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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호 암 윗면
ⓒ 익산고적연구회

▲ 1호 암 우측면
ⓒ 익산고적연구회
전북 익산시 낭산면 호암리 범산에서 전국 최초로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암각문자 5기를 발견,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익산고적연구회(회장 진형섭)는 지난 17일 암각문자를 언론에 공개해 주목을 받았고, 19일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부분에 대해 고조선 시대의 산목문자를 처음으로 언급했다.

특히 이번 발굴은 순수 민간단체인 익산고적연구회의 발굴로 문자연구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학술적 사업으로 금석학 연구에 새로운 좌표를 세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 익산 호암리 범산의 암각문자 유적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낮은 구릉의 조그마한 야산이다.
ⓒ 모형숙
호랑이 상이 지명유래의 결정적 단서

익산 호암리 범산의 암각문자 유적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익산시 낭산면 호암리 산 592, 593-1, 593-2번지 일대로 낮은 구릉의 조그마한 야산이다.

범산에는 70∼80년 생의 조선 소나무가 운집해 있으며 분기와 약간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암각문자 유적이 분포한 이곳의 지형은 남으로 미륵산이 보이고 서북쪽에는 직선거리 13㎞ 정도에 금강이 흐르고 있다. 범산 주위의 대부분의 논을 파면 뻘 층을 이루고 있어 강물이 유입된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번 암각문자는 고조선 시대의 산목문자를 근거로 작성되어 있으며 조각수법에서도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는 게 이번 발굴의 관계자인 김창고 책임 조사원의 설명이다.

▲ 고조선 시대의 산목문자로 김창고씨에 의하면 수를 셀 때 나무토막을 형상화한 숫자를 표기한 문자로 보고 있다.
ⓒ 익산고적연구회
이번 조사 과정 중 50년 전,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새겨 놓았다는 반론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김창고씨는 "여기에 새겨진 글씨가 전부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추정하는 것은 아니라며 인위적으로 새겨진 문자도 있다"고 밝혔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청동기시대 암각은 돌로 새겨 둥글고 부드러운 조각수법을 나타내는 대신 인위적으로 새겨진 글씨는 정으로 깎아놓은 것처럼 날카로움이 전해진다"고 덧붙였다.

특히 가장 중요한 부분이 산목문자로 김창고씨에 의하면 "산목문자는 수를 셀 때 나무토막을 형상화한 숫자를 표기한 문자로 1부터 10까지를 나타내고 있고 이 문자는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김창고씨가 가리키고 있는 글자는 산목문자로 추정, 8자이며 문자 위에 점이 찍혀 있고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반면 옆의 문자는 조각수법에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모방 해 새겨 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 모형숙
아직까지는 산목문자의 6이 삐침으로 인해 그 의미를 해석중에 있지만 산목문자를 근거로 작성된 문자라고 추정했다. 또한 이곳이 예전부터 호암리의 범바위산이라고 불리웠는데, 이곳에 새겨진 호랑이상이 지명 유래의 밑바탕이 되는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기초자료는 익산 일원의 마한문화와 관련

이번 발굴은 지난해 9월 익산고적연구회의 회원인 강중근씨가 지표 상에 있는 암각문자 4기를 발견하고 3회에 걸쳐 답사를 실시한 후 그 해 11월 27일 김창고씨를 비롯한 회원들이 본격적으로 답사를 실시, 12월 20일부터 2005년 2월 20일까지를 조사 및 보고서 작성의 기간으로 정하고 현재 조사 중이다.

▲ 인위적으로 새겨졌을 가능성이 크고 깎은 듯이 날카롭다(좌)/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 추정되며 굴곡이 둥글고 부드럽다(우)
ⓒ 모형숙
김창고씨는 "범산의 암각문자 유적은 千, 明, 金, 世 등 몇 자를 제외하면 해독할 수 없는 여러 형태의 문자로 음각 되어 있으나 이러한 암각문자에 대한 선행 연구는 국내외 어느 곳에서도 전무한 상태여서 비교할 수 없었고 암각문자만 보고 연대를 측정하기란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또 "지표상에 시대 편년을 밝힐 수 있는 유물을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격을 규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취약점을 보완하는 관점에서 청동기 문화권에 접근하고 익산 일원의 마한문화와 관련지어 기초자료를 얻었다"고 덧붙였다.

