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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시간으로 지난 9일 밤과 10일 새벽 사이,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인 '카티바 마시나'에 잡혀 있던 한국, 미국 그리고 프랑스인 4명이 프랑스 특수부대에 무사히 구출되었다. 그러나 교전 과정에서 프랑스군 특수부대원 2명이 숨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네티즌들은 정부의 여행금지 구역에 들어가 인질로 잡힌 여행객들을 비난하며, 구출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프랑스 특수부대원들에게 애도를 보내고 있다.
  
부리키나파소는 서아프리카의 내륙국으로 수도는 와가두구이다.ⓒ 위키백과
 
그러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부르키나파소'가 주목받고 있다.

부르키나파소란 '정직한 사람들의 땅(land of honest men)'이란 뜻이다.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였다가 1960년 독립했고 그 당시 국가명은 '오트볼타 공화국'이었다. 1983년 사회주의자 토마스 상카라(Thomas Sankara: 1949년 12월 21일 ~ 1987년 10월 15일)가 쿠데타에 성공해 집권하면서 국명을 현재의 부르키나파소로 바꾸었다.
 
토마스 상카라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국민적 영웅이다.
  
아프리카의 체 게베라로 불리는 부르키나파소의 국민적 영웅 '토마스 상카라'ⓒ 위키백과
부르키나파소에서 글과 농업 기술 등을 가르치는 사업을 펼치는 '국경 없는 교육가회' 김기석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상카라 전 대통령은 부르키나파소의 신화(神話)예요. 너무 솔직 담백해서 죽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상카라 철학'이라는 게 있는데 그건 한마디로 자력갱생입니다"라고 밝혔다.
 
또한 이번 인질 구출 작전이 알려진 이후 이도흠 한양대학교 교수는 페이스북 글을 통해 토마스 상카라 때문에 부르키나파소를 떠올리면 가슴 한 편이 아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도 토마 상카라와 같은 지도자, 그와 같은 전방위에 걸친 과감하면서도 이상과 현실을 결합한 개혁, 혁명과 함께 국민을 시민주체로 키우고 조직화하는 방안, 또 이런 꿈을 꾸는 이들의 연대와 정치적 조직화가 필요하다. 그럴 때만 촛불은 항쟁에서 혁명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토마스 상카라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상카라는 오토바이로 남미를 누볐던 체 게바라와 닮은꼴로, 오토바이 여행을 즐겨했고, 유명한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한 낭만 가득한 청년이었다.
 
19살에 입대해 공수부대의 장교가 되었고, 말리와의 국경분쟁에서 큰 전공을 세워 전쟁영웅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상카라는 당시 정치권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 여성 차별, 파괴되는 자연환경 등에 문제의식을 갖고, 관련 책들을 읽으며 혁명의식을 키웠다. 그리고 직접 군부 내에 "공산주의 장교그룹"이라는 비밀조직 결성에 가담했다.
 
상카라는 1981년 정보부 장관, 1983년에는 총리가 되었다. 그것은 모두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국민적 지지를 받는 상카라를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개혁적 성향의 상카라는 집권세력과 늘 마찰을 빚었고 그의 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민중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자들에게 저주를(Malheur à ceux qui bâillonnent le peuple!)."이라는 말과 함께 상카라는 물러났다.
  
어린이날 큰 잔치 연설하는 토마스 상카라ⓒ 위키백과
그 후 상카라는 정치적 동료인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와 함께 프랑스 식민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한 군사 쿠데타에 성공, 대통령에 올라 강력한 개혁 정치를 단행한다.
 
우선 과중한 인두세를 과감하게 폐지하고, 부족장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토지 재분배정책을 시행했다. 장관용 관용차인 '벤츠'를 값싼 경차인 '르노 6'로 바꾸는 등 기득권을 없애고, 대신 국가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여 도로, 상하수도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만들었다.
 
행정개혁을 통해 전국을 30개 자치구로 나누고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관리하게 하는 '자주관리정책'을 시행했다. 당시 90%가 넘는 문맹률을 개선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수많은 학교를 설립했다.
 
일부다처제를 금했으며, 가혹했던 풍습인 여성 할례의식을 금지시켰고 여성의 날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여성 고위공무원을 대거 임명하는 등 여성 인권 향상에 애썼다.

피임을 장려하고, 예방접종 시행했으며 아프리카 최초로 정부차원에서 에이즈의 실체를 인정, 대책 마련에 앞장 서는 등 근대적인 의료체계를 확립하려 했다. 또한 사막화를 막기 위한 재녹화 사업을 추진하여 수도 와가두구에 아직도 쉼터로 쓰이는 1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기도 했다.
 
상카라의 이러한 노력들로 부족갈등이 사라지고, 농업 생산량이 두 배 넘게 증가하여 만성적인 식량난에서 벗어나 자급자족하게 될 정도로 경제가 활성화 되었다.

하지만 '인민혁명재판소'를 설치하여 기득권층과 반대파, 노동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의 권위주의적 통치자라는 국제사회의 비난도 끊이지 않았다.
 
사실 상카라의 관심은 부르키나파소 일국에 머물지 않았다. 상카라는 세계 혁명의 관점을 가지고 쿠바와 연대했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을 비난했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웠다. 그러면서 상카라는 제3세계 혁명운동의 상징이자, 지도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이런 상카라의 개혁정책은 주변국 독재자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또한 그의 전 세계 차원에서의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혁명가로서의 확고한 신념은 미국 등 서방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1987년 8월 15일, 미국 CIA 사주를 받은 블레즈 콩파오레의 쿠데타 과정에서 총격으로 인해 상카라는 3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상카라의 죽음 이후 개혁 정책은 물거품이 되었고, '부르키나파소'는 다시 민중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독재자만 풍요로운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함부로 버려졌던 상카라의 시신은 27년간의 콩파오레 장기집권이 민중봉기로 몰락한 2015년에야 비로소 유골이 수습되었다.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에 의해 자행된 인질 사건으로 그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잠들었던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 '토마스 상카라'를 소환했다.
 
그는 암살당하기 일주일 전 열린 '체 게바라 사망 20주년 추모집회'에서 "혁명가 개인을 죽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사상을 죽일 수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
 
과연 그의 말처럼 상카라의 꿈은 여전히 부르키나파소 국민의 가슴에, 아프리카인들의 뇌리에, 그리고 전 세계 민중들의 행동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