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기산도 의사의 유일한 유품

 기산도 의사
 기산도 의사
ⓒ 박도

관련사진보기

기산도 의사의 아들 기노식씨 집은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마을에 여느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양지바른 흔한 집이었다. 시골 예사 집들과 마찬가지로 두 내외만 사는 듯 집안은 고즈넉했F다.

마루 벽에는 흰 두루마기에 갓을 단정히 쓴 노인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정면에 걸려 있었고, 사진 아래에는 정부에서 내린 ‘건국공로훈장’이 낡은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려 있었다.

“저 어른이 기산도 의사입니까?”
“그러지라오.”

기산도 의사 며느님의 대답이었다. 순간 나는 예까지 미련스럽게 애써 끌고 온 스캐너를 요긴하게 쓸 기회를 포착했다.

“저 사진 좀 복사해 가야겠습니다.”
“안 돼요, 유품이라곤 저것 하나밖에 없소.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것저것 가져가놓고는 꿩 구워먹은 소식이라……. 저 사진은 탐내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빌려준 적도 없소.”

기노식씨가 정색을 했다. 그새 고영준 선생이 컴퓨터와 스캐너가 든 가방을 가져왔다. 나는 이 사진을 가져가는 게 아니라 이 자리에서 바로 복사하고는 드릴 것이라고 하니까 그제야 사진틀을 내려주었다. 곧장 스캐너를 작동, 스캔 작업이 끝났다.

“달나라에 갔다 왔다 한다는 시상(세상)이라더니 참말로 좋은 시상(세상)이구만요.”

곁에서 줄곧 지켜보던 기산도 의사 며느님이 사진틀을 다시 걸면서 한 마디 했다. 날씨도 포근하고 볕이 좋아 나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녹음기를 켜자 두 내외는 일순 말문을 닫았다.

“요것이 없다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말씀 하시오.”
하지만 이런 일에 익숙지 않는 그들 내외는 녹음기를 의식,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녹음기를 껐다고 하고서는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기산도 의사 자부 정복덕씨와 아들 기노식씨
 기산도 의사 자부 정복덕씨와 아들 기노식씨
ⓒ 박도

관련사진보기


"별 일 다 겪었소"

“어르신 살아온 얘기나 들어보려고 합니다.”
“아이고, 좌우당간 우리 아버지 땜시로 별 일 다 겪었소. 그 일들을 어찌 다 말하것소. 당신도 그랬지만 가족들도 평생을 왜놈들에게 쫓겨 다녔소. 내가 태어나긴 장성에서 태어났는데 거시서는 왜놈 등살에 살 수가 없어 경상도 통영으로 쫓겨 갔고, 거기서도 오래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살다가 내가 일곱 살 때 고흥으로 왔구먼요. 여기 와서도 아무 것도 없어 내도록 남의 곁방(셋방)살이하다가 계우 이 집을 마련했구먼요.”

“기산도 의사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아주 독한 사람이었어요. 왜놈들이 우리 아버지를 잡아다가 열 손가락 손가락마다 못질을 해도 항복을 하지 않았고(기록에는 여덟 손가락으로 나옴), 당신 이빨로 셰(혀)를 잘라 일부로 벙어리가 되어서까지도 동지들을 불지 않았어요. 나는 학교라고는 통영에서 한 열흘 다니다가 왜놈들에게 쫓겨나 더 다니지 못해 무식하고, 이제 나이도 들어 (기억도) 오락가락 하니까 이걸 보면 우리 아버지 얘기가 다 나오니까 가져가시오.”

의제 기산도 의사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가 추모비 제막식을 하면서 만든 작은 책자였다.

 “유리언걸지사(流離焉乞之士 奇山度之墓; 떠돌이 거지 지사)”
 “유리언걸지사(流離焉乞之士 奇山度之墓; 떠돌이 거지 지사)”
ⓒ 박도

관련사진보기

“남다른 아버지를 둔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소싯적은 물론 얼마 전까지도 원망 많이 했지요. 그래도 핏줄이라 내가 군에 있을 때, 한탄강에서 빠져죽을 지경이 된 적이 있었구먼요.

