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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희 기자] 베이징 올림픽을 6개월여 앞둔 지난 12일, 서울 불암산 기슭에 자리한 태릉선수촌을 찾았다. 메달을 향한 대표선수들의 집념이 후끈 달아오른 현장에서 선수들의 대모이자 맏언니와도 같은 이에리사(54) 태릉선수촌장을 만났다.

 

그는 선수촌장들이 으레 입고 지내던 기존의 트레이닝복 대신에 ‘CEO형 선수촌장’에 걸맞은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기자를 맞았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선수촌장직을 맡아 지난 3년간 뛰어난 행정역량을 발휘해 보인 그가 최근 IOC(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직에 도전장을 내밀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한국 여성으로는 첫 도전이다.

 

"후배에게 인정받아 뿌듯... 선수출신 세계 진출 앞장"

 

- 이례적으로 후배 여성 메달리스트들이 적극 나서 추천운동을 전개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후배들에게 인정받는 것만큼 뿌듯한 일이 없는 것 같다. 결과에 관계없이 나를 믿고 지지해준 후배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사실 나조차도 IOC 위원은 정치인이나 경제인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많은 체육인들이 그런 고정관념 속에 살아왔다. 후배들이 용기를 내준 덕분에 이제는 선수 출신이 세계무대에 진출할 시대가 왔다는 깨우침을 얻게 됐다. 체육계를 체육인에게 되돌려주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 경쟁자가 여럿 있는 것 같던데.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도전 의사를 밝힌 분은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가 유일하다. 태권도 금메달리스트인 문대성 동아대 교수는 선수분과위원이니까 영역이 다르다. 사실 내 문제라서 조심스럽지만, 남의 일이라면 한국 첫 여성 IOC 위원의 탄생을 무조건 밀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IOC 내부규정에 따라 115명 위원 중에 20%(23명)가 여성 몫이다. 현재 16명에 불과하니까 턱없이 모자란다. 여성 몫이 이렇게 비어 있는데 아깝지 않나?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다면 시도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IOC 위원직 20% 여성할당 본선보다 예선이 더 어려워"

 

- 자질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나만큼 검증을 많이 받은 사람이 또 누가 있나. 올림픽 출전 경험이 없어서 곤란하다니. 탁구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게 88서울올림픽 때다. 국가대표 선수로 8년간 활약하고 1977년 은퇴했으니까 내게는 기회 자체가 없었던 거다. 73년 유고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여자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고, 88올림픽 때는 대표팀 감독으로 양영자·현정화 여자복식 금메달을 기록했다. 체육계가 이렇게까지 보수적인가, 답답할 따름이다.”

 

- 후배 선수들이 본인을 멘토로 삼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취임 당시 남자는 물론이고 같은 여자들도 ‘여성 촌장 과연 괜찮을까’하는 우려의 시각이 많았다. 나 자신도 걱정이 많았고. 하지만 다행히도 선수들이 시합을 잘 해줬고, 나도 선수촌 1세대로서 우리 아이들(그는 대표팀 선수들을 ‘우리 아이들’이라고 불렀다)에게 정말 필요한 것들을 해주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아이들과 지도자들이 내 편이고, 설사 선수촌에서 쫓겨나더라도 돌아갈 직장(용인대 교수·휴직중)이 있다는 자신감으로 소신 있게 활동했다. 그 모습이 후배들 보기에 든든해 보여서 IOC 위원 추천까지 오게 된 것 같다.”

 

태릉선수촌 곪은 상처 이슈화... '데모 촌장' 불명예도 괜찮아

 

- 짧은 훈련일수나 부족한 여자숙소 등 태릉선수촌 내 문제를 이슈화해 가장 역동적인 촌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취임 당시 첫 일성이 ‘선수촌의 현실에 대해 모두 알권리가 있다’였다. 가급적 많은 이들이 선수촌과 한국 체육의 실상을 알고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뚜껑을 연 거다. 와서 보니 제일 큰 문제가 훈련일수였다. 365일 중에 105일에 불과했다. 생계가 막막한 비인기종목에서 땀 흘리는 선수와 지도자들에게 훈련수당(하루 3만3000원)을 줄 수 있는 날짜가 이거밖에 안됐던 거다. 취임 3개월 안에 훈련일수를 늘려주지 않으면 선수촌 문을 닫겠다고 선전포고했다. 처음에는 안믿더니 날짜가 점점 다가오니까 실감을 하더라. 결국 180일로 늘렸다. 지난해에는 직장(실업팀)이 없는 지도자 84명에 한해 수당을 조금 올렸다. 선수들은 인원이 너무 많아서 못했다. 안타깝다.” 

 

- 여자숙소 리모델링도 성사시켰는데.

“훈련일수가 늘면서 여자숙소가 턱없이 모자라 남자숙소를 점거하다시피 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알면 창피당할 일이다. 그래서 폐허가 된 식당건물 리모델링을 추진키로 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을 찾아가 21억2500만원의 지원금을 따냈고, 어렵사리 문화관광부 승인도 얻었다. 그런데 정작 문광부 산하인 문화재청이 허가를 안내주는 거다. 그래서 생각을 같이하는 선수·지도자들과 함께 문화재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해외 경기나 전지훈련을 떠난 아이들이 참석 못해서 아쉽다고 문자를 보내올 정도로 호응이 뜨거웠다. 결국엔 해냈다. 3년마다 문화재청에 사용허가를 받아야 했던 것도 2020년까지 별도 절차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 역대 촌장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다. 

