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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MB) 정부의 차기 총리 후보가 심대평 전 선진당 대표를 돌고 돌아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으로 낙점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충남 공주 출신이다. 결국 예상했던 바대로 충청권 총리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일단 뜻밖이다. MB가 한때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였던 비판적 지식인을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자리에 기용한 것도 뜻밖이고, 한때 한나라당 입당 가능성을 묻자 '나에 대한 모욕'이라는 반응을 보였던 정운찬씨가 MB와 손을 잡은 것도 예상 밖이다.

"내 나이가 이미 예순 셋이다"라던 정운찬

신임 국무총리에 내정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3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내정 소감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마친뒤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신임 국무총리에 내정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3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내정 소감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마친뒤 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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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얼마 전까지도 MB정부와는 선을 그었다. 지난 7월말 '충청권 50대 젊은 총리'가 후보군으로 거론될 때, 전화를 걸어 본인에게 직접 물었다.

- 여권에서 충청권 총리에 이어 젊은 총리 후보 얘기가 나온다.
"내 나이가 이미 예순셋이다. 젊지 않다."

- 한나라당 정치인들이 총리 후보로 거론한다. 혹시 전화 같은 것 없나.
"전혀 금시초문이다. (한나라당에) 아는 사람도 없다."

- 요새 어떻게 지내나.
"매일 학교에 가서 즐겁게 논다."

소득은 없었다.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지만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공부가 즐거운 '경기고 3대 수재'여서 그런지 '학교(서울대)에 가서 즐겁게 논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에 그의 서울대 경제학과 제자이자 개혁적 성향도 비슷한 한 한나라당 의원은 다른 말을 했다.

- 정운찬 전 총장을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시장으로는 생각이 없다. 오히려 총리에 관심이 있다. 정 총장이 하려는 의지가 있다. (2007년) 대통령 경선이 끝나고 MB가 공을 많이 들였는데, 그때는 정 총장이 한사코 안한다고 했다. 이번에는 좀 다른 것 같다."

- 청와대는 한승수 총리처럼 '얼굴마담'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정 총장도 '곰바우'가 아니잖냐. 하물며 중소기업도 인재 영입할 때 스톡옵션을 한다든지, '이런저런 자리는 내가 인사권을 행사하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나. 그런 식으로 정 총장의 재량을 발휘할 여건이 보장되면 안할 이유가 없지. 모든 것은 청와대에 달렸다."

MB의 자신감 반영한 공세적 개각 인사

그때만 해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본인이 아니라는데 왜 이런 말을 하지? 이런 의심은 했지만 여당 국회의원은 청와대에 총리나 장관 후보를 추천할 수 있으니 그런 것으로만 여겼다. 오히려 관심을 끈 것은 '2007년 대통령후보 경선이 끝나고 MB가 공을 많이 들였다'는 언급이었다. 사실이라면 MB가 선대본부장을 제안했다는 것이 낭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청와대측이 총리후보 인선 배경설명에서 밝힌 대로 그가 낙점된 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장 '심대평 총리 카드'를 이회창 선진당 총재가 받았다면 정운찬 카드는 없던 일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인사의 묘미인지도 모르겠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세 번째인 이번 개각의 특징은 총리의 교체와 정치인 입각으로 요약된다. 또한 이번 개각은 집권 중반기의 국정 운영 지지를 동력으로 한 일하는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개각의 성격을 띤다.

사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 지지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國葬) 수용에 따른 호남의 지지가 늘고, 중도실용주의 노선에 따른 수도권의 지지가 상승한 덕분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개각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수세적 국면 전환용이 아니라 MB 정부의 자신감을 반영한 공세적 성격을 띤다.

특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총리 후보에 MB노믹스를 비판해온 케인지언(케인즈주의자)이자 중도적 합리주의자라는 평을 듣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내정한 것은 어느 정도 모험을 감수한 '다목적 카드'로 읽힌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데는 청와대도 원인 제공을 했다. 개각 직전에 총리인선과 차기대선주자를 연결시키는 언급이 흘러나온 것이다.

정운찬 기용은 모험을 감수한 '다목적 카드'

우선, 화합과 탕평 코드다. 충청 출신의 총리후보자를 기용한 데는 세종시 축소에 따른 충청 민심의 이반을 막으려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실제로 정 후보자는 3일 개각 발표와 동시에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행정복합도시는 부분적으로는 하되 대신 충청도 분들이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여러 가지 계획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수정 의사를 내비쳤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세종시 방탄 총리'라는 야당의 비판이 거세다.

이런 비판은 합당한 측면이 있다. MB정부는 이미 그의 발탁 배경의 하나로 충청권 인사임을 강조했다. 그런 이상 행정복합도시에 대해 충청인 총리에 거는 충청권의 기대치는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학자인 그가 충청인들이 '섭섭하지 않을 행복지수'를 계량화해 충청 민심을 다독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신임 국무총리에 내정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3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신임 국무총리에 내정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3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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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견제용' 및 '민주당 무력화' 카드?

