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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상담 전화번호가 적힌 현수막이 정문에 걸려 있다.
▲ 청주 모중학교 교문 학교폭력 상담 전화번호가 적힌 현수막이 정문에 걸려 있다.
ⓒ 강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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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요. 내가 왜 한순간에 '일진'이 됐죠? 나는 정말 일진이 아니에요. 너무 억울해서 울고 싶어요. 그런데 울면 인정하는 꼴이잖아요. 기자님, 진실은 밝혀지는 거죠? 그렇죠?"

16살 B군은 기자에게 하소연했다. "나는 일진이 아니다"고 목소리도 높였다. 도대체, B군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제의 사건은 지난 9일 벌어졌다. 그날 B군은 평소처럼 학교에 갔다. 하지만 1교시가 시작되기도 전에 교장실 옆 회의실로 불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친구 15명이 호출돼 있었다. 경찰 두 명도 함께 있었다. 분위기는 험악하지 않았지만, 이날 경찰은 B군을 포함한 학생 16명에게 '일진 다심서'를 받아갔다.

"한순간에 '일진'... 억울해 울고 싶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13일, 청주 청남경찰서는 "중학교 일진회를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성인 조직폭력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런 일진이었다. 경찰 발표는 거의 모든 언론에 보도됐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역시 '청주 일진'이 평정했다. 결국 B군은 경찰을 만난 지 나흘 만에 '후배들 삥 뜯는' 일진회 소속 불량학생이 됐다.

경찰 발표 이틀 뒤 15일 오후, 해당 중학교를 찾았다. 학생들이 귀가한 오후, 교장실에서 학교측 관계자, 경찰관 등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미 경찰의 과잉수사 논란이 일고 있었다.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교장이 아닌 경찰이 기자 앞으로 나섰다.

"기자입니까? 취재 거부합니다. 거부합니다!"

담당 경찰관은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완강했다. 기자는 경찰관이 떠난 뒤에야 학교 관계자를 만날 수 있었다. 교장, 학교 운영위원장, 교무부장 등이 앞다퉈 입을 열었다. 그들은 "경찰 발표는 사실이 아니니, 우리 이야기를 잘 들어달라"고 했다. 한마디로, 경찰이 일진을 '조작'했다는 주장이다.

학생에 이어 교사, 교장, 학부모까지 '조작'을 주장하는 상황. 이 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도대체 경찰은 이 학교에서 어떤 일을 진행한 것일까. 시간을 한달 뒤로 돌려보자.

문제의 사건은 이 학교에 재학중인 A군이 날치기 사건으로 청주 청남경찰서에 입건되면서부터 시작됐다. 경찰은 A군을 수사하던 중 지난달 18일 A군이 청주시내 한 PC방에서 같은 학교 후배에게 돈을 빼앗는 등 지속적으로 후배를 때리고 금품을 갈취한 사실을 알게 됐다. 이어 경찰은 "지난해 신학기 초 일진 16명을 모아 폭력 서클을 만들었다는  A군의 진술을 확보하고 녹화까지"했다.

이를 바탕으로 경찰은 지난 9일 이 학교 교장실을 찾아 "일진회로 의심되는 16명의 명단을 가지고 왔다"며 "우리가 먼저 기초조사를 해야 하니, 아이들을 모아달라"고 말했다. 당시 학생들과 같이 입회했던 생활지도 교사가 그때의 상황을 전했다.

경찰이 '일진 다짐서' 나눠 주며 서명 요구

16일 조현오 경찰청장이 울산 청소년상담센터에서 열린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울산시민과의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16일 조현오 경찰청장이 울산 청소년상담센터에서 열린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울산시민과의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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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요즘 학교폭력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어쩌고 하면서 예방교육 차원의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아이들에게 '다짐서'를 나눠주며, 서명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다짐서의 이름 적는 공간은 비어 있었고, '누구누구는 일진임을 인정합니다, 지금까지 일진으로 활동했고 앞으로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어요."

당시 학생 16명은 "(우리는) 일진이 아닌데 도대체 왜 여기에 서명해야 하나"라고 물었다. 경찰은 "별 것 아니니, 너희들이 정 껄끄럽다면 '일진임을 인정하겠다'는 부분을 지우고 서명하라"고 말했다. 경찰은 누누이 "훈계 차원"이라고 강조했다. 선생님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일이 이상하게 진행됐다. 학교 측 관계자들은 기자에게 말했다.

"도대체 본인도, 담임도 일진이 아니라는데, 어떻게 경찰이 일진을 만듭니까. 이거야말로 조작 아닙니까?"