“66년 선수촌이 처음 생겼을 때는 선수도 많지 않았고, 촌장도 선수촌에서 먹고 자며 훈련을 격려하는 총감독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와서 경험해보니 선수촌의 자부심을 회복하려면 촌장부터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수나 지도자들과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지금까지로 충분했고, 앞으로는 선수들이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훈련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에 전력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트레이닝복 대신 정장을 입었고, 출퇴근을 시작했다. 제 경험을 살려 건물마다 열쇠 대신 카드인식기를 설치해 선수들 안전을 보장하고, 샤워장 바닥에 미끄럼 방지시설을 설치했다. 선수회관을 ‘챔피언 하우스’로 바꾸는 대공사도 시작했다. 임기가 끝날 즈음엔 볼만한 선수촌으로 거듭날 거라 자신한다.”

 

“선수와 지도자 실업 고민 커... 기업 운동부 운영 의무화해야”

 

- 여자핸드볼 대표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 대한 인기가 폭발적이다. 보았는지? 

“우생순, 안보면 큰일나지.(웃음) 아테네 올림픽 때 같이 생활해서 잘 안다.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실제 생활을 보는 것 같았다. 영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다.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했다. 영화를 계기로 비인기종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길어야 고작 2주일이다. 관심은 수그러들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한데볼’로.”

 

- 보다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없을까?

“비인기종목은 대부분 인원과 예산 소요가 많은 단체전 종목이다. 그래서 기업들이 운동부 육성에 소극적이다. 우스갯소리로 선수 한명당 정년까지 들어가는 비용이 빌딩 한채라고 한다. 그래서 탁구만 해도 5~6명의 선수만 확보하면 되는데 안하는 거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장애인 채용을 의무화하는 것처럼 운동부 운영도 적극 강제해야 한다. 대신 조세감면 등의 인센티브를 주는 거다. 막말로 아이들도 학교 졸업하면 갈 곳이 없는데, 나이 많은 기혼여성들은 정말 막막하다.”

 

"여성선수 성범죄 일벌백계로 여성지도자 적극 양성·기용을" 

 

이에리사 태릉선수촌장은?

1954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서울여상 1학년 때 태극마크를 달고 77년 은퇴하기까지 8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73년 4월 유고 사라예보에서 개최된 세계탁구대회에서 9전 전승을 거두는 등 한국 구기사상 처음으로 단체전 세계 재패를 기록했다.

 

80년 독일 FTG 프랑크푸르트팀 코치 및 선수로 활약하다가 귀국해 84년부터 87년까지 국가대표 여자탁구팀 코치를 맡았다. 2002년부터 용인대 교수로 재직하다 2005년부터 태릉선수촌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6년에는 아시아권을 대표해 IOC로 부터 ‘여성과 스포츠’ 트로피를 받았다.

- 최근 남성감독에 의한 여성선수 성폭행 문제가 뜨거운 감자다.

“지난 2006년 우리은행 여자프로농구팀 감독의 여성선수 성폭행 사건으로 체육계는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 딸에게 운동시키는 것을 두렵게 만든 것이다. 당시 해결방안들이 제법 나왔다.

 

여자지도자를 적극 양성해 여성선수들을 정서적으로 이끌어주고, 여자숙소에 여자코치를 한명씩 배치해 아이들이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라고 본다. 그런데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제가 알기로는 이 사건 이후 여성선수 성범죄 사건이 다시 발생했고, 그대로 은폐됐다. 그러니까 방송에도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엉뚱한 피해자가 생길까 걱정된다. 앞으로 여성선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저 애는 언제 당했을까’로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측성 기사도 쏟아지고 있다.

 

방송과 동시에 범죄자를 공개해 일벌백계해야지, 이대로 방치하면 많은 여성선수들이 선의의 피해를 입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여성 수장으로서 선수들이 어떻게 대처하도록 도울 것인지 고민 중이다.”

 

- 합숙소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가장 우세한데.

“극단적인 방법은 옳지 않다. 무조건 여성감독을 기용하도록 강제하면 된다.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도, 눈 감고 넘어가주는 사람도 모두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여성지도자들이 많은데 갈 곳이 없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당장 합숙소에 여성인력을 필수적으로 배치하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예산인데, 성범죄 예방을 위한 것인 만큼 정부나 지자체가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임시방편적인 합숙소 폐지가 아니라 운동은 운동대로 하고, 여성지도자를 적극 양성하는 합리적인 방향으로 가야 한다.”  

 

베이징 올림픽 세계 10위 목표... "아이들 땀과 정신력을 믿는다"

 

- 오는 8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있다. 포부와 계획은? 

“세계 톱권인 박태환(수영), 장미란(역도)도 실제 경기를 뛰어봐야 결과를 알 정도로 안갯 속이다. 역대 올림픽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경기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세계 10위 목표를 달성하려면 금메달 10개는 따야 하는데,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메달이 집중적으로 쏟아질 종목이 양궁하고 태권도를 빼면 거의 없다. 우리 아이들의 땀과 정신력, 어려움 속에서도 기필코 해내는 국민성, 예상치 못한 이변, 여기에 모든 승부를 거는 거다.” 

 

- 후배 선수들에게 당부하고픈 말은?

“패배를 두려워하지 말라, 이기기 위해 매순간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제는 여성들도 능력만 갖추면 쓰임 받는 세상 아닌가.”


태그:#태릉선수촌장, #이에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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