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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7일 아침부터 부산과 울산의 예선노동자 200여명이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노사교섭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지방노동위원회에 조정을 했고, 그것도 노사합의로 10일간 기간을 연장하는 등 어쨌든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든 것이 적법한 과정이었고 누구도 파업으로까지 발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선노동자 파업돌입의 일등공신 노동부

 

그런데 조정종료일인 8월 6일 사태는 급변했습니다. 마지막 조정회의 시간인 오후 3시경 노동부가 사용자단체인 예선협동조합이 질의한 내용에 대한 회신을 해왔는데, 그 내용인 즉 예인선 선장은 사용자에 해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황당무계합니다. 물론 원양을 항해하는 대형선박의 경우 선장의 권한이 대단히 크고 사용자에 준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승선인원 3~5명이 고작인 작은 배의 선장을, 그것도 항해사나 기관장이 수시로 업무를 대체하고 심지어는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전에는 노사협의회의 노측대표로 되어 있던 선장들을 하루아침에 사용자로 규정하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대법원 판례로도 정립되어 있고 수많은 사례로 노동자로 인정받는 예선선장을, 그러한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노동부가 질의회신이라는 방법으로 하루아침에 뒤집어 버린 것입니다.

 

노사관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워서 말도 꺼내지 못할 이야기를 노동부는 '유권해석'으로 정리해 버렸고 그 타이밍도 절묘하게 혹시나 노사합의가 이루어질까 염려한 듯 정확하게 조정만료일에 맞추어준 것입니다.

 

당연히 선장들을 비롯한 조합원들은 격분했고 노동부가 이렇게 대놓고 사용자편을 드는 이상 대화를 통한 해결은 어렵다고 보고 바로 다음날부터 파업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번 예선노동자들 파업돌입의 일등공신은 노동부입니다.

 

 

단순 노사관계를 국가위기로 격상시킨 국토해양부

 

파업에 돌입하자 이제는 국토부가 전면에 나섭니다. 즉각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소집하고는 '기습파업'으로 규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만은 정상운영된다고 발표합니다.

 

사실 일반 국민 처지에서는 뜨악할 것입니다. 200명도 안되는 선원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데 갑자기 무슨 항만운영차질이니 국가위기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인지 말입니다. 물론 예선업무의 특성상 이분들의 파업이 작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극히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절차에 따른 쟁의행위를 마치 국가변란이라도 일어난 듯이 난리를 치는 것이 정부의 할 일인지 묻고 싶습니다.

 

파업 첫날 부산시장, 항만청장, 항만공사사장이 합동담화를 합니다. 내용인즉 성실한 노사교섭으로 사태가 수습되기를 바란다, 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노조에서는 바로 회사측에 대화재개를 요구하고 부산항만청에는 장소제공을 요청했습니다.

 

답변이 재미있습니다. 항만청은 '을지포커스와 신종플루 대책으로 회의공간이 부족하니 노동청과 논의하라'는 것이었고 노동청은 아무런 연락이 없다가 토요일 오후 늦게 '장소를 제공하되 선장은 사용자라는 것이 노동부의 입장이니 유념하시라'는 친절한 공문을 보냅니다.

 

참으로 친절하고 환상적이라 할 역할 분담을 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촉구하면서 장소제공을 서로 떠넘기고 예민한 쟁점을 굳이 공문에 집어넣어 대화 자체를 원천봉쇄한 것입니다.

 

이러니 사측이 대화에 나설 리가 있습니까. 울산의 3개회사는 교섭을 하기로 한 8월 10일 직장폐쇄를 단행하고 같은 날 부산의 6개회사는 교섭석상에 나와서는 '민주노총들이 선원을 붙잡아다 강제교육을 시킨다'는 막말을 서슴지 않으며  교섭을 결렬시킵니다.

 

파업확산을 부추키는 정부

 

파업 5일차인 8월 11일 국토부의 과잉친절은 극에 달합니다. 국토부는 11일 '4개부두가 파업에 돌입해도 운영에 지장없다'는 보도자료를 냅니다.

 

기가 막힙니다. 국토부가 말하는 4개부두는 운수노조 산하 예선지부를 말합니다. 여수, 마산, 울산, 부산이 운수노조 소속인데, 울산과 부산은 이미 파업에 돌입했다 치더라도 마산은 아직 노동위원회의 조정을 진행하고 있고 여수의 경우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의 보상문제로 갈등을 빚는 것이지 일반적인 쟁의행위하고는 엄연히 다릅니다.

