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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한은희
▲ 라이진산 등 설산을 넘은 홍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놓은 기념탑.

길은 계속됐다. 하지만 방향은 달랐다.

1935년 주더·마오쩌둥·저우언라이·장원톈은 쓰촨·샨시·깐수에 소비에트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장궈다오와 천창하오는 칭하이·신장으로 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장궈다오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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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진 두 부대

그 해 6월 27일 홍군 선봉대는 대설산을 넘은 후 타구산과 창판산, 창더산을 넘었다. 7월 10일에는 1·4방면군이 마오얼까이를 넘었다. 그러는 사이에 장궈다오는 인사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이 때 홍군의 기착점이 될 샨베이 지역에서는 류즈두안이 이끄는 홍군이 주요 거점을 거의 장악하는 전과를 세운다. 홍군 5천명과 유격대 4천명으로 면적 30만㎦, 인구 90만의 샨베이 지역을 장악했다. 이런 소식은 장정 중인 홍군의 마음을 안심시킬 수밖에 없었다.

8월 1일 홍25군이 샨시와 깐수의 경계인 펑셴 쓰웅스푸에서 4개여단을 섬멸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최종 기착지인 샨베이에 들어섰다.

▲ 늪으로 된 깐수성 남부 초지에서 홍군은 적지 않은 이가 희생됐다.
8월 5일에서 6일까지 마오얼까이 부근 사워에서 마오쩌둥의 주도로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합의점은 찾기 힘들었다. 쓰촨 지역을 이끌던 장궈다오와 쉬샹첸은 쓰촨에 남아서 작전을 하자는 쪽이었고, 마오 등은 샨베이 쪽을 지명했다. 사실 항일운동이나 베이징을 장악하자는 측면에서 쓰촨은 너무 멀었다.

결국 진행 방향의 차이도 있지만 갑자기 늘어난 민지앙의 물줄기로 인해 두 부대는 각자의 갈 길을 찾았다.

역사는 홍군의 손을 들어주었다

8월 21일 우로군의 선두부대가 마오얼카이를 출발해 초지를 향했다. 이 곳에서 후종난이 이끄는 국민당군과 맞붙었지만 홍군은 무사히 초지를 넘어 반요우, 파시, 아시 등을 거쳐서 샨베이로 향했다.

9월에 마오 등은 장궈도에게 자신들의 길을 따르라고 전신을 쳤다. 하지만 민지앙의 물이 불어나면서 장궈도 군의 동행이 어려워졌고, 장궈다오는 마오의 길을 거부했다.

또 장궈다오는 자신이 이끌던 원부대를 다시 남하시키기 위해 비밀 전신을 쳤다. 하지만 이 전신은 마오의 손에 들어왔고, 파시에서 열린 그날 회의에서 마오는 급히 1·3군단을 이끌고 북상하기로 결정했다.

9월 12일 장궈다오는 홍1방면군에 후회할 것이라는 전신을 쳤다. 15일에는 아빠에서 확대회의을 열어서 자기의 방침을 굳건히 했다. 9월 26일에는 장쩨스가 직접 '서북' 점령작전을 기획했고, 장쉐량이 지휘했다.

10월 5일 장궈다오는 마어캉셴에서 회의를 열어, 자신의 공산당 지도부를 만들었다. 10월 19일 홍군은 우치전에 이르렀다. 총 11개성, 2만5천리 장정의 끝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이 곳에 합류하기까지는 1년이 더 걸렸다.

홍콩으로 피신한 패장

▲ 뒤늦게 만난 허롱(왼쪽)과 린삐시(중간).
▲ 장정군이 도착할 당시의 우치전.
1935년 11월 1일부터 장궈다오의 홍4방면군은 바오싱을 시작으로 쓰촨 서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해 2월부터 전세는 달라졌다. 국민당군은 전력을 보강해 장궈다오의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허를 건너 산시로 가자는 전략을 수립했다.

허롱 등이 이끌던 군대도 앞 길을 걸어서 왔다. 1936년 7월 2일 홍2방면군과 4방면군이 간즈에서 만났다. 여기에는 장궈다오에게 잡히다시피했던 주더를 비롯해 린삐시·허롱·류보청 등이 만나서 마오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장궈다오는 밀려오는 국민당군을 피해 샨베이로 향하다가 황허 도하 작전에서 거의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봤다. 11월 하순부터 12월 상순까지 진행된 황허 유역 전투에서 홍군은 1만5천여명을 잃었다. 12월 2일 주더·장궈다오 등이 홍군 사령부가 있는 바오안에 도착했다.

