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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선 이전부터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고, 당선된 뒤에는 이른바 'ABR(All But Rho)' 정책으로 일관한 이명박 대통령에게 이제 와서 노무현을 배우라고 주문하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약간은 껄끄러운 주문임을 먼저 인정해야 겠다. 그러나 무릇 장수는 전쟁터에서 맞선 적장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는 법,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정치적 대척점에 서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배울 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이명박 대통령이 그 정도의 껄끄러움은 감수해 주리라 믿는다.

현직 기자가 써 내려간 '노무현 실록'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표지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표지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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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노무현 배우기를 시작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최근에 나온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이하 <인터뷰>)라는 책이 가장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기자가 퇴임을 앞둔 노무현 전 대통령을 2007년 9월~10월 사이 3일 동안 인터뷰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그는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가장 먼저 노무현을 인터뷰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이 책은 말하자면 현직 기자가 써 내려간 '노무현 실록'이다. 노무현은 재임 기간 동안 대통령의 기록에 큰 관심을 보여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까지 만들었다. (2007년 4월17일 국무회의 의결)

이 법을 만들기 전부터 노무현은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관한 기록물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지 재임기간 동안에 무려 825만 건에 이르는 기록물을 남겼다.

후대의 누군가가 이 기록물을 정리해서 공식적인 '노무현 실록'을 만들겠지만 현직 기자가 직접 대통령을 인터뷰한 내용을 모아 담은 <인터뷰>는 공식 실록에 대한 중요한 보충자료가 될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아직 공식 실록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 '야사 실록'은 우리가 지금 노무현을 공부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입문서다.

이명박 대통령, 이 책에서 배워라

내가 이 입문서를 읽으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에게서 배웠으면 하는 점은 대략 다섯 가지이다.

[첫째] 지도자로서의 신뢰다.

신뢰는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왜냐하면 지도-피지도의 관계가 정의되려면 적어도 가장 최소한의 단위에서는 최소한의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도 신뢰의 가치를 매우 높게 매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어떤 사람을 소개받을 때는 '그 사람은 신뢰할만한 사람이냐?'라고 물어요. 신뢰의 요소는 여러 가지지요. 삶의 자세에 대한 신뢰에서부터 역량에 대한 신뢰까지." (본문 217쪽)

노무현이 신뢰할만한 사람이었는가를 놓고서는 엇갈린 평가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일생에 걸쳐 신뢰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한 정치가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묵묵히 바보 노무현이 돼서 부산지역에 계속 출마한 점도 그렇고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결로 생을 마감한 것도 그렇다.

[둘째] 역사의식이다.

대선출마에 앞서 자신의 정치관을 말하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
▲ 대선출마선언 연설하는 노무현 대통령. 대선출마에 앞서 자신의 정치관을 말하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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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은 시대를 보는 눈이다. 한 사회가 역사의 어느 좌표에 있는지를 가늠하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노무현은 아마도 역사의식이 가장 투철했던 대통령이었던 것 같다.

"그런 뜻에서 지도자에 따라 가장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 시기 역사를 정체시키느냐, 후퇴시키느냐, 진보시키느냐 하는 지도자의 판단이 가장 중요한 판단이라는 것이죠. (중략) 그래서 '한국의 역사가 뭐냐?' 이거죠. 친일 잔재, 독재의 잔재, 이런 것들을 청산해 가는 과정 아니겠어요?" (본문 254쪽)

그는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서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600년의 역사를 청산하자고 했다. 이에 대한 반발이었을까? 그의 핵심공약이었던 수도이전은 헌법재판소가 600년 전의 경국대전을 근거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이 과거사에만 머무르지는 않았다. <인터뷰>를 보면 그는 항상 역사적인 평가를 의식하는 대통령이었다. 또한 그는 민주주의의 성숙 단계를 3단계로 구분하고서 참여정부가 한국 사회를 성숙한 민주주의의 단계인 세 번째 단계로 진입시키려고 했다.

[셋째] 시스템에 의한 국정운영이다.

노무현은 스스로가 'e 지원'이라고 하는 청와대 업무 통합관리 프로그램을 개발할 정도로 시스템을 이용한 국정운영에 힘썼다. 시스템에 의한 국가운영이란 국가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이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조화를 꾀하는 것이다.
실제 노무현이 대통령에 집중된 권력을 상당히 포기한 것은 그만큼 다른 국가기관들이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지고서 하나의 시스템 모듈의 역할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각종 위원회가 많이 만들어진 것도 (폐해가 없지는 않았지만)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시스템 운영의 단적인 사례를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에서 찾을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룻밤 더 쉬어가라, 대통령이 그것도 마음대로 결정 못합니까?'라고 하자 '큰 것은 내가 결정하지만, 작은 것은 내가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의전팀, 경호팀과 상의해야 한다고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김 위원장의 제안에 대한 노 대통령의 답 한마디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믿음을 줬다. 평상시에도 저렇게 시스템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왔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본문 92쪽)

[넷째] 사람중심주의다.

