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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일제고사는 실시되었고, 교육은 정치적 갈등의 장이 돼 버렸습니다.

 

교사는 정당 가입은 물론 아이들 앞에서 지지하는 정당을 밝혀서도 안 될 만큼 정치적 중립을 요구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쩔 수 없는 '프레임'이라며 교사도, 교원단체도 교육철학보다는 교육 현실에 대한 정치력이 필요하다는 충고를 이곳저곳에서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정치에 휩쓸리지 않고 교육의 본질에만 충실하려는 교사를 이제는 학교 안팎에서 무능하다며 손가락질해대고 있습니다.

 

교사도 공무원이니 상급 기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합니다. 상식적인 문제 제기조차 교육자의 본분을 저버리는 일이라며 으름장을 놓습니다. 얼마 전부터 교육청으로부터 이번에 치러진 전국적인 진단평가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홍보하는 가정통신문을 발송하고, 학교 홈페이지마다 홍보 배너를 달아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사전에 조치하라는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각 교육청마다 비상 상황실이 설치되었을 정도니 무슨 전쟁이라도 난 듯한 분위기입니다.

 

각 시·도 교육감이 총대를 멘 채 보낸 가정통신문을 들여다보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교육 현장의 갈등과 혼란을 두고 '이념만을 내세운 일부 교사와 단체'에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교육개혁이 필요한데 그들이 방해하고 있다는 투입니다. 일제고사와 교육개혁을 등치시키는 것도 우습지만, 일제고사가 경제위기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끌어들이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경제위기'를 그들의 어떤 주장과 정책이라도 관철시킬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모양입니다.

 

전교조고 뭐고 간에 저를 비롯한 대부분 교사들은 '정치'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교육'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아니다'라고 당당히 외칠 뿐입니다. 감히 단언하건대 정부의 정책에 맞서 실명으로 불복종 선언을 한 교사들 외에도 수많은 교사들이 일제고사가 결코 교육적이지 않을뿐더러 외려 쓸데없이 학교 현장의 갈등만 부추긴다고 여기는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각 시·도 교육감의 말대로 누가 학력이 높고 누가 뒤처지는지, 어느 교과가 우수하고 또 어느 교과에 부족한지는 일제고사를 보지 않아도 이미 교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교사들이 비록 못 미덥더라도, 진단평가든 성취도평가든 교실에서 아이들과 매일 직접 부대끼는 교사에게 맡기고 지원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마땅합니다. 정부가 나서서 교사 본연의 업무를 대신하려는 듯한 오지랖은 과욕입니다.

 

이는 또한 매 시간, 매 단원 진단평가를 하고, 끝날 때마다 형성평가를 하면서 아이들의 학업성취도를 수시로 점검하는 교사들의 수업권을 대놓고 부정하는 처사입니다. 굳이 학교마다, 지역마다의 학력차를 굳이 알고자 한다면 지금껏 해온 대로 표집반을 추출해 시험을 치르게 하고 그 결과와 추이를 분석하면 될 일입니다.

 

'목숨을 내걸고' 불복종을 선언한 교사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아도, 일제고사가 교육적이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고 말하는 순간, 교육감은 물론 일선 학교의 관리자들로부터 이른바 '정치 교사'라는 낙인을 떠안게 됩니다. '위에서 시키면 그냥 할 것이지, 뭐 그리 말이 많냐'는 꾸지람과 함께. 이삼 십여 년 전 '말 많으면 빨갱이'라던 시대로의 퇴행입니다.

 

아이들의 학력 수준과 그 차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공교육이 황폐화된 게 아닌데도, 마치 일제고사가 공교육 정상화의 필요충분조건이라도 되는 양 가엾은 아이들과 불안한 학부모들을 꼬드기고 있습니다. 윗분들의 결정이니 군말 없이 따르려는 분위기 속에서, '영혼 없는' 교사가 되길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선무방송 하듯 '처음 교단에 섰을 때의 순수한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라'는 교육감의 말은 우리 교육이 얼마나 정치에 휘둘리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담임교사도 아니고 앞에 나설 용기도 없어,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일제고사의 부당성을 알리고 체험학습을 권유하는 안내문을 보내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을 순식간에 정치적 갈등의 장으로 만들어버린 일제고사를 토론 주제로 삼아 수업을 진행해보았습니다.

 

학업성취도평가든 진단평가든 전국 단위의 일제고사를 두고 과연 아이들은 효과가 있다고 여기는지, 또 일제고사에 대한 학교 안팎의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철부지 중학생다운 답변들이었지만, 그 안에서 아이들의 눈에 비친 우리 교육과 우리 사회의 진솔하고도 슬픈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성적에 반영되지만 않는다면 저는 시험 보는 게 좋아요. 학교가 빨리 끝나잖아요." 이 아이는 다섯 시간 내내 대충 찍고 엎드려 잤다면서도 성적에 대한 불안감은 슬쩍 내비쳤습니다. 스스로 공부를 곧잘 한다고 당당히 말하는 다른 아이는 문제가 우스울 정도로 쉬웠다면서 학사일정에 맞춰 나름대로 학습 관리를 해나가는데 이런 시험은 외려 방해가 된다고 했습니다.

 

또 한 아이는 전국의 모든 초, 중학생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려면 엄청난 돈이 들어갈 텐데, 그 돈으로 이런 쓸모없는 짓을 할 게 아니라, 우리 동네 공부방을 도와주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며 제법 어른스러운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수업 내용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나라와 학교가 하는 일인데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느냐며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화사한 봄꽃 향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전시 상황 같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일제고사가 끝났습니다. 아이들은 교문을 나서며 친구들과 시험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다시 학원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아이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일제고사에 대한 교육 현장의 갈등은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잖은 교사가 교문 밖으로 내쫓길 테고, '법과 원칙에 따라 교육계를 지켜나가겠다'는 정부와 교육감, 그리고 일선 학교의 관리자들에 맞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이어갈 것입니다. 꽃 피는 봄이 왔건만, 우리의 교육 현장은 이삼 십여 년전 그 '굴종의 겨울'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2009년, 잔인한 달 4월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일제고사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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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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