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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과 이광재> 책표지
 <안희정과 이광재>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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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과 이광재>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나온 일종의 정치기획이 아닐까 생각했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실장을 지낸 문재인이 최근 <문재인의 운명>을 내고 야권의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는 상황이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 '좌희정 우광재'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정치기획일 거란 의심을 했던 게 지나친 일은 아닐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정치기획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안희정과 이광재의 정치 역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치기획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과 같은 시절을 보낸 486세대의 이야기기도 하다. 뜨거운 가슴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했지만, 이제는 각박한 현실 속에 과거의 숭고한 이상을 잊고 살아가는 486세대의 자화상이다.

<안희정과 이광재>의 2장은 노무현을 만나기 전의 안희정과 이광재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안희정과 이광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1980년대 학생운동에 뛰어든 운동권들 모두의 이야기다.

안희정은 자신이 '박정희 유겐트(히틀러의 소년 친위대 '히틀러유겐트'에 빗댄 말)'였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박정희의 '정희(正熙)' 두 글자를 뒤집어 그에게 '희정(熙正)'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안희정은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꿨다.

그러나 중3 때 야당 성향의 선생님을 만나며 그의 세계관은 변한다. 10·26사태가 일어나자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독재정권의 자기 분열일 뿐'이라고 급우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러시아 혁명사>, <역사란 무엇인가> 등을 읽으며 혁명의 꿈을 키운다. 대학에 간 것도 제대로 운동을 하기 위해서다.

반면 이광재는 의식적으로 학생운동과 거리를 두려 했다. 할아버지 형제의 자식들이 좌익 활동을 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부터 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는 '이과를 가서 공대에 들어간 뒤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자'고 다짐한다.

다른 듯 겹치는 안희정과 이광재의 '인생역정'

그러나 이렇게 다른 길을 걸었던 이광재와 안희정 모두 결국은 학생운동의 핵심 멤버로 성장한다. 이광재는 연세대 대표로 '전국 학생운동의 매뉴얼' <백만학도>를 만들었고, 안희정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과 반미청년회를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렇게 둘의 인생역정은 다른 듯 겹친다.

고문이 두 사람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는 점도 같다. 이광재는 고문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결의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손가락을 자른다.

'나 자신에게 나의 결의를 확인시켜 주고 싶다. 나의 몸에 나의 의지를 각인시켜 놓고 싶다. 이 길만이 내가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안희정과 이광재> 80p

반면 안희정은 고문 앞에 무너진다. 안기부로 끌려간 안희정은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조차 실패하고 결국은 동료들의 이름을 분다. 그 경험은 안희정에게 엄청난 패배감을 안긴다.

희정은 이때 깨달았다. 더 이상 민주화운동의 주역은 될 수 없을 거라는 걸. 그런 자격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이제 거세당한 자에 불과하다는 걸.
- <안희정과 이광재> 89p

이광재는 고문을 이기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고, 안희정은 고문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모두 1980년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들의 상처와 패배는 모두 1980년대와 밀착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1980년대 학생운동 기록의 성격을 띤다. 어떻게 '박정희 유겐트'가, 연좌제 때문에 평범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이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됐는지. 그들이 겪어야 했던 내적 갈등과 고문 때문에 당한 고초가 어떤 것이었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시대의 기록이다.

안희정 충남도지사.
 안희정 충남도지사.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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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록'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로 흐르는 책

그러나 이 책은 노무현을 만나는 순간부터 조금씩 시대의 기록이라는 미덕을 잃어간다. 이 책의 후반부는 486세대 모두의 이야기가 아니라 안희정과 이광재, 그리고 일부 친노 세력만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른 486 정치인들과도 구별되는 특수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안희정과 이광재를 통해 우리의 지난 시대를 되돌아보고 싶었다"는 저자의 의도는 후반부에서 실패하고 있다. 안희정과 이광재가 주인공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들의 정치적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으로만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노선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전반부는 흥미롭게 읽었지만, 이 책의 후반부를 읽으면서는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만으로 안희정과 이광재의 정치적 입장이나 정책의 옳고 그름을 집요하게 따질 생각은 없다. 그러기에는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평가가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두 가지는 짚어두고 싶다.