그때 하늘에다가 빌었어요. 나를 살려만 주신다면 우리 아버지 유언인 “유리언걸지사 기산도지묘(流離焉乞之士 奇山度之墓; 떠돌이 거지 지사 기산도의 묘)”라는 말씀을 나무 비에 새겨 꼭 세우겠으니 그 뒤에 데려가라고. 이제는 우리 동네에다가 돌비석을 세워드렸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구먼요.

우리가 남다른 고생은 했지만, 몸둥이가 반신불수가 되고 셰(혀)까지 자르고 평생을 거지 생활을 한 아버지 고생에야 어찌 견주겠소. 우리야 아버지 덕분에 좋은 시상(세상) 만나 이제는 끼니 걱정 않고 사니까 고맙고 고맙지요.” 

기산도 의사의 파란만장한 생애

기산도는 1878년 10월 16일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하남리에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의병장 등을 배출한 호남의 명문 행주 기씨 식재(植齋) 기재(奇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글을 깨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다.

16세 때 구례 연곡사에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전사, 순국한 고광순(高光洵) 의병장의 사위가 되었다. 기독교 학교의 교사를 지내기도 한 기산도는 고향 장성에다 자강회(自彊會)를 조직하여 인재를 모아 양성하며 그들에게 무력 투쟁의 투지와 정신력을 길렀다.

1904년, 기기 박관호 등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장성 광주간 고개에서 일병과 싸워 일병 수명을 죽이고 우리 측도 세 명이나 잃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기산도는 상경하여 이범석 서상규 동지들과 매국원흉 암살단을 조직하였으나 거사를 앞두고 일 헌병에게 발각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도 발설치 않아 일 개월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1906년 2월 16일, 구완희, 이세진 동지와 함께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군부대신 이근택 집을 밤 12시 무렵 습격하였다. 이날 이근택은 오후 7시경에 퇴궐한 뒤 8시 무렵에 손님 6명의 방문을 받고 이들과 대화를 나눈 뒤 11시 무렵에 침실로 들어갔다.

그의 첩은 옆에서 국문 잡기(國文雜記)를 읽고 있었다. 이때 기산도 일행 셋이 들어와 한 명은 이근택의 팔을 손으로 잡고 다른 한 명이 칼로 찔렀다. 이근택이 이때 재빨리 방안의 촛불을 끄자 일행은 칼로 이근택의 머리에서부터 어깨와 등 10여 곳을 마구 찔렀으나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하였다.

이근택과 첩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하인이 달려오자 일행은 역시 칼로 하인의 배와 얼굴, 다리 등 4곳을 찔렀다. 이어서 집안을 경비하던 병정 6명과 순검 4명이 달려왔다. 일본 헌병과 순사도 이근택의 집에 설치한 경종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그러나 기산도 일행은 이미 남쪽 담에 설치해 놓은 밧줄을 타고 탈출한 뒤였다. <대한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이 이 사건을 보도하였다.

 군부대신 이근택
 군부대신 이근택
ⓒ 도서출판 개마고원

관련사진보기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씨가 재작일 하오 12시경 그의 별실(別室)과 함께 막 옷을 벗고 취침하려 할 무렵에, 갑자기 양복을 입은 누구인지 모르는 3명이 칼을 들고 돌입(突入)하여, 가슴과 등 여러 곳을 난자(亂刺)하여 중상을 입고 땅에 혼절(昏絶)한 바, 그의 집 청직(廳直)이 김가(金哥)가 내실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괴이히 여겨 탐문하고자 하니, 갑자기 양복 입은 3명이 안에서 급히 나와 놀라 누구냐 하고 물은 즉, 이들이 역시 칼로 김가를 타격하여 귀와 어깨에 부상을 입히고, 곧바로 도망갔다. 이 군부대신은 한성병원에서 치료중이나 부상이 극중(極重)하여, 위험(危險)이 팔구분(八九分)이라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18일, ‘이씨 봉자(李氏逢刺; 이씨 자객을 만나다)’

떠돌이 거지 지사 기산도

기산도 등은 계획된 일을 무사히 마친 뒤 인적이 끊어진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들이 사라진 뒤 곧 이근택의 집은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경호를 책임진 한국군경을 비롯한 일본 헌병대 및 순사들이 즉각 출동하였으나, 그들은 13곳을 난자당한 채 널브러져 있는 이근택과 실신한 첩만 보았을 뿐이다.

