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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객사에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갈지 굳이 정할 필요도 없었다. 저 멀리 한옥 건물이 보이기에 그쪽으로 걸어갔고, 역시 골목을 따라 걸으니 몇 동의 한옥건물들이 보였다. 바로 홍산동헌(鴻山東軒)이었다.

▲ 집홍루. 홍산동헌의 아문이다. 팔작지붕에 다포식 공포를 쓴 2층 건물로서 장초석을 썼다. 기자가 방문했을 당시엔 문이 닫혀 있었다.
ⓒ 송영대
홍산동헌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본 것은 집홍루이다. 집홍루는 홍산동헌의 아문(衙門)이다. 아문이라고 하는 것은 관아의 문을 말하는 것인데, 즉 이 홍산동헌의 입구가 집홍루라는 것이다. 집홍루는 장초석에 기둥을 박아 세운 누각이다.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공포는 다포양식이다.

다포(多包)라고 하는 것은 공포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것을 말하며 무거운 무게를 잘 지탱해 준다. 주로 격이 있는 건물에 쓰이는데, 고려 후기 몽골에 의하여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고 한다. 반면 기둥 위에마다 공포가 있는 것을 주심포라고 하며, 이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던 방식이었다.

기자가 찾아 갔을 때 집홍루는 문이 닫혀 있었다. 담을 넘어서라도 안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건 문화재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후에 알고 보니 이 홍산동헌이 국가 사적으로 신청한 상태이어서 이를 정비하던 중이라 그랬다고 한다. 국가 사적으로 정해진 것은 지난 7월 31일의 일이지만, 기자가 이 홍산동헌을 찾아간 것은 5월 19일이었다. 사적으로 신청한 것은 5월 14일의 일로서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집홍루가 닫혀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게 사실 많이 아쉬웠다.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안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했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 내부의 모습이 보여서 다행이었다.

▲ 홍산동헌. 편액에는 제금당이라 써있고, 그 옆에는 작은 편액으로 동헌이라 써있다. 이곳은 당시 홍산현에서의 모든 행정사무와 재판 등을 담당했었다.(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41호)
ⓒ 송영대
부여군 홍산면은 조선시대에 홍산현이라고 하였다. 이 홍산현의 관아가 바로 이곳인데, 동헌(東軒)이란 그 당시에 정사, 즉 주로 행정이나 재판 등을 보던 집무실에 해당한다. 이 홍산동헌은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41호에 해당한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후 관청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전국에 걸쳐 관청건물을 지어 정비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고종 8년 즉 1871년 정기화 군수가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홍산지서로 사용되다가, 1984년에 부여군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하였다.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각각 크기가 다른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동헌의 편액에 제금당(製錦堂)이라고 쓰여 있으며 그 옆에 따로 작은 편액이 있는데, 거기엔 동헌(東軒)이라 쓰여 있다. 충주에도 제금당이 있는데, 역시 관아건물이다.

▲ 홍산형방청. 형방청은 지방에서의 치안 업무를 담당하던 곳으로 형방청이 남아있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곳의 형방청은 ㄷ자형태를 띄고 있다.(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74호)
ⓒ 송영대
이 제금당 아래에는 또 하나의 건물이 있다. ㄷ자의 형태를 가진 이 건물은 형방청(刑房廳)이라고 한다. 홍산형방청은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174호로 지정된 것으로서, 역시 관아 건물 중의 하나이다. 고종 8년, 즉 1871년에 개건한 민가풍의 목조건물로, 당시의 현액명은 비홍추청(飛鴻秋廳)이었다고 한다.

10칸 크기의 동향집으로 북쪽의 안채와 남쪽의 딸림채로 이루어졌는데, 원래 중앙 대청과 남쪽 딸림채에는 마루를 깔았었다. 북쪽 안채에는 2분합문(二分閤門)의 띠살문을 단 1칸짜리 온돌방 2개를 들였다고 한다.

자연석 주춧돌에 방주(方柱)를 세웠는데 공포가 없는 남도리집이다. 남쪽 딸림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에 전면에 빈칸짜리 퇴칸을 달았다. 팔작지붕집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을 가설하였고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다. 연등천장(椽燈天障)이란 서까래나 보 등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관아건물 중 형방청은 그 예가 희소한 것이다. 형방청은 지방에서 주로 치안업무를 관장하는 곳이다.

▲ 함차. 함차란 죄인을 호송하던 수레로서 홍산형방청 옆에 있다. 이는 홍산형방청의 역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송영대
홍산형방청 옆에는 재미있는 게 하나 보인다. 바로 창살이 있는 수레인데, 조선시대 때 죄인을 싣고 호송하던 이러한 나무로 된 감옥수레를 함차(檻車)라고 부른다. 함차가 형방청의 옆에 있는 것은 형방청의 역할과도 관계가 있으리라고 본다. 함차를 보며 문득 든 생각이, 사극에서 저런 함차가 많이 보이니 관광객을 상대로 저런 함차에 들어가는 체험 등을 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홍사동헌의 옆에는 자그마한 건물이 하나 있다. 맞배지붕의 조촐한 작은 건물인데, 목은선생영정(牧隱先生影幀)이라고 쓰여 있다. 목은?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 답사 중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아 후에 돌아와서 알아보니 바로 목은 이색선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려 말의 유명한 성리학자였던 이색의 영정이 무슨 연유로 이 홍산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곳도 기자가 찾았을 땐 문이 닫혀 있어서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쉽다.