어쨌든 경찰은 13일 A군이 '짱'이고 나머지 16명으로 일진회를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등이 보도한 경찰의 발표대로라면, 이들은 생일파티 비용으로 후배들에게 금품을 수시로 상납받았고, '상납금' 금액까지 정해 할당하기도 했다. 영락없이 성인 폭력조직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경찰의 일방적 발표 직후 학교측은 경찰서를 찾았다. 교사 등은 "아이들이 일진이라는 증거를 대라"고 요구했다. 경찰은 한 동영상을 보여줬다. 학생들이 돈을 뺏는 등 일진 행위를 하는 동영상이 아니었다. 9일 학교 회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다짐서를 받아내는 과정을 촬영한 것이었다. 경찰이 보여준 동영상도 원본이 아니라, 일부 내용이 편집된 상태였다. 경찰은 구속된 A군의 진술 동영상도 있다고 했지만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경찰이 '일진 다짐서'를 받았다는 16명 학생들의 주장은 어떨까. 일진으로 '지목된' B군을 만났다. B군은 이 사건이 터진 후 교사들과 함께 유치장에 있는 A군을 면회했다. B군은 "어떻게 된 건지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말했다. B군과 교사들에 따르면 면회 때 A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찰이 평소에 어울리거나 친한 애들 이름을 대라고 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친구들 이름을 말했다. 내가 일진회를 만들었으며 짱이라고 말한 사실도 없다. 경찰이 일진 소탕한다고 명단을 요구했으면 내가 친구들 이름을 쉽게 말했겠나."

역시 경찰에 의해 일진으로 몰린 C군의 이야기도 들었다. C군은 다짐서에 서명을 할 때 '나는 일진이 아닙니다'라는 단어를 지우지 않았다. C군은 "별 생각이 없었다"며 "경찰 아저씨들이 기록에도 남지 않는 정말 별 거 아니라고 했는데, 그 말을 믿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학생은 일진 인정, 일부는 거부'라는 식으로 언론보도가 나왔다.

취재 거부한 경찰... "우리는 떳떳하다"

학교를 방문한 후 이번 사건을 발표한 경찰서를 찾았다. 학교폭력 전담반이 꾸려져 있었으나 관계자는 자리에 없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 귀소한 경찰을 만났다. 차아무개 총괄팀장은 "우리는 할 말을 다 했다. 더 이상 할말이 없으니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찰의 태도는 완강했다.

저녁 8시, 발길을 다시 학교로 돌렸다. 16명 학생 부모들이 학교로 모였다. 그들은 "아유, 다 먹고 사는 것도 바쁜데..."라며 옷깃을 여미면서 학교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다. 학부모들은 13일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뒤로 거의 매일 모였다.

"우리는 경찰서장한테 계속 사과를 요구할 거예요. 학생들이 쓴 다짐서도 돌려 받을 거고요. 왜 우리 아이 허위 다짐서가 경찰서에 있어야 하나요. 억울해서 잠도 안 와요. 우리 애들 일진 아니에요. 폭력서클도 아니고요. 일진회 이거, 어른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학부모들은 "아이들은 일진이 아니다, 정말 억울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다음날인 16일 아침 다시 한 번 학교를 찾았다. 삼삼오오 아이들이 무리지어 학교에 등교했다. 학생들에게 직접 '조직적 형태를 갖춘 일진회'의 실체를 물었다.

16일 아침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다.
▲ 청주 모학교 전경 16일 아침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다.
ⓒ 강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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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한 학생은 "무슨 사건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또다른 16살 학생은 "뉴스에 나온 16명이 일진이 맞느냐"는 질문에 "걔네 일진 아니에요. 아는 애들도 몇 명 있는데 정말로 아니라니까요. 애들도 당황해 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15살 학생도 "그 학생들이 일진이면, 이 학교에 다니는 내가 알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 애들이 누군지도 잘 모른다. (경찰 발표는) 사실과 다르다"고 답했다. 전수 설문조사를 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날 아침, "그들은 일진이 맞다"고 주장한 학생은 없었다.

해당 중학교 학생... "걔네 일진 아니다"

취재를 거부한 경찰에 17일 오후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담당 경찰관은 "일진 적발과 관련하여..."라고 시작하는 기자의 질문을 끊으며 "기자님은 일진이 정확히 뭐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되물었다. 경찰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기자들도 그렇고 학교 선생님도 일진의 개념이 안 잡혀 있어요. 그러니까 의사소통이 잘 안되고 오해가 생긴 거죠. 일진이 뭐냐면 '폭행, 갈취, 집단 따돌림 등 학교폭력을 범하였거나...'이 대목에 이번에 구속된 A군이 해당이 되겠죠? 그 다음에, '혹은 (학교 폭력을) 범할 것이 우려되어 또래 학생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느슨한 결속형태'를 아울러서 말하는 겁니다."

기자가 "사회통념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진의 개념은 다르지 않느냐"고 되묻자 경찰은 "원래 일진 개념에 입각해 수사를 진행했고, 그래서 과잉수사 논란에도 억울한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학생-학부모-교사는 "억울하다"고 하는 상황. 경찰만은 당당했다.

한편, 경찰청은 지난달 31일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활동이 우수한 경찰관 40명에게 특진 기회를 주겠다'고 공포했다. 일선 학교에서는 "경찰들이 자신들 실적을 위해 교권을 침해 하는 등 무리한 수사를 하고 있다"는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강혜란 기자는 인턴 15기 기자입니다



태그:#청주, #학교폭력, #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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