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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해군기지 건설 추진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 강정마을엔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다양한 이들이 함께 폭염의 여름을 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서울에서 왔고, 어떤 이는 프랑스에서 왔고, 또 어떤 이는 날 때부터 강정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평화를 지키겠다며 스스로 강정마을 찾은 이들을 '자발적 평화유배자'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강정마을로 자발적 평화유배를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열두 번째로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대책위원장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대책위원장이 'V'자를 그리며 주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대책위원장이 'V'자를 그리며 주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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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감옥에서 나오던 날, 나는 구럼비 바위에 앉아 시인 이성복의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을 읽고 있었다. 시집의 74번째 시는 '바다가 우는데 우리는'이었는데 그날따라 가슴에 감겼다. 낭송하자면 이런 시다.

"바다가 우는데 우리는 바다의 목구멍을
볼 수가 없구나 薄明(박명)의 해가 도장 찍는
헐어빠진 바다의 몸에 흰 고름 같은 물결,
차갑게 식는 바다의 몸에 고이 다가오는
밤은 결 고운 안동포 壽衣(수의)를 입히는구나."

강정마을 현장취재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껴안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뉴스 한 줄에 쥐구멍에 드는 햇볕 쬐듯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진을 치고 달려오는 해군과 경찰의 거친 몸짓을 보면 다시 절망했다. 저들이 노리는 것은 '질려서 포기하는 것'인 줄 알지만 사람인지라 희망과 절망은 반복되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가 뉴스에 나오면 나올수록 해군과 경찰의 압박은 드세졌다.
여야는 처음으로 국회 예결위원회에 소위원회를 꾸려 강정마을 해군기지사업과 관련한 예산집행 문제를 조사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야당들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대신 '강정마을 평화공원'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해군과 경찰의 대응은 거꾸로 갔다. 해군은 경찰을 앞세워 태풍 피해복구로 여념 없는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공사를 해야 겠다'고 밀고 들어와 주민들을 자극했다. 경찰은 한 술 더 떠 '육지 경찰' 약 600여 명과 물대포 3대, 시위진압장비 10대 등을 배에 싣고 제주도로 들어왔다.  

강정바다는 '결 고운 안동포 수의를' 입는 섬뜩한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저들은 '결 고운 안동포 수의'는 고사하고 시멘트 삼발이를 가득 채워 강정바다를 익사시키려 하고 있다. 강정바다는, 그리고 그 바다의 평화는 무사할 수 있을까. 저들은 미리 짜둔 죽음의 관 같은 20미터가 넘는 케이슨을 강정바다에 쑤셔 박을 날만 학수고대하고 있다.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대책위원장은 그렇게 희망과 절망이 나란히 맞서는 정점의 시간에 마을로 돌아왔다. 무엇이 희망의 징조고, 무엇이 최악의 징후인지 구분하기 힘든 살얼음 국면이었다.

"강정마을이 처음으로 전국 뉴스에 나오기 시작했어요. 4년 만에 처음으로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가 강정마을과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닌 전국적인 문제가 된 것이죠. 이제야 비로소  가느다랗게 희망이 보이고 있어요. 이 싸움은 해군기지 반대싸움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싸움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사람들이 평화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는 시간입니다.

특히 우리 강정마을 주민들에겐 이 싸움의 과정 자체가 상처를 치료해가는 과정이에요. 억압과 수탈을 당하며 모질게 4년 동안 살아오면서 입었던 상처 하나하나를 치료해나가는 과정이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고 상처를 쓰다듬어주면서 치료해가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이 싸움은 결국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위대한 승리의 길입니다."

그는 "해군과 경찰이 보여주는 현실은 최악의 상황"이라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희망을 본다"고 했다. "그들은 최악의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작은 희망의 끈만 놓지 않으면 결국 저들 스스로 무너지게 돼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마을 해군기지대책위원장을 맡아 옥살이까지 마다않고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 일로 귀향한 것은 아니었다. 2008년 10월, 그가 고향 강정마을로 돌아온 것은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여느 시골 노인네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는 서울로 모셔가기만 하면 도망치듯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처음에는 석 달을 버티셨다. 그러나 두 번째 오셨을 땐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고향으로 가시고 말았다. 정담 나눌 이웃 한 명 없는 '서울살이'는 아무리 자식집이더라도 귀양살이와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고향에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지고 만다. 큰 병이 생겨서가 아니었다. 영양실조로 쓰러진 것이었다. 다른 병으로 쓰러졌다면 입원해서 치료하면 될 일이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영양실조로 쓰러지다니…. 그의 마음은 더욱 쓰렸다.

"그저 어머니 곁에 있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강정으로 돌아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강정해군기지 얘기는 들었는데 갈등상황은 전혀 모르고 내려왔지요. 와서 보니 마을이 너무 처참하게 깨져 있어요. 동창들 중에도 찬성하는 친구들과 반대하는 친구들이 모두 죽마고우인데 서로 인사도 안 하드라구요. 만나도 신경전 비슷하게 하고요.

그래서 친구들이 '해군기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처음엔 '아무 입장 없다'고 둘러댔어요. 고향 친구들과 결별하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일주일을 살아보니 인간 세상 아닌 거예요. 그때까진 아직 동창회가 살아있어 동창들과 함께 밥을 먹었는데 즐겁지가 않아요. 이런 식으로 주민들을 이간질시키고, 갈등하게 만들어서 공동체를 완전히 분해시키는 국책사업이라면 어떤 타당성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고권일 위원장이 강정마을 의례회관 담벼락에 그린 벽화. 그는 군대에서 겪은 일로 만화작가가 되었다.
 고권일 위원장이 강정마을 의례회관 담벼락에 그린 벽화. 그는 군대에서 겪은 일로 만화작가가 되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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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마을 의례회관 담벼락이며 창고 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것으로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마을 입장을 담은 성명서나 보도자료 등도 썼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어머니를 돌봤다.