기산도를 비롯한 범인들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현장에 기산도가 떨어트린 가발이 단서가 되어 결국 체포되었다. 이근택은 한 달 이상 한성병원의 특실에서 치료를 받은 뒤 퇴원하여 기산도를 신문하였다.

이때 기산도는, “너희 오적(五賊)을 죽이려는 이가 어찌 나 한사람뿐이겠느냐. 단지 나는 너를 죽이려던 것이 서툴러 탄로 나게 된 것만이 한스럽다”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의지를 당당하게 펼쳤다고 한다.

기산도는 2년 반의 징역형을 받았다. 당시 재판장은 이완용의 이복형 이윤용이었다. 출옥한 뒤에 그는 의병 전선에 뛰어들었다. 유생에서 계몽운동으로, 의열투쟁에서 다시 의병 항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그는 고향 전남 장성으로 돌아와 재종조부인 의병장 기삼연의 뒤를 이어 의병투쟁에 나섰다.

1916년에는 일본 헌병 감시자를 따돌리고, 고흥군 도화면에 있는 친척 기하요(奇夏堯)씨를 찾아와 당오리를 은거지로 낮에는 머슴살이하고, 밤에는 사랑방에 서당을 열어 인재 양성에 힘써며 이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운동 뒤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자 제자 박길용, 기동환을 데리고 진남포로 가다가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상해에 가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일본군 보조(밀정)가 당오리로 기습하여 기산도를 사장나무에 묶어놓고 매질로 실신시킨 뒤 날이 밝으면 경찰서로 압송키로 하였으나 이 마을에 사는 김봉순 할머니가 부엌칼을 감추고 어둑새벽에 물 길어가는 척 하고 결박한 포승줄을 잘라 도피케 하였다.

1920년에는 제자 박길용의 누이 박순임과 재혼한 뒤, 숨어 지내다가 일본 헌병 야우다(矢羽田)에게 발각 체포되고 기산도의 옷에서 기밀문서(연판장)가 나와 고흥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일경이 기산도에게 고진 고문을 하며 이를 추궁해도 자백치 않자 광주형무소로 이감하여 다시 가혹한 고문을 하자 “개 같은 너희에게 어찌 자백하랴”하고,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잘랐다.

1925년, 5년의 옥고를 치른 뒤 출감하여 고흥 당오리에서 장흥으로 피신한 처 박순임의 도움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을 추스르며 떠돌이로 살다가 1928년 51세로 운명하면서 “유리언걸지사 기산도지묘(流離焉乞之士 奇山度之墓)”란 나무 비 하나만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67년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고광순 따님과 같이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작별

 기노식씨(오른쪽)가 어머니의 친정 손자 고영준 선생에게 노잣돈을 전하고 있다.
 기노식씨(오른쪽)가 어머니의 친정 손자 고영준 선생에게 노잣돈을 전하고 있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나는 애초 고흥에 찾아갈 때는 하룻밤 잘 각오까지 했으나 취재가 예정보다 빨리 끝났다. 잘 하면 가는 길에 보성 출신 안규홍 의병장 취재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갈 차비를 부지런히 서둘렀다.

기노식씨 내외는 오랜만에 귀한 오신 손님을 맨입으로 보낼 수 없다고 장터 마을로 안내하려는 걸 극구 사양하고 차에 오르는데, 기노식씨가 차비를 넣은 봉투를 굳이 고영준 선생에게 건넸다. 당신 어머니의 친정 장손이 아닌가.

