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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을 보면서 이야기합니다. "요새 애들(또는 젊은 사람들), 참 책 안 읽어요." 이 말씀을 하시는 어른들한테 늘 궁금하기도 하고 여쭙고 싶기도 합니다.
 
"네, 맞습니다. 요즘 아이들이나 젊은이들 책 참 징허게 안 읽습디다. 근디, 어르신 당신은 책을 얼마나 읽으시오?"

 

대학생이 되지 않으면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 곧바로 군대로 끌려가야 합니다. 대학생이 되면 휴학 제도까지 써서 대단히 오랫동안 군대로 안 잡혀갈 수 있습니다. 덜 배울 수밖에 없는 일도 서러운데, 덜 배울밖에 없는 사람들은 가장 풋풋하면서 힘이 넘쳐서 세상을 껴안고 배워야 할 그 나이에 '살인무기'를 손에 쥐고, 자기 스스로 '살인도구'로 길들여져야 합니다.

 

이 서러운 젊은이들은 좋은 책을 읽거나 훌륭한 영화를 보면서 마음밭을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쓰린 속을 쓰린 술로 달랩니다. 노래방에서 빽빽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비틀비틀 풀린 다리로 쓰레기통을 걷어차거나 침을 퉤퉤 뱉습니다.

 

추천도서까지 골라주신 섬세함

 

그런데 마침, 이렇게 술담배에 절고 가벼운 사랑놀이에 허덕이는 젊은이들이 보기에 딱하게 느껴졌는지, 젊은이를 군대로 잡아가려는 국방부 어르신께서는 '너희들 군대에 오기 앞서 이런 책이라도 좀 읽어!'하면서 스물세 가지 책을 숙제처럼 내어주기로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국방부가 뽑은 '나쁜 책(불온서적)' 스물세 가지

 

1. 북한의 미사일 전략 : 전영호 씀 / 615, 2006 (품절)

2. 북한의 우리식 문화 : 주강현 씀 / 당대, 2000

3. 지상에 숟가락 하나 : 현기영 씀 / 실천문학사, 1999

4.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허영철 씀 / 보리, 2006

5.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 박준성,안건모,이임하,정태인,하종강,홍세화 씀 / 철수와영희, 2007

6.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 전영호 씀 / 615, 2006 (품절)

7. 통일, 우리 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 : 전상봉 씀 / 시대의창, 2007

8. 벗 : 백남룡 씀 / 살림터, 1992

9.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 노암 촘스키 씀 / 한울, 1999(2007년판 판매되고 있음)

10. 대학시절 : (누가 쓴 <대학시절>인지 알 수 없음)

11. 핵과 한반도 : 최안욱 씀 / 615, 2006

12. 미군 범죄와 한미SOFA :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엮음 / 두리미디어, 2002 (절판)

13. 소금꽃나무 : 김진숙 씀 / 후마니타스, 2007

14. 꽃 속에 피가 흐른다 : 김남주 씀 / 창비, 2004

15.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 노암 촘스키 씀 / 이후, 2000 (절판)

16. 우리 역사 이야기 : 조성오 씀 / 돌베개, 1993

17.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 씀 / 부키, 2007

18. 김남주 평전 : 강대석 씀 / 한얼미디어, 2003

19. 21세기 철학 이야기 : 21세기코리아연구소 엮음 / 코리아미디어, 2004 (품절)

20. 대한민국史 : 한홍구 씀 / 한겨레출판, 2003

21. 우리들의 하느님 : 권정생 씀 / 녹색평론사, 1996

22. 세계화의 덫 : 하랄드 슈만, 한스 피터 마르틴 씀 / 영림카디널, 1997

23.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 프레시안 엮음 / 프레시안북, 2008

 

 

국방부에서 뿌린 보도자료에는 '지상의 숟가락 하나'로 적혔으나 <지상에 숟가락 하나>가 맞습니다. <대학시절>이라는 책이 목록에 있는데, '대학시절'은 누가 쓴 책인지 알쏭달쏭입니다. 이 이름으로 나온 책이 워낙 여럿이라서. 다만, 러시아 소설쟁이 고리끼 님이 쓴 작품이 아닐까 싶기는 한데.

