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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
 <나는 가수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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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 오후 5시 20분 MBC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가 방영되고 나면 관련 뉴스가 포털을 도배한다. 시청률은 KBS <1박2일>과 나름 경쟁을 하고, <나가수>에 출연한 가수들의 음원판매율은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말 그대로 '대박'이다.

<나가수> 예찬론자들은 "십대 아이돌의 댄스 음악만 난무하는 공중파에서 진짜 가창력 있는 가수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또한 "그동안 대중음악으로부터 소외돼 있던 대중이 평가의 주체가 됐다"고 의미를 둔다.

훌륭한 가수들의 무대 <나가수>, 나는 불편하다

그렇다. <나가수>에 출연해 일약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임재범의 가창력은 한국 록이 결코 변방이 아님을 증명한다. 이소라는 어떤가. 그의 음악적 진화는 한국 대중음악 이를 수 있는 '경지'를 보여준다. 김범수, 윤도현, BMK, 박정현 등도 '나는 가수다'라고 외치기 전에 이미 한국 대중음악이 자랑하는 훌륭한 가수였다.

이렇게 훌륭한 가수들이 한 무대에 오르다니…. 멋진 일이다. 그런데 나는 불편하다.

<나가수>가 불편한 첫 번째 이유는 잔혹한 '경쟁 구조'를 아무렇지 않게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싫든 좋든 우리는 눈만 뜨면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절한 자본주의 구조 속에 살고 있다. 학생들도, 동네 슈퍼도, 중소기업도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면 점멸해가는 슬픈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살인적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제도와 시장논리, 질서를 바로잡고자 성찰하고 싸운다.

안타깝게도 <나가수>는 잔혹한 신자유주의 시장논리에서 한 치도 비켜 서 있지 않다. 누군가를 제쳐야 그 다음을 기약하며 살아남는다. 어디서 많이 본 그림 아닌가. 절친한 동무를 제쳐야 이른바 명문대학에 갈 수 있다. 갖가지 '스펙'으로 직장동료를 제쳐야 내 밥줄을 유지할 수 있다. 이 무시무시한 서바이벌 게임이 브라운관으로 옮겨 와있다. 과도한 경쟁구조가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힐난하던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이를 즐기고 있다면, 무서운 일이다.

<나가수>에 출연한 가수들은 '상업 가수'들이기 때문에 경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얘기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 그들은 가수로 데뷔하면서부터 숱한 경쟁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그래서 되묻고 싶다. 그 경쟁의 내용이 오로지 '순위'여야 하나? 아울러 그 경쟁의 대상이 무조건 '나 말고 너'여야 하나? <나가수>가 불편한 두 번째 이유는 이처럼 대중가수들을 은연중 '딴따라'로 깔보는 잠재된 무의식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설가 조정래, 황석영, 이문열, 한승원, 신경숙 등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누가 더 소설 잘 쓰는지 겨뤄보라고 할 수 있나. 또 그들의 작품에 등수를 매겨 "아무개는 다음 주 경연에 참가하지 마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나.

장담컨대 결코 이들에겐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작가 스스로 이런 구도 자체를 비웃고 말겠지만. 대중예술도 예술이다. 대중예술의 속성상 시장에서의 유통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만 대중예술도 소비와 함께 향유되어야할 예술임에는 분명하다.

장르·창법·음색 다른 가수들... 순위 매기기가 가능할까? 