첫째, 그들의 통합에 대한 인식이다. 안희정과 이광재는 모두 이데올로기와 사상의 좌우를 넘어 통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이광재는 대학 시절부터 '나는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었고, 안희정 역시 "이제 20세기의 모든 갈등과 혼란을 통합해내야만 해"라며 열변을 토한다.

그들이 말하는 통합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 통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들 역시 일종의 통합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과 분열은 불가피하기도 하거니와 모든 갈등과 분열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총독부와 빚은 갈등, 혹은 민주화운동가들이 군사독재정권과 빚은 갈등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삶은 무척이나 어둡고 팍팍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은 정치를 발전시키는 요소다.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갈등은 지양해야 하지만, 갈등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둘은 갈등 자체를 절대악으로 여기는 듯하다.

둘째, 통일에 대한 이광재의 인식이다. 이광재는 '정치의 종착점은 통일의 시대를 여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며 북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풀어놓는다. 중국과 대규모 경제특구를 만들고, 극동과 알래스카, 캐나다를 철길로 연결하여 동북아시아를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자못 원대한 구상이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여기에다 이광재는 화룡점정을 찍고 싶어 했다. 바로 남북한 FTA였다.

"나는 오랫동안 비스마르크에 천착했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등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독일 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 연구를 꽤 했지. 돌파구가 있었더라고. 바로 관세동맹이었지. 그때 깨달았어. 맞다, 해답은 FTA다. 월 10만 원짜리 노동력이 어마어마하게 생기는 거다. 남북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상생의 경제공동체 방안이 바로 이것이다."
- <안희정과 이광재> 320p

남북통일의 경제적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북한 FTA가 올바른 방향인지는 논쟁의 대상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봐야 정확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남북한의 경제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경제력에서 밀리는 북한에게 불리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월 10만 원짜리 노동력이라니. 이쯤되면 '상생의 경제공동체'가 아니라 '착취의 경제공동체'로 보인다.

이광재와 삼성의 관계 등 더 따져보고 싶은 문제가 많지만, 여기서 줄인다. 필자가 제기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필자의 입장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입장에 서든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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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안희정과 이광재를 보고 싶다

저자 박신홍은 에필로그에서 "겉으로 드러난 정치 행로보다는 둘의 인간적인 면모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고 밝힌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정치인' 안희정과 이광재보다는 '인간' 안희정과 이광재를 그리려 시도한다.

그러나 '정치인' 안희정, 이광재와 '인간' 안희정, 이광재는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하가지 예를 들어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목격하고 충남도지사 출마를 결심한 안희정은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와의 오랜 인연을 중시했던 '인간' 안희정인가, 혹은 노무현의 정치 노선을 계승하려는 '정치인' 안희정인가? 어느 쪽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답은 둘 다일 수밖에 없다. 안희정이 충남도지사 출마를 결심했던 것은 '인간' 안희정으로서의 결심인 동시에 '정치인' 안희정으로서의 결심이었다.

따라서 '인간' 안희정과 이광재를 그리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정치 행로와 정치적 견해를 더욱 깊이 있게 파고들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미FTA에 대해,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지방 분권화 추진에 대해, 이라크 파병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견해를 묻고, 그 견해의 기저에 있는 세계관을 따졌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인간' 안희정과 이광재의 면모 또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면모에만 초점을 맞추려 하다 보니 책의 성격이 애매해졌다. 전반부는 안희정과 이광재의 경험을 486세대 전체의 경험으로까지 확장해 시대의 기록으로서의 성격을 띠지만, 후반부는 '정치인' 안희정과 이광재를 정면 돌파하지 않고 빗겨감으로써 감성적으로 이들을 옹호하는 정치기획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필자는 안희정과 이광재가 좋은 '인간'인지에는 별로 관심 없다.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라면 그들이 좋은 '정치인'인 것보다 좋은 '인간'인 게 더 중요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좋은 '정치인'인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는 '정치인' 안희정과 이광재에 대한 책이 나왔으면 한다. 그들의 정치적 공과를 평가하는 일은 아쉽지만 그때까지 미뤄야 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안희정과 이광재> 박신홍 씀, 메디치미디어 펴냄, 2011년 8월/ 336쪽, 14000원



태그:#안희정, #이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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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2024.3 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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