 

그런데도 국토부는 마치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동시파업이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너무도 친절하게 전국예선노동자 현황표라는 별첨자료를 첨부했습니다. 거기에는 한국노총 해상노련 소속인 인천과 평택의 기업별노조와 민주노총 운수노조 소속 4개 지회를 표시하고 비고란에 '교섭방식' 을 덧붙여서 한국노총은 기업별 교섭, 민주노총은 상급단체가 교섭한다고 써 놓았습니다.

 

이것은 이번 파업의 쟁점 중 하나인 '기업별 교섭이냐 공동교섭이냐'에 대하여 대놓고 회사측 주장인 '기업별 교섭'을 편드는 사실왜곡이고 지극히 편향적인 자료입니다. 운수노조는 산별노조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선회사와 교섭하고 있고 기업별교섭도 가능하다는 것을 누누이 밝혔음에도 회사측이 '민주노총은 빠져라'고 하는 데서 문제가 불거진 것인데 국토부는 나설 이유가 없는 교섭방식까지 현황자료에 포함시켜 사측 주장을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보를 양보하여 기업별노조인 한국노총 소속 예선노조들은 그저 회사측 요구에 순순히 당하고만 있었을까요? 인천예선노조는 1년 넘게 파업과 해고를 감수하며 싸웠습니다. 회사와 정부는 교묘하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대립시키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노동조합 자체가 싫은 겁니다.

 

사태를 촉발한 것은 무리한 법개악 시도

 

정치권도 책임을 면키 어렵습니다. 어떤 신문은 운수노조가 '바다의 화물연대'를 만들기 위해 예선노조를 장악했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선노동자들이 대거 운수노조에 가입한 것은 5월과 6월인데 이때는 화물연대 박종태 지회장의 죽음으로 운수노조 전 조직이 매달려 있었고 지금도 지도부 대부분이 구속되거나 수배된 상황입니다.

 

현행법에 따르면 내항에서만 근무하는 예선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근기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예선사용자들은 근기법을 제대로 적용해오지 않았고 정부와 정치권에 선원법 적용을 위한 로비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법제처에서 근기법 적용이 당연하다는 해석을 하자 예선노동자들이 선원법 적용을 원한다는 엉터리 설문조사결과를 만들어서 국토해양부와 국회의원들에게 돌리는 해프닝을 벌이는 등 예선노동자들을 무시하자 권리의 사각지대에 있던 예선노동자들이 대거 운수노조에 가입한 것입니다.

 

스스로 찾아온 노동자들을 내치는 노동조합은 없을 것입니다. 예선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운수노조 역시 다른 어떠한 정치적 의도도 없습니다. 일반적인 노사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목적의 전부입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정부당국이 혼연일체가 되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 한나라당 부산시지부도 12일 성명을 발표했는데 내용을 보면 결국 '(선장은 조합원이 아니라는) 정부의 해석'에 따라 노조는 굴복하라는 것이어서 여당 역시 노조 짓밟기에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당의 한 의원은 예선파업을 기다렸다는 듯이 '필수공익사업장 지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억울한 예선노동자들을 짖밟는 한 투쟁은 계속된다

 

뱃사람들의 의리랄까요. 파업대오는 매우 완강합니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라고도 하지만 무권리 상태에 방치되어 있던 선원들이 함께 뭉치자 그들의 힘과 지혜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울산항의 경우 다른 부두에서 대체근로를 위해 예선들이 동원되어 있지만 그들도 똑같은 노동자입니다. 서로의 처지를 뻔히 알고 있기에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마음속 깊이 지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작업형태와 지형이 다른 낯선 부두에서 며칠씩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일하는 대체노동자들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고 정신적 육체적 피로도 매우 높습니다. 이미 부산에서는 선원이 큰 부상을 당하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예선작업도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장기화되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모를 일이니다. 우리는 문제가 더 커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정부기관들이 나서서 일을 눈덩이처럼 키워놓고 그것을 자신들의 위기관리 능력과시와 이념적 색칠하기로 몰아가는 구태가 지금 항만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노사관계를 엄청난 국가적 문제로 만들어서 소박한 예선노동자들을 탄압하는 행태는 즉각 중단되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 정책기획실장


태그:#운수노조, #예선파업, #예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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