아무리 시스템이 잘 갖춰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무너진다. 훌륭한 지도자는 시스템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자율성을 여백으로 남겨둔다. 제정로마시대를 연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는 이 점에서 탁월했다. 얕고 넓은 세제와 적은 수의 군단으로 광대한 제국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의한 상류층의 기부, 속국민들의 로마화라는 장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 3세기 경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말단 행정까지 세세하게 다듬었지만 그 결과 계층 간의 유동성이 경직되면서 로마다움을 잃어버린다.

인간을 시스템 운영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끌어들일 때 그 시스템은 훨씬 더 안정적이다. 각종 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하고 그것을 새로운 시스템의 동력으로 삼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2006년12월 21일 민주평통자문회의 연설을 보면 당시 청와대에서 정보가 어떻게 수집 정리되고 관리되는지 일단이 나와 있다. 일차적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정보가 수집되고 또 상호검증 과정을 거친 뒤 대통령에게 정리돼서 보고된다. 그에 대한 언론보도가 잘못되면 즉시 정정보도 요청이 들어간다.

봉하마을 다목적광장에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형 걸개그림으로, 한 사람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있다.
 봉하마을 다목적광장에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형 걸개그림으로, 한 사람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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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신문기자들이 글을 쓸 때 굉장히 조심합니다. 사실을 확인하는 습관이 점차점차 붙어갑니다.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대신에 괘씸하거든요. 옛날에 공무원들은 안 그랬는데, 요즘 공무원들은 또박또박 말대꾸를 한단 말입니다. (중략) 어쩌겠습니까? 철저히 파는 거지요. 정말 먼지 나는 것 없나?  잘못된 것 없나?  철저하게 파지요. 별수 있습니까? 공무원들 정신 바짝 차려야지요. 대통령이 일일이 다니면서 감사원장한테 감사 좀 잘하라고 장관 보고 내부 감사 잘하라고 이렇게 할 필요가 없지요. 기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철저히 챙겨주니까요. 그렇습니다. 괜찮은 시스템 아닙니까?" (민주평통자문회의 연설 중, 2006년12월21일)

말년의 노무현이 새로운 형태의 시민주권운동에 주목한 이유도 이런 맥락이다.

"민권 변론, 시민운동, 야당 정치, 그리고 정권의 운영. 이런 경험을 하는 동안, 저는 모두가 다 중요하지만, '민주주의든 진보주의든, 궁극적으로는 시민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간다'는 이치를 거듭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70쪽)

그래서 그의 비문에는 이런 글이 새겨졌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그가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를 추진한 이유

[다섯째] 노무현의 중도실용주의다. 이 부분은 좀 길게 설명해 보겠다.

흔히 보수언론과 지금의 여당은 노무현을 좌파로 규정하지만 실제 그의 정책 면면을 보면 이념적인 색깔이 별로 없는 실용주의에 훨씬 가깝다. 노무현 5년 동안 가장 논란이 많았던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이라크 파병의 문제는,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 생각해보아도 우리 역사의 기록에는 잘못된 선택으로 남을 것이라고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183쪽)

왜 불가피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이 <인터뷰>에서는 다소 막연하게 국익의 손상 때문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의혹을 미국이 제기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된다. 노무현 정부는 시작부터 미국에 의한 북폭이라는 악몽에 시달린다. 소문에 의하면 미 국무부 내 온건파라는 파월 장관조차도 북한을 폭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라크 파병 왜했냐 이런 얘기가 나올 수 있지요. 또 미국하고 왜 껄끄러워졌냐, 저는 껄끄러워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맨 처음 대통령 당선됐을 때 북핵문제를 놓고 북한에 대한 무력 공격설이 마구 난무했습니다. 미국 신문에 우리 한국 신문에. 책임 있는 사람들이 말했다 안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문에 난무하면 그게 국민들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력공격 안 된다, 얘기했습니다." (민주평통자문회의 연설, 2006년12월21일)

북폭은 곧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을 의미한다. 내전의 상처를 겪은 우리로서는 제2의 한국전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말하자면 당시의 노무현은 처자식 목에 칼이 들이쳐 협박당하는 상황에 가까웠을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한미FTA도 지금까지와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할지도 모른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진보진영에서는 노무현의 계급적 한계가 드러난 사안이라며 신자유주의로 완전히 돌아섰다고 노무현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노무현은 한미FTA가 한국이 능동적으로 준비한 협상이라고 말한다.

"FTA에 적극적인 해외 투자, 이런 것인데 개방도 이제는 단순히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능동적으로 시장을 개척해 내가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193쪽)

노무현은 줄곧 한미FTA가 순전히 경제문제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큰 의문이 있다. 적어도 노무현정도의 지성이면 '순전히 경제적으로 따져봤을 때' 한미FTA로 한국이 큰 손해를 본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이미 FTA의 선결조건이었던 스크린쿼터도 풀지 않았던가.