조사방법으로는 노출된 암각문자가 새겨진 바위만을 선정해 주변의 잡목을 제거하고 암각문자 우위의 이끼를 제거해 전체를 탁본하려 했으나 유적훼손과 동절기인 관계로 탁본 대신 사진촬영을 했다.

▲ 호암리 암석문자로 추정되는 유적의 위치
ⓒ 익산고적연구회
금강유역일대의 청동기시대 유적 자료 될 듯

어휘수가 넉넉하지 않았던 청동기 시대의 문자는 주술적이고 장식성이 강한 문자로 기록되어 일부 서구학자는 '마술적 문자'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이집트 상형문자에 있는 '성스러운 문자'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암각화는 인류문화를 시작하는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는 유적이지만 호암리의 유적은 단순 부호나 기호 과정을 거쳐 문자로 가는 길목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이유로 호암리 암각문자는 상형문자나 중국의 갑골문자, 청동기에 나타나는 도철문양보다는 회화적인 것이 거의 없는 문자의 구조적인 문자이기에 발전된 문자로 보고 있다.

김창고씨는 "이 유적의 성격으로는 신과 인간 사이를 잇고 싶어했던 이곳 세력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판단되며 청동기시대 유적과 관계되는 집단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금강의 내륙과 유역일대의 종합적인 청동기시대 유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 3호 암 좌측면
ⓒ 모형숙


총 5기로 구성… 이 중 호랑이 문양도 발견

▲ 가장 뒤늦게 발견한 5호 암으로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다.

1호 암에 나타난 문자는 천(千), 금(金), 정(丁), 목(木)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고 좌측면에는 일천 천(千)자가 새겨져 있다.

암석의 재료는 화강암으로 풍화작용에 의한 마모가 있으며 문자의 형태는 식별할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오늘날 문자와는 차이가 있어 해독이 어렵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2호 암은 부호 ‘·과 ≡, ↓’가 조합하여 만들어진 문자와‘천(千)과 전(田)’등이며 3호 암에는 상(上), 정(正), 명(明)의 글자와 피라미드 모양이나 사각뿔처럼 생긴 바위에 빼곡이 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중앙에는 이곳 암각문자 중 가장 크고 깊이 새겨진 글자가 남쪽을 향하고 있다.

4호 암에서 나타난 암각문자는 十자와 ≠, 州, 世, 之, 井, 正 등이 새겨져 있으며 바를 정(正)자는 정벌 정의 옛글자로 쓰였던 예가 있어 정벌을 의미하는 글자가 아닌가 하며 바를 정자 위의 점들은 종족의 전진을 의미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또한 井자는 9개로 나눠진 밭으로 가운데 부분은 백성들이 경작해 얻은 곡식을 임금님께 받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뒤늦게 발견된 5호 암에서는 문자가 아닌 호랑이 얼굴의 눈과 코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문양은 이 산을 범산이라 불리게 된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로 입안은 연푸른 이끼가 있고 눈과 코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한 눈에 호랑이의 얼굴임을 알 수 있다.

김창고씨는 "호랑이 바위는 선사인들에게 수호신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며 "간과할 수 없는 부분으로는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과 연관된 단군신화에 호랑이가 등장하고 있고 외래 종교인 불교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삼신각 안에도 호랑이가 있으며 민화에도 호랑이가 널리 그려지고 있다"고 보충 설명했다. / 모형숙

덧붙이는 글 | 익산고적연구회 김창고 책임조사원은 현재 익산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며 논문으로는 「미의 극치를 이룬 금마지역의 와당」, 「왕궁평성의 괴석(정원석)」, 「근대서화가 우운 서정민 연구」, 「무로마치 시대의 조선화가 이수문」, 「고려다완 연구」 등이 있다.

* 익산벼룩시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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