1937년 벽초 중앙회의에서 장궈다오는 견책을 받았다. 장궈다오는 1938년에는 한코우로 가서 국민당에 입당했는데, 국민당이 패망한 후 홍콩으로 피신해 살았다.

홍군의 초기 근거지는 바오안이었다. 그런데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양후청이 시안을 방문한 장쩨스를 감금하고, 내전이 아닌 항일전을 하자고 주창했다.

사건을 파악한 저우언라이는 급히 시안으로 건너가 장쩨스를 살려주는 대신 공산당의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역사는 서서히 홍군의 편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에 못지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 바로 에드가 스노우 등 외국 기자와 문인이 방문해 홍군을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좌와 우가 정확한 구분이 없었기에 세계는 홍군의 움직임에 경이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국제적인 위상도 높아졌다.

덩샤오핑은 한국인 덕분에 살았다?

▲ 현재 옌안의 모습. 가운데 멀리 보이는 게 옌안의 상징인 바오타(寶塔)다.
ⓒ 조창완
▲ 옌안 항일군정대학. 홍군 전사 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도 여기서 공부했다.
ⓒ 조창완
장정의 주도자 중에 하나인 '무정'을 비롯해 한국 사람들도 하나 둘 옌안에 모여들었다. 1941년 7월에는 조선의용군이 건립되어, 무정·박효삼·박일우가 책임졌다.

1년 뒤에는 조선독립동맹이 건립됨과 동시에 조선혁명군정학교도 만들어졌다. 연변조선족 자치구 설립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주덕해에 따르면 1943년 말 조선혁명군정학교의 학생수가 200명이었다고 하니 옌안에 있었을 우리 투사들의 수가 얼마일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중에는 중국 현대 작곡가에 거두인 광주사람 정율성도 있는데, 그는 조선의용군 행진곡 '조국 향해 앞으로'를 작사작곡하기도 한다.

조선의용군은 다양한 전투를 치르며 많은 전과를 낸다. 그중에는 1942년 2월 타이항산 마전 전투도 빼놓을 수 없다.

팔로군과 연합한 조선의용군은 일본군 4만명에 포위된 부대의 활로를 뚫기위해 선두에 선다. 이 과정에서 윤세주·진광화 등 의용군의 지도자를 비롯해 많은 의용대가 희생된다. 이들이 없었다면 팔로군 지휘부는 궤멸될 가능성이 높았는데, 그 안에는 덩샤오핑과 펑더화이 등 지도부가 있었다.

혼돈의 역사를 견뎌낸 장정의 힘

▲ 옌안 양지아링 회의지
ⓒ 조창완
사실 장정은 단순한 여정이 아니다. 장정의 여정이 없었다면 훗날 중국을 장악한 공산당이 티벳이나 신장 등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이들 소수민족들에게는 한족으로부터 역사적 굴레를 벗지 못하는 계기가 된 측면도 있다.

사실 국민당과의 내전 승리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은 적지 않은 내홍을 겪었다. 대약진의 좌절과 문화대혁명 등의 혼돈을 이겨낸 힘의 상당 부분에도 장정의 힘이 적지 않다. 장정은 코민테른에 끌려가던 중국 공산당이 스스로 설 수 있는 계기가 된 중요한 사건이다.

때문에 지금도 다양한 단체가 장정길을 따라가는 다양한 행사를 벌인다. 장정의 정신을 그들은 '공생'으로 봤다. 또한 민심을 얻는 것이었다. 때문에 홍군은 장정 도중에 철저하게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일반인들을 접했다.

초원을 건널 때는 양 한 마리에 한 명의 목숨을 바칠 만큼 처절했지만 식량을 약탈하지 않았다. 때문에 장족 지역을 건널 때 주인 허락없이 먹은 순무로 인해 마오가 "이것이 우리가 외국에 진 유일한 빚입니다, 언젠가는 만족과 티벳인들에게 가져오게 했던 식량의 대가를 지불할 것입니다"라고 에드가 스노우에게 말할 수 있었던 곳이다. 그는 세련된 방식으로 '민심이 천심'이라는 개념을 실천했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에서 이 개념이 여전히 유효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하고 이제 4반세기가 지났다. 1위안에서 100위안짜리까지 모든 화폐에 마오의 사진을 넣고 혁명정신을 말하지만 정작 돈은 혁명정신을 말해주지 않는 21세기에, 장정은 어떤 의미일까.

▲ 산과 구릉의 연속인 샨베이 고원의 전형적인 모습. <아리랑>의 김산도 이런 곳에서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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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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