▲ 홍산현지도. 홍산현에 대한 정보를 수록하고 있는 지도로서 중앙에서 약간 왼쪽으로 내려간 곳에 홍산현 관아가 보인다. 그리고 왼쪽 윗부분에 보면 무량사가 보인다.
ⓒ 부여군, 『扶餘文化財大觀』, 2006
위는 홍산현지도(鴻山縣地圖)이다. 사진에서 가운데에서 약간 왼쪽 아래에 있는 게 바로 홍산동헌과 객사 등의 관청들이다.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작은 건물이 향교이다. 지도를 자세히 보면 위의 왼쪽에 2층의 건물과 작은 건물들, 그리고 석탑이 하나 보이는데, 이는 바로 무량사와 주위의 암자, 그리고 무량사에 있는 무량사오층석탑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지도를 보면 흥미로운 게 지금과 비교해서 약간 부정확할지는 몰라도 자세히 보면 크게 차이가 없는 게 특징이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그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떠올릴 수 있는데, 지도와 비교해서 지금은 없지만 과거에는 존재했던 것들을 추측 할 수 있다.

홍산이란 곳은 예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몽학은 왕족의 서얼 출신의 사람으로서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 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이로 인하여 불만이 가득 차게 되자, 한현과 함께 선조 29년인 1596년에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 반란은 순식간에 많은 민중들의 마음을 얻게 되고, 임천, 정산, 청양, 대흥을 잇달아 함락시키고 홍주성에까지 침범하게 된다.

이몽학은 여러 군사를 이끌고 홍주성까지 오게 되었다. 이때 홍주목사였던 홍가신은 그러한 이몽학에게 거짓항복을 한다. 그리고 시간을 끌면서 군사를 모으고, 점차 관군은 이러한 이몽학에게 다가갔다. 결국 이몽학은 홍주성을 함락시키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에 덕산으로 달아나나, 결국 자신의 부하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 홍산동헌은 이몽학이 1596년 7월 6일 윤영현을 붙잡은 곳이다. 이곳부터 그 세력을 떨치고 이몽학의 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만한 곳이다. 이몽학의 난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이 홍산인지라, 홍산에는 이몽학에 대한 여러 전설이 전해진다.

부여문화원에서 나온 <부여의 구비설화 2>라는 책에는 홍산 등의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개중에는 재미있는 것도 많은데, 이 중 2개만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이몽학은 어릴 적 덕림이라는 곳에 글을 배우러 다녔는데, 이몽학이 살던 곳과 덕림 사이에는 갯벌이 있었다고 한다. 이몽학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였다고 하는데, 하루는 큰 비가 내려 홍수가 져서 갯벌을 건너지 않은 애들도 서당에 오질 않았는데 이몽학은 홀로 제일 먼저 왔다고 한다.

서당의 훈장이 이게 의심이 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여 그날 공부를 마치고 슬쩍 따라나서 이몽학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았다고 한다. 이몽학은 뒷산으로 가서 유독이라는 풀의 줄기를 꺾어 자기 다리에 대어 자르고, 이를 다리 길이에 맞춰서 두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띄우고 건너갔다고 한다.

서당 훈장이 이를 보고 놀라면서 “저놈이 잘된다고 하면 큰 인재가 될 것이고, 만약에 저 놈이 못된다고 하면 나라를 망칠 놈이로구나. 자칫 잘못하면 큰 화를 입을 테니 내가 저놈을 가르쳐서는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 다음날 이몽학이 오자, “나는 이미 너를 가르칠만한 능력이 없다. 내일부터는 여기 오지 말고 나보다 더 유능하고 훌륭한 선생님께 배우고 나라에 큰일을 해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바로 이몽학 오누이가 힘내기를 한 전설인데, 이몽학의 누이도 이몽학처럼 능력도 뛰어나고 똑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몽학을 보고 장차 위험한 일을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는데, 이 때문에 내기를 하였다고 한다. 바로 목숨을 건 내기로서 성 쌓기 내기였다. 둘은 힘도 좋아 성을 쌓아올렸는데, 오누이의 어머니가 이를 차차 보니 누이가 좀 더 유리해 보였다. 이 내기가 목숨을 건 내기라는 것을 알자 어머니는 딸은 죽을지언정 아들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꾀를 하나 낸다.

어머니는 딸에게 가서 아침을 만들었으니 이를 먹고 일하라고 하였다. 누이는 순순히 말을 듣고 내려가서 아침을 먹었는데, 바로 뜨거운 팥죽이었다고 한다. 결국 팥죽을 다 먹고 내기를 하던 곳에 가자 이몽학은 이미 성을 다 쌓았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누이는 결국 죽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그곳에 가면 형제바위, 즉 오누이바위가 있다고 전한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5월 19일 부여 홍산 일대에 답사갔다 온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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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06학번 학생으로 현재는 휴학중입니다. 다음과 네이버의 커뮤니티에서 운영자나 논객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8년 네이버 1차 파워지식in에 선정된 바 있습니다. 2009년에 네이버 지식활동대 1기에 선정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가야문화권 답사를 갔다와서 연재기사를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