우리는 흔히 하나의 사건은 한두 개의 영역에 국한된 문제라고 쉽게 치부한다. FTA는 경제문제이고 북핵문제는 남북문제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렇게 우리가 편의적으로 영역을 쪼갤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노무현은 왜 한미FTA를 추진했을까?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7년 6월 2일 오후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참여정부 평가포럼' 초청으로 참여정부의 국정운영 평가와 과제에 대한 특강을 하고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7년 6월 2일 오후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참여정부 평가포럼' 초청으로 참여정부의 국정운영 평가와 과제에 대한 특강을 하고있다
ⓒ 연합뉴스 박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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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문에 대한 나의 가설(?)은 노무현이 한미FTA를 국가안보의 측면에서 많이 고려했다는 것이다. (이전기사 보기 : 물리학자도 정치적 바람이 있다)

경제동맹 혹은 무역동맹은 군사동맹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정권 초기부터 FTA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이 당시에 한반도 안보와 관련해서 중요한 사항 한 가지가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다. 부시 행정부는 들어서면서부터 럼스펠트 주도로 전 세계의 미군에 대한 구조개혁에 들어간다. 그렇게 나온 개념이 전략적 유연성으로서 세계 어디에서든 미군이 개입할 필요가 있을 때 신속하게 파병할 수 있도록 미군 전체의 유연성을 높인다는 개념이다.

유연성의 잣대로 보자면 주한미군은 최악이다. 북한의 전쟁위협을 막았던 인계철선이 90년대에는 오히려 미국의 발목을 잡았다. 94년 클린턴이 북한 폭격 직전까지 갔다가 포기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만약 주한미군이 한강보다 훨씬 남쪽으로 물러난다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훨씬 자유롭게 군사행동을 펼칠 수 있다. 그러니까, 북한에 의한 직접적인 전쟁위협은 줄어든 반면 강대국에 의한 전쟁위협이 상대적으로 급증한 셈이다. 이것이 90년대 이후 한반도의 변화된 안보상황의 중요요소이다. 한국 경제는, 아니 한국의 모든 문제는 안보와 직결돼 있다.

노무현도 더 이상 남의 나라 군대를 인질삼아서 국가방위를 하는 현실이 오래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도 원하지 않고 노무현의 철학에도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구한말처럼 다시 강대국들이 이권을 놓고 무력으로 경쟁하는 이전투구의 전쟁터로 바뀔 구조적인 개연성이 높아진다. 이를 완화할 방법이 무엇일까?

나는 여기에 대한 답이 FTA라고 생각한다. 미국 돈이 한국에 많이 묶여 있으면 그만큼 미국의 군사력 행사 옵션 가능성은 낮아진다. 유럽의 돈이 많이 묶여 있으면 그 나라 지도자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자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전쟁 가능성이 낮아진다면 FTA 자체에서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더 큰 이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노무현이 FTA는 경제문제일 뿐이라고 한 것은, FTA의 안보적 측면이 부각되었을 때 미국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보세력이 FTA를 반대할 때 경제적인 이해득실만 내세워서는 전체 그림을 놓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FTA 문제는 단순히 일차원적인 경제문제가 아니라 군사와 안보문제까지 얽힌 매우 복잡한 고차방정식이다.

충남대 김학성 교수는 "미국의 전략적 가치가 안보·군사 중심에서 경제적 이득을 제일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한국에서 미국이 지켜야 할 가치가 커짐에 따라 안보동맹도 자연스레 강화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노무현 개인은 좌파적인 성향을 가졌을지 모르나, 이라크 파병이나 한미FTA처럼 굵직한 국정현안을 결정할 때는 특정한 이념에 좌우되지 않고 국제정세 속에서의 한국의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을 취했다. 실용주의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가 꼭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좌파든 우파든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28일 저녁 청와대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28일 저녁 청와대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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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터뷰>에서 고른 노무현의 다섯 가지 교훈들 자체는 좌파나 우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들이다. 예를 들어 역사인식에도 보수적인 인식도 있을 수 있고 진보적인 인식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든 역사인식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스스로가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철학과 가치관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요구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명박 대통령이 보수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위의 교훈들을 그의 철학에 맞게 다시 재구성해주었으면 한다. 예컨대 북한과 의미 없이 긴장관계만 고조시켜 놓고서 외국 기업더러 한국에 거액을 투자하라는 것은 그의 '실용'과도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인터뷰>를 보면서 나는 인간 노무현의 많은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현직 과학자로서 나는 노무현이  "정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과학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지요. 객관적인 사실을 사실로 인정할 줄 알고, 그래야 오늘을 바로 해석할 수 있고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겁니다" (본문 198쪽) 라고 한 말이 무척 반가웠다. 최근에 나는 이런 문제의식으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노무현이 이 책을 읽었으면 반가워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이 책이 나왔을 때는 이미 그가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을 때였다.

노무현은 <인터뷰>에서 퇴임 뒤 '살아서 청와대를 걸어 나오기 위해' 보수 언론과 전쟁을 벌였고 검찰과 손을 잡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호언한 대로 '송장이 되지 않고' 살아서 청와대를 나왔다. 혹시나 이명박 대통령도 임기가 끝난 뒤 살아서 청와대를 걸어 나올 고민을 하고 있다면, 아직은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있는 지금, 더 늦기 전에 <인터뷰>를 찬찬히 읽어보기 바란다.


태그:#노무현, #이명박,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오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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