“내가 이것도 받지를 않으면 서운해 하실 테지. 이따 우리 이 돈으로 저녁이나 먹읍시다.”

고 선생은 대고모 아들인 기노식씨가 준 봉투를 마지못해 받았다. 그들 내외는 우리가 고흥 도화면 당오리 마을을 떠날 때까지 대문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집 앞에서 전송하는 기노식씨 내외
 집 앞에서 전송하는 기노식씨 내외
ⓒ 박도

관련사진보기


군말

나는 기산도 의사를 취재하는 내내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추적 응징한 권중희 박기서 두 분이 연상되었다. 호남에서 돌아온지 열흘 뒤인 지난 11월 17일, 나는 권중희 선생의 비보를 받았다. 내가 서울을 떠난 이후로는 그분을 딱 한번밖에 만나 적이 없지만,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한 숙소에서 40여 일 같은 방에 묵으면서 많은 얘기를 들었다.

고인은 열혈 우국지사로 대한민국의 부정부패를 뿌리째 뽑으려면 연희동에 사는 두 전직 대통령을 손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며, 이 땅에 정의의 싹도 자랄 수 없다고 단정하며, 당신이 죽기 전 반드시 그들을 응징하겠다고 벼르고 별렀다. 

연희동 침실에 잠입하여 안두희 엉덩이를 찔렀던 대침으로 두 내외에게 한두 방만 꽂아주면 그동안 기업체로부터 갈취한 돈을 다 게워낼 것이며, 그 돈으로 노숙자들의 잠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말을 귀에 익도록 하면서, 특별히 나에게 현장 목격 기록자로서 동행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나는 굳이 사양하고는 강원 산골로 내려왔지만, 그 뒤로도 거사를 꾸미고자 동지와 자금을 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권중희 선생이 전직 대통령의 응징계획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는, 이제 연희동 전직 대통령은 발 뻗치고 자도 되겠다는 천기누설을 들려드린다.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서 기업체 사주에게 검은 돈을 강탈하다시피 받았으니까 기업들이 간덩이가 부어 마음 놓고 분식회계니 탈세니 장난쳤을 것이다. 그들이 누군가. 북극에 가서도 냉장고를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닌가. 그런 장사꾼이 권력자에게 결코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윗물인 대통령조차도 그러했으니, 그 부정과 비리의 연결 고리는 계속 물고 물어 온 사회에 독버섯처럼 부정 비리를 번지게 했다. 조선이 왜 망했는가? 그 근본 원인은 부정 부패 때문이었다. 탐관오리 때문에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고, 청나라 군대가 일본 군대가 이 땅에 들어왔다. 결국 외세에 나라는 망하고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일제의 총칼에 제물이 되었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망국민의 한을 품고 살았던가.

어떻게 지킨 나라요, 어떻게 찾은 나라인데 권력의 심장부에서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 이들은 전직 대통령이 아니라 국가 파괴범들이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지하로 인도한 박기서 택시 기사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지하로 인도한 박기서 택시 기사
ⓒ 박도

관련사진보기

누가 이 독버섯을 없앨 것인가. 경찰, 검찰, 언론, 정치인 …… 아마도 백성들은 그들이 이를 고친다고 하면 코웃음 칠 것이다. 요즘 돌아가는 걸 보면 아마 지나가는 개도 웃을 것이다.

언젠가 암살범 안두희를 저승으로 보낸 박기서씨와 대담하면서 살인한 죄의식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 쓰레기였습니다. 더 이상 악취를 참을 수 없어 내가 치웠을 뿐입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그런 쓰레기 더미가 몇 더 있습니다 …….”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새, 승용차는 안규홍 의병장 후손이 사는 보성군 조성면 면사무소에 닿았다.

(다음 회는 머슴으로 의병장이 된 '안규홍 의병장' 편입니다.)

덧붙이는 글 | 호남 현지 취재 답사로 다음 보성 안규홍 의병장 기사는 일 주일 후에나 송고하겠습니다.



태그:#의병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30여년 교단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