<나는 가수다>에 출연중인 윤도현밴드
 <나는 가수다>에 출연중인 윤도현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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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수>가 한국이 자랑하는 대중음악인들의 음악적 진화를 점검하고 즐기는 향유의 마당이었어도 이처럼 시청률이 높을까? 출근을 앞둔 일요일 오후, 느긋하게 가족끼리 앉아서 점수와 등수 매기지 않고 음악 자체를 즐기면 안 될까. 경쟁구도가 없으면 재미없다고? 경쟁력이 없으니 정리해고 했다는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이러다보니 그 내로라하는 실력을 가진 가수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소리 지르기'와 '감성에 호소하기'에 급급해진다. <나가수>가 보기 불편한 세 번째 이유다. 높은 음역을 소화하는 가수만이 노래 잘하는 가수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가창력이 좋은 가수 = 높은 음역을 잘 소화하는 가수'로 규정되어지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은 지금까지는 '조용필 이전'과 '조용필 이후'로 구분할 수밖에 없다"는 평을 듣는 조용필. 그가 얼마 전 이런 얘길 했다. "프로가수는 노래를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라, 대중에게 사랑·그리움·슬픔 같은 정서를 목소리를 통해 얼마나 잘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사랑·그리움·슬픔 같은 정서'가 높은 음역에서만 표현될 수 있을까. 오히려 슬픔이 승화되어지는 과정은 안으로 깊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가슴에서 웅얼거리듯' 노래하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보는 전문가들도 많다. 가수마다 장르가 다르고, 창법이 다르고, 음색이 다르기 때문에 정서를 승화하는 방식도 그만큼 다르다. 이는 대중의 투표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런데도 이런 프로그램이 상업 케이블 방송이 아닌 '공영방송'이 제작해 '공중파'를 타고 있다. <나가수>가 보기 불편한 네 번째 이유다. 새내기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도 아니고 이미 어느 경지에 이른 대중가수들을 모아놓고 "너 노래해봐, 방청객 투표도 있어!"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방송사의 횡포다.

'이미 가수'인 가수의 정체성은 투표로 '입증'되어져야 하는 것인가. 정체성은 '설명'하면 될 뿐이지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입증을 요구하는 순간 폭력이 될 수 있다. 가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노래로 자신과 세계를 설명하면 될 뿐이다. 가창력을 검증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세계를 노래로 풀어 이야기하면 된다. 그런데 공영방송이 대중을 팔아 입증을 강요하고 있다. 그것도 가장 질 나쁜 경쟁구도를 설정해놓고 말이다.

일상이 경쟁인데... 노래도 '손에 땀을 쥐고' 들어야 하나

가수 임재범.
 가수 임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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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이 공영방송이 벌인 판에 끼지 못한 이들은 아예 가수도 아닌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나가수>가 불편한 다섯 번째 이유다. 대중음악에 크게 관심 없었던 이들은 <나가수>를 통해 '임재범'이라는 가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또 '이소라'가 사회나 보는 줄 알았지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지 처음 알았다고도 한다.

바야흐로 아이돌 그룹과 걸 그룹만 존재하던 한국 대중음악 판에 이제 <나가수>에 출연한 가수만 '진짜 가수'인 시대가 왔다. 호프집을 가도, 커피 전문점을 가도, 피자집 삼촌의 오토바이 스피커에서도 <나가수>의 노래만 나온다. 공영방송의 전파가 가진 강력한 상업적 힘은 음반과 음원, 공연티켓의 '대박'으로 이어지고 있다. 상업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가수들은 굴비 엮이듯 <나가수>에 점지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나가수>에 출연 못한 가수들은 졸지에 '실력 없는 가수?'라는 자기의문과 대중의 의혹을 받는 처지가 됐다. 방송출연 자체가 힘들었어도 '실력 향상'으로 버텼던 많은 독립 밴드와 가수들은 느닷없이 닥친 '나가수 쓰나미'가 어리둥절할 뿐이다.

숨 쉬는 것도 경쟁이라는 시대에, 쌍둥이도 서로 경쟁한다는 시대에 '손에 땀을 쥐지 않고' 편하게 음악을 들으며 위무 받아선 안 되는 것일까.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가장 친근했던 노래마저 실력과 경쟁력을 겨루는 무기가 되어야 할까.

불편한 마음, 어떤 노래로 달래볼까? '9와 숫자들'의 <말해주세요>는 21세기의 도시서정을 80년대 리듬으로 복고시킬 것이다. 한국 현대 댄스음악의 시초랄 수 있는 김완선의 <리듬 속의 그 춤>은 어떨까. 그 노랠 들으면 근대 댄스음악의 막차인 나미의 <빙글빙글>을 들을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모든 것들의 클래식인 김정미의 <간다고 하지 마오>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들 모두, 훌륭한 가수다. 


태그:#나가수, #임재범, #이소라, #신자유주의,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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