두 번째는 '박근혜 견제용 카드'라는 시각이다. 여권의 역학구도가 현재대로 유지될 경우 권력의 속성상 임기말로 갈수록 박근혜 쏠림 현상과 레임덕(권력누수 현상)은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임기중반에 접어들었지만 당내에 '박근혜 대항마'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MB에게는 잠재적 대권주자를 영입해 '차기 관리'에 들어갈 필요성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비슷한 선례가 있다. 문민정부 시절에 김영삼 대통령은 이홍구·이수성 서울대 교수를 총리로 기용해 대권 경쟁구도를 만든 바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미 정운찬 총리 영입에 이재오 전 의원이 적극적으로 다리 역할을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 때문에 친박 진영에서는 "박근혜를 대통령특사로 외국에 내보내 놓고 뒤통수를 친 것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이른바 '차기 관리'가 대통령의 의도대로 순조롭게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앞서의 김영삼 정부에서도 겪었던 바이다. 또한 이런 비판은 정파적 시각일 뿐이다. 설령 그런 정치적 포석이 있더라도, 국민의 입장에서는 그가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대로 "대통령을 잘 보필해서 우리나라를 좀더 강한 경제의 나라, 통합된 사회 만드는 것이 목표"이고 이 목표를 달성한다면, 총리직을 발판으로 대권에 도전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좋은 일이다.

세 번째는 변화와 개혁 이미지 선점을 통한 '민주당 무력화 카드'이다. 정 후보가 지난 대선 때부터 민주당이 공을 들인 개혁 성향의 대권후보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당시 여권 예비후보들의 지지도가 이명박-박근혜의 위세에 눌려 바닥을 길 때 정동영-김한길 그룹에서 적극적으로 접촉한 영입 대상 1순위 후보였다. 그러나 그는 영입 제안을 뿌리치고 그해 4월 30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대선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출마 포기를 공식 선언했다.

민주당은 최근까지도 그를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의 한 사람으로 영입을 추진해왔다. 그 또한 2007년 대선출마를 고민하던 상황에서 한나라당 입당 가능성을 묻자 '나에 대한 모욕'이라는 반응을 보일 만큼 상대적으로 친민주당이었다. 이처럼 민주당이 우호적이고 민주당이 영입을 위해 품을 들인 서울시장 혹은 대권후보를 MB가 선점해 버렸으니 '배신자'니 '변절자'니 하는 비판이 나옴직하다.

정운찬-한명숙 '양다리' 걸친 민주당, 닭 쫓던 개 신세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정 후보가 민주당에 '곁'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약혼'을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민주당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가까운 것이었다. 또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이 정운찬에 '일편단심'이었던 것도 아니다.

민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한명숙 전 총리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정운찬과 한명숙 사이에서 속된 말로 '양다리'를 걸쳤다. 지난 8월 그의 정치자문역이자 절친한 김종인 전 의원도 사석에서 "민주당이 처음엔 공을 들이는 것 같았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한명숙 전 총리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눈치를 보는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 무렵 민주당의 한 당직자도 "영입 우선순위가 정운찬>한명숙에서 바뀌는 기류가 있다"고 당내 분위기를 전했다. 그런 민주당이 배신자 운운하는 것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술을 부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야당은 그동안 1기 내각의 특징을 강부자(강남 땅부자)니, 고소영 S라인(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인맥)이니 하면서 '코드인사'를 비판해 왔다. 그런 점에서 아무런 코드의 연고가 없는 비판적 지식인을 총리에 발탁한 인사 그 자체는 박수를 받을 일이지 민주당이 앞장서 입에 거품을 물 일은 아니다.

또 이번에 입각한 최경환(지식경제부)·임태희(노동부)·주호영(특임) 의원은 모두 합리적인 온건파 보수주의자라는 평을 듣는 정치인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내각에서 제 목소리를 내면 정 총리 후보자와 더불어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인사는 잘된 인사다.

MB정부와 케인지언 총리와의 '궁합' 맞을까?

길게 보면 민주당을 위해서도 잘된 인사다. 김종인 전 의원과 절친한 최재천 전 의원은 정운찬 교수가 MB와 손잡을 것에 대해 "우리 사회 중도적 지식인의 커밍아웃이라고 본다"면서 "대권구도의 불가예측성이 사라지고 간명해져서 차라리 잘 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결국 민주당은 (인물에 의존하지 않고)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정책으로 일어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포진한 MB정부와 케인지언 총리와의 '궁합'이다. 정운찬 후보자는 이와 관련 "이 대통령도 나도 경쟁을 촉진하되 뒤처진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경제 문제에서 시각 차이가 크게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동안의 그의 언행에 비추어 이런 발언은 립 서비스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이 "이 대통령과 정 후보자는 둘 중 하나가 소신을 접어야만 가능한 조합"이라며 "과연 이 조합이 순항할지 의문이다. 누가 소신을 굽힐지 지켜보겠다"고 한 논평이 MB의 모험적인 승부수인 이번 개각의 운명을 점치는 촌철살인에 가깝다.

이번 개각이 MB정부가 집권2기를 맞이해 내건 진정한 중도실용주의 노선의 일환인지 아니면 중도층 표를 포섭하기 위해 이미지만 차용한 것인지는 이내 드러나게 돼 있다. 당장 정 후보자가 용산 참사의 현장에 가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총리직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MB 정부의 순항에 좋은 징조가 될 것이다. 또 그에게 실권을 가진 책임총리 역할이 주어진다면 그것 또한 한나라당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좋은 신호가 될 것이다.

결국 그의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있다. 그가 곰바우의 길을 간다면 민주당을 위해 좋은 일이고, 곰바우의 길을 거부하고 책임총리의 역할을 다한다면 국가를 위해 좋은 일이다.


태그:#정운찬, #이명박, #곰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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