 

책이름을 하나하나 살피며 알아보니, 세 가지 책은 '품절'이고(<북한의 미사일 전략>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21세기 철학 이야기>), 세 가지 책은 '절판'입니다(<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미군범죄와 한미sofa>).

 

이렇게 하여 국방부에서 추천해 준 스물세 권 가운데 자그마치 여섯 권은 쉽사리 구경하기 어렵게 됩니다. 꼭 열일곱 권이 남습니다. 문득, 이 스물세 권 목록에 든 책을 쓴 분이 쓴 다른 책도 추천목록에 들어가는지, 아니면 아닌지 궁금합니다.

 

주강현, 현기영, 권정생, 노암 촘스키, 한홍구, 김남주 같은 분들은 책을 퍽 많이 펴낸 분들입니다. 당대, 보리, 시대의창, 한울, 후마니타스, 창비, 이후, 돌베개, 한겨레출판, 녹색평론사 같은 곳은 책을 퍽 많이 펴낸 곳들인데, 이 곳에서 펴낸 다른 책들도 읽을 만하 다고 보아주면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우리들의 하느님> 다시 읽었습니다

 

이 가운데 틈틈이 다시 들추어보곤 하는 권정생 할아버지 책 <우리들의 하느님>을 책꽂이에서 꺼내어 펼쳐 봅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답게 길러지려면 때묻지 않은 자연환경 속에서 이웃과 함께 어우러져 자라야 한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오염된 도시환경에서 오직 기술인간만으로 교육되어 감정이 메마를 대로 메말랐다. 교통사고 세계 1위라는 대한민국은 이런 삭막한 교육가치관이 낳은 결과이다. 무서운 범죄가 일어나는 장소는 거의가 도시의 뒷골목이다. 사실은 뒷골목을 통해서 노출된 것이지, 보이지 않는 범죄는 도시의 한가운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수많은 수사기관이 있고 방범시설이 완벽해도 근본적인 것이 잘못되었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음악학원에만 일찍부터 보내면 곧장 훌륭한 음악가가 되는 건 절대 아니다. 고향과 어머니와 자연이 없는 음악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자연과 어머니의 품은 무한한 사랑을 심고 길러 준다. 사랑이 없는 예술은 감동을 일으키지 못한다. 베토벤의 음악도 차이콥스키의 음악도 밀레나 고호의 그림도 모두가 자연의 사랑이 낳은 예술이다. 예술은 자로 재고 저울로 달아서 만들어지는 제품이 아니다. 기계로 찍어내는 물건은 똑같은 것을 수없이 만들 수 있지만, 장인이 직접 손으로 만든 건 하나밖에 못 만든다… (88쪽)"

 

그동안 세 번쯤 읽은 <우리들의 하느님>이지만, 이참에 다시 한 번 더듬어 보게 됩니다. 책은 1996년에 처음 나왔지만 그에 앞서 쓴 글을 죽 모았기 때문에 1980년대 끝무렵부터 권정생 할아버지가 우리 세상을 바라보면서 느낀 이야기라고 할 만합니다. 곧바로 다음 대목이 눈에 들어옵니다.

 

"…온 세상이 더럽혀지는 이유는 돈만 주면 쉽게 얻어지는 물건이니 그만큼 귀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버리고 새것을 또 사게 된다. 새것만 좋아하는 사람치고 속이 찬 사람을 못 봤다. 황금의 노예가 되고 기계의 노예가 되고 항상 열등의식에 주눅이 들어 있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89쪽)"

 

좋군요. 오늘 다시 읽어 보아도 좋군요. 다음에 또다시 책꽂이에서 꺼내어 읽어도 마음을 덥히고 쓰다듬어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방부 어르신들이 애써 추천목록을 만들어 주었기에, 이 책을 이렇게 또 한 번 펼쳐서 좋은 말씀을 새길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주한미군부대 도서관'과 정훈도서

 

책꽂이를 뒤져서 몇 가지 책을 더 꺼내어 봅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자주 다니는 저는, 어느 헌책방에 가든 '주한미군 부대 도서관'에서 흘러나온 책을 자주 봅니다.

