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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덕여관 전경
ⓒ 안서순
충남 예산 수덕사 오르는 언덕배기 개울을 가로지른 돌다리 건너에 요즘에는 산간마을에서도 찾아볼 길 없는 커다란 초가집 한 채가 함초롬히 서 있다.

수덕여관이다.

그런데 그 집을 마주 한 순간 "어"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사람들로 들끓던 집은 적막한 기운만 감돌고 댓돌 위까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집은 비어 있었다. 그것도 한참은 지난 듯 했다. 수덕여관이 왜 이럴까. 70년은 확실히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그 집이.

한때 절집 아래 유일한 여관이기도 했던 그 집은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이 한때 머물면서 집 곁 두 바위에 새긴 추상적인 암각화로도 유명하고, 1939년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1896-1946)이 스님이 되기 위해 수덕사를 찾아왔다가 당시 조실이던 만공 스님으로부터 "중노릇할 사람이 아니다"며 한마디로 거절당한 뒤 5년 동안 기거하면서 그림을 그리며 소일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고암이 수덕여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선배화가인 나혜석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부터다.

1944년 나혜석이 그 집을 떠나자 고암이 사들인 다음 부인인 박귀희(2001년 사망)씨에게 운영을 맡기고 머물면서 주변 풍광을 화폭에 옮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집 옆의 두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는 고암이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다음인 1969년에 몸을 추스르기 위해 두 달 정도 머물 때 새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수덕여관과 고암의 인연은 고암이 1958년 프랑스로 떠나면서 끝나게 된다. 이후 수덕여관은 박귀희씨가 2001년까지 식당을 겸한 여관으로 운영해 왔다.

그 집은 봄과 가을 수학여행철에는 초중고 학생들로, 여름철에는 송림 속 피서객들로, 겨울철에는 불자들과 여행객들로 붐볐다.

▲ 시도 때도 없이 밥짓던 연기가 오르던 굴뚝에는 담쟁이만 가득하다.
ⓒ 안서순
그랬던 집이었는데 폐가가 따로 있지 않았다. 인적이 끊긴 여관은 적막강산 속에 생기를 잃은 채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반짝거리던 마루에는 먼지와 송화가루가 뒤범벅이 된 채 쥐똥과 고양이 발자국이 어지럽고 여객들을 위해 종일 밥 짓는 연기가 끊이지 않던 높다란 굴뚝은 담쟁이 넝쿨만 무성하다.

벽은 곳곳에 주먹이 드나들 정도로 틈이 벌어지고 자물쇠로 잠가놓은 방문은 뜯겨지고 유리창문은 성한 게 없이 부서지고 깨어져 나갔다. 방마다에는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이부자리가 어지럽게 널려져 있다.

지난 18일 현장학습을 위해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은 한남희(43·서산초등학교) 교사는 "중학생 시절 이곳으로 수학여행을 와서 누마루가 있는 방에서 잔 적이 있는데 오늘 와서 보니 폐허가 되어 아쉬운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절집(수덕사)에 왔다가 이곳에 들렀다는 유도화(78·충남 서산시 운산면 가좌리) 할머니는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닐 때 쌀을 가지고 원족을 와서 묵어간 적이 있는데 다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니 맘이 안 좋다"며 오래전 일을 떠올리며 덧없어 했다.

현재 수덕여관은 예산군이 도지정 기념물(103호)로 지정해 해마다 초가지붕을 잇고 일주일에 한 차례씩 집 주변 등에 청소를 하는 등 보살피고 있으나 주인 잃은 표시가 너무도 완연하다.

벽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방문과 창문은 떨어져 나가거나 깨어진 채 발길에 채이고 방 안에는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이부자리가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여관 뒤 곁에는 버려진 트럭과 온갖 쓰레기가 나뒹구는 가운데 여관에서 가져온 듯한 더러워진 이불을 덮고 있던 노숙자가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기자에게 "내 집인데 당신 누구냐"며 시비를 걸어왔다.

▲ 여관 뒷쪽에 버려진 트럭과, 이불을 깔고 앉아있는 노숙자
ⓒ 안서순
이 집은 노숙자와 걸인들의 숙소로 이용되고 때로는 불량 청소년들의 탈선장소로 쓰이는 듯싶었다.

흉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그랬을까. 돌다리를 건너서 수덕여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시퍼렇게 칠한 커다란 두 쪽의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이제 수덕여관은 세인들로부터 멀어져 간다. 지금 집은 고암의 장조카인 이모(경기도 수원시)씨의 소유로 되어 있고 집터주인은 수덕사여서 양측의 이해관계가 얽혀 보존과 관리에 어려움이 크다고 한다.

그러나 이대로 방치할 경우 수덕여관은 나이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대책이 나와야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전의 수덕여관을 보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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