2004년 뜻하지 않은 이혼의 충격으로 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있지만 그는 만화작가다.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1990년, 나이 스물아홉 살에 늦깎이 등단을 했다. 그의 작품은 과학 맹신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이 많다.

<지킬1999>에서는 과학의 이면을 폭로했다. 작품 <단기4444>에서는 인류가 만든 가장 호화스런 첨단 우주선이 태양을 향해 추락해가는 과정에서 인간 군상이 어떻게 추악하게 변모해가는 지를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가 만화작가가 된 것은 순전히 군대시절 겪은 한 사건 때문이다.

"병장 말년 때였죠. 우리 중대가 민간인에게 총기를 탈취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군인 3만6000명을 동원해 범인들을 잡으러 다녔죠. 한 사람은 자수했고, 또 한 사람은 추격 끝에 체포하려고 하니까 겁에 질려 자살하려고 우리 눈앞에서 수류탄을 깠다가 다리 한쪽이 날아갔어요. 그런 사람을 특수여단 대원들이 땅에 질질 끌고 헬기로 후송하는 거예요. 비인간적 모습에 충격을 먹었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총기를 탈취한 이유가 기가 막혀요. 한 김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사장이 6개월 넘게 일당을 안줬다는 겁니다. 한 사람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입원해 있었는데 어머니 병원비라도 내게 두 달 치만이라도 달라고 했더니 임원들이 집단폭행을 했다는 거예요. 너무 억울해서 사장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는 심정으로 총기를 탈취했는데 결국 두 사람 다 사형을 당했죠.

그때 이 사회의 가장 어두운 면을 봤어요. 이제껏 살아왔던 모든 가치체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어요. 군대 제대하고 대학 졸업한 다음에 취직하려는데 도무지 취직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아요. 한동안 방황을 하다가 심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이 뭘까 고민하다가 만화를 그리게 됐어요."

고권일 위원장이 그린 만평. 이 만평은 <뉴스제주>에 실렸다.
 고권일 위원장이 그린 만평. 이 만평은 <뉴스제주>에 실렸다.
ⓒ 고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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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시절 겪은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외상)로 만화 작가가 된 그가 세월 흘러 어느 날 군사기지 문제로 감옥엘 갔다. 헤살 놓는 운명에 그는 방실 웃을 뿐이다.

"교도소에 있을 때 21일 동안 단식을 했어요. 그때 언제 나갈지 모르지만 나가면 무슨 일을 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여러 줄기의 생각과 다짐을 정리했는데 그중 한 줄기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였지요. 기력이 돌아오면 한 컷 짜리 만평이 됐든 단편 작품이 됐든 우선 많이 그리려고 마음먹고 있어요.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투쟁이 결코 정부시책에 반대만 하는 싸움이 아님을 알려나가려구요."

그는 언젠가 "'존경'이란 말은 '진실로 마음을 담아 인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강정마을 주민과 강정마을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내신 분들 모두를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고백한 적 있다.

그는 '평화(平和)는 서로가 고르게 밥을 나눠먹는 것'이란 풀이를 즐겨 인용한다. 그에게 평화란 "같이 밥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노동자들에게 연대메시지를 계속 보내는 이유도, 오키나와 등 해외단체에 소식을 전하는 까닭도 평화라는 밥을 함께 나눠먹기 위해서다.

"우리 목소리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전달하고 싶어요. 강정마을을 우리가 생명평화마을로 선언한 것은 우리의 평화기운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예요. 비록 몸은 여기 있지만 소리만이라도 전달하자, 우리를 도와달라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는 이런 꿈을 꾸고 있다고 전달하는 것이죠. 아무리 어려워도 콩 한쪽 나눌 수 있는, 정녕 어려워 나눌 콩 한쪽조차 없다면 말 한마디라도 나누는 공동체, 그게 우리 강정마을이 꿈꾸는 평화공동체입니다."

그렇게 온 세계와 평화의 밥을 나누는 꿈을 꾸는 사람. 그는 해군기지가 '전쟁의 짐승'을 불러들일 미끼가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제주도는 동북아의 중심에 놓인 섬이라 '기지화'가 진행되면 관련 주변국들의 긴장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을 원하는 사람이면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그는 "이 평화롭고 위대한 길을 가지 않아야할 이유가 없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에겐 소망이 있다. 현재 요양원에 치매로 입원 중인 어머니 손을 잡고 구럼비 바위며 바다에 나가 보말, 미역, 소라를 따는 것이다. 이토록 소박한 소망은 언제 이뤄질 수 있을까. 그는 언제쯤 참된 평화와 자유를 실컷 누릴 수 있을까.

"이 법정에서 제가 왜 영장실질심사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동안 그 어떤 폭력 행위를 행한 바가 없고 해군을 상대하든 공사업체를 상대하든 제 양심에 입각하여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끔 호소하여 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폭력 투쟁을 4년 넘게 해 오신 강정주민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평화의 상징이자 메신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법정에서 저에게 어떠한 판단을 내리신다고 해도 제 양심이 제게 내리는 판결은 완벽한 '무죄'입니다. 또한 저의 영혼 또한 완벽한 '자유'입니다." - 고권일 '영장실질심사 진술서' 중에서


태그:#강정마을, #해군기지, #제주도, #고권일,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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