 

한국땅에 수많은 군인을 내보내고 있는 미국 정부는, 자기네 군대가 머문 자리마다 '도서관'을 퍽 넓게 짓고 무척 많은 책을 갖추어 놓습니다. 그리고, 애써 갖춘 책을 틈틈이 내다 버립니다. 새로 나오는 책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군부대에서 버린 책은 쓰레기통으로 가지 않습니다. 미군부대는 '책을 폐휴지로 버리는 일'이 없이, 알뜰하게 그러모아서 한국땅 헌책방에 '미군부대 도서관에 있던 책이 꽂히도록' 마음을 기울입니다. 1950년대부터 이런 흐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영문학을 하는 분들은 비싼 영어책을 살 주머니가 못 되어 청계천을 누비며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책'을 싼값에 사서 읽으려고 다리품을 부지런히 팔았다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지금 우리 나라 군대 형편이 많이 나아져서, 군대에서도 '느긋하게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을 할 수 있는가 하고. 군대 도서관은 얼마나 갖추어져 있고, 이 도서관은 군인들이 얼마나 홀가분하게 자주 드나들 수 있는가 하고. '정훈도서'라는 이름으로 군인이 읽을 책을 대고 있다고 하나, 이 정훈도서 이름을 단 책들이 군인들 하나하나한테 얼마나 쥐어지고 있는가 하고.

 

설마, 우리 나라 국방부 어르신께서는 군대에서 이태라는 세월을 보내고 사회로 돌아갈 젊은이들이 '군부대에서 글 한 줄조차 안 읽으며 머리에 허옇게 비어 버리기'를 바라지는 않으실 테지요. 이참에 "군대에 들여와서는 안 될 책"을 스물세 권 뽑은 까닭도, 군부대에서 젊은 군인들이 틈틈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밭을 갈고닦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지요.

 

그렇다면, 우리 나라 군부대에서도 '군인이 읽을 책을 넉넉히 갖추는 도서관'을 알뜰살뜰 꾸려주면 좋겠어요. 굳이 '큰 건물에 짓지 않아'도 됩니다.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지, 책만 딥다 쌓아 놓는 곳이 아닙니다.

 

건물이 으리으리하거나 훌륭하다고 해서 책을 읽기 좋은 곳이 아닙니다. 건물은 작고 좁아도, 읽을 책만 넉넉하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운동장(연병장)에서 읽을 수 있고 내무반에서 읽을 수 있으며, 참호에서 잠깐 담배 피우며 쉬다가, 훈련을 받는 가운데 10분씩 쉬는 사이사이 읽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읽지 말라는 책을 스물세 권이니 몇 권이니 하고 뽑아서 '이 책을 가지고 있는 장병이 있나 없나 샅샅이 살피느'라 아까운 시간을 헤프게 버리지 말고, 그 시간에 '장병이 읽으면 좋을 책'을 골고루 갖춰서, 젊은 군인들 마음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추스르도록 이끌어 주면 고맙겠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의 다른 책도 읽어주세요

 

마지막으로 한 말씀 여쭙고 싶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우리들의 하느님>을 '불온도서'라는 도장을 찍으며 넣어 주셨는데,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다른 책인 <하느님의 눈물>과 <몽실 언니> <강아지똥>을 한번 읽어 주셔요.

 

이 땅 이 나라에서 군부대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이 초등학생이었던 어릴 적에, 거의 누구나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책과 동시를 읽고 자랍니다. 왜, 무슨 까닭으로 이 땅 이 나라 초등학교 아이들이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와 동시를 읽는지, 왜, 어인 까닭으로 이 땅 이 나라 교사들이 권정생 할아버지 책을 추천도서로 삼아서 아이들한테 읽히고, 부모님들도 아이들한테 권정생 할아버지 책을 사서 읽히는지를 생각해 주셔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우리들의 하느님 - 권정생 산문집, 개정증보판

권정생 지음, 녹색평론사(2008)


태그:#국방부 불온서적, #국가보안법, #불온도서, #불온도서 23선, #권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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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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