 논란, #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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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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