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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영만의 글씨.
남당(南唐) 중구(中主)의 산화자사(山花子詞) 중 '靑鳥不傳雲外信 丁香空結雨中愁(청조가 고향 소식을 전하지 않아 비 내리는 정향에 수심만 맺히네)' 라고 한 구절이 문득 떠올라 시를 지어보고자 한다. 노형의 문장은 어쩌면 이토록 창자를 꿰뚫는가! 산강행사(山康行嗣)를 통해 익히 알고는 있으나 전호(專號)를 알고 싶으니 모든 시문에 착호를 가하여 보내주면 더욱 고맙겠다. 丙子(1936년) 6월 29일 변영만 白.
ⓒ 유성호
'우리나라 한문학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문장대가', '한문고전을 기반으로 서양의 문학과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여 독특한 정신세계를 개척', '식민지 시대에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적 지성', '조선의 천재', '회색 괴짜'….

부평삼변의 맏형 산강재(山康齋) 변영만(卞榮晩)을 표현하는 수식어들이다. 화려한 수식어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특정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것이 아니라 다방면에 학문이 능했기 때문에 수식하는 말도 다양하다. 한마디로 박학다식한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그가 천재성을 발휘해 전문가 반열에 올라선 분야만 어림잡아도 예닐곱 가지가 된다.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의 학문적 천착은 실로 대단하다. 그가 뚜렷한 족적을 남긴 분야에다 호칭을 붙이면 한학자(국학), 문학가, 불교연구가, 법률가, 교육자, 항일운동가 등으로 부를 수 있다. 특히 언어에서 발군의 재능을 보여줬는데 영어와 산스크리트어에도 능했다고 한다.

인적 교류 역시 그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될 듯 하다. 그가 교류했던 지인들 면면을 살펴보면 격동하는 제국의 근대사를 느낄 수 있다. 이름만대면 알만한 굵직한 인물들이 변영만과 어깨를 겯고 우리 곁을 지나간다. 신채호, 정인보, 한용운, 안창호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이자 지성인들과 깊은 교우를 나눴다고 전해진다.

단재 신채호와 학문적 교류...법관으로 사회 진출

고종 26년인 1889년 6월 23일 경기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신채호와 같이 수학하며 교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만열 전 국사편판위원장이 정리한 신채호에 대한 행적을 살펴보면 "19세 때 당시 국립대학격인 성균관에 입학하는데, 그곳에서 변영만과 같은 벗들을 사귀면서 동료들 사이에서 학문으로 곧 두각을 나타내었고, 성균관장이던 이종원(李鍾元)으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신채호의 성균관 수학을 기준하면 변영만은 10대 초반에 그곳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15세가 되던 해 이철자씨와 결혼해 1남 1녀를 둔다. 상수와 정희다. 정희가 손위다. 필자의 할머니다. 출가해 4형제를 뒀다. 상수는 1남 7녀의 자손을 둔다. 부평 향제에 맏손자 호달씨가 살고 있다.

▲ 중국에서 변영만이 벌인 배일(排日)활동을 보고한 총독부 문서.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변영만은 1905년에 법관양성소에 입학했는데, 나이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칙령에 의해 당시 법관양성소 생도가 되기 위해서는 20세 이상 된 자여야 했다. 기준보다 어린 소년 영만은 나이를 무려 10살이나 '뻥튀기'를 하고 시험에 합격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6개월 코스인 법관양성소를 그해 12월 8등으로 졸업한다.

1907년 보성전문학교 법률과에 입학해 이듬해 졸업한 그는 그해 12월 판사로 임용된다. 첫 임지는 목포구재판소 판사. 이후 1908년 사법권이 일본에 넘어가려고 하자 더 이상 판사 노릇을 할 수 없다며 법복을 벗고 변호사로 나선다.

그는 1910년 2월 한성변호사회로부터 매우 중요한 결정사항을 통보받는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인 안중근 의사의 변호사(추가)로 결정됐다는 것이다. 이 결정은 그의 애국심의 외적평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안 의사 측은 평양변호사 출신 안병찬(安秉瓚)에게 변호를 맡겼다.

이후 1912년 중국으로 넘어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변호사로서 기자생활을 했다. 1914년 중국공사가 총독부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기밀문건을 보면 '중국인이 경영하는 신문사에 입사해 배일(排日) 기사를 게재하고 각지의 불평조선인(항일인사)에게 배포하고 있다'고 그의 항일 활동을 그리고 있다.

안중근 변호사로 결정됐지만 일본 불허로 변호 못해

1918년에 중국에서 돌아와 1920년대 <동명>, 1930년대 <동아일보> 등에 글을 남겼다. 당시 그의 활동에 대해 알 수 있는 재미난 기사가 있다. 김동환에 의해 1929년 창간된 대중잡지 <삼천리> 제5권 제3호(1933.3월 발행)에 안재좌(安在左)가 쓴 '新舊文人 언파레트...續'이란 평론을 보면 변영만에 대해 '키가 간신히 왜소를 면하였으나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OO씨는 얼굴이 허여멀건 분이나 변씨는 그렇지 못한 분이었다'고 외관을 평한 부분이 나온다.

또 문장(글)에 관해서는 '변씨는 수필, 잡문, 최근에는 소설까지 쓰시는데, 이렇다 할 작품은 하나도 없으나 만문(수필) 같은 것을 보면 함미(鹹味)가 지나서 산미(酸味)가 있는 것이다. 너무나 외국 문학에 박학이신 것은 수필, 잡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동시에 함미가 지나서 산미가 있는 것이 많은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평이다. 왜냐면 안재좌는 글 말미에 변영만을 직접 만나 이야기 한 적이 없고 먼발치에서만 본적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 안씨는 변영만의 문학세계를 평가할만한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격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내용도 있다. 변영만은 성격 중 최대 결함과 그것을 고치기 위한 노력에 대해 말해달라는 한 잡지사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의 성격 중에는 악인에 대하여 표면상으로는 준열(峻烈)히 공격을 가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그다지 미워할 줄 모르는 결점이 있오. 그러나 그대로 가지고 지나려 하오"

이같은 그의 생각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오래전 지냈던 판사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장, 서울대 중문과 강사,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명륜전문학교교장, 성균관대교수를 거쳐 1952년에는 사법부 법전편찬위원을 지냈다. 종교는 무교, 취미는 등산이고 즐기는 일은 독서 후 감상이라고 했다. 1954년 눈을 감았다.

덧붙이는 글 | 당분간 산강재 변영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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