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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카프카가 대한민국에 환생한다면?

리뷰] 카프카의 단편소설 <법 앞에서>
16.05.20 16:53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체코 출신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작품은 처음 읽으면 무척 난해하다. 그러나 음미하면 할수록 시대를 앞선 혜안이 돋보인다. 특히 카프카가 1915년 발표한 단편 <법 앞에서>는 '전관' 관행으로 떠들썩한 21세기 한국 사회를 내다본 듯한 통찰이 스며 있다.

소설은 문지기와 시골농부가 대화를 주고 받는 형식으로, 구성이 무척 단순하다. 시골농부는 '법' 앞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문지기가 농부의 발길을 막는다. 그럼에도 농부가 자꾸 법 안을 들여다보려고 하자 문지기는 냉소적인 어조로 쏘아 붙인다.

"그렇게 마음이 끌리거든 내 금지를 어기고라도 들어가도록 해보라구. 그렇지만 명심하시오. 내가 막강하다는 걸. 그런데 나로 말하면 최하급 문지기에 불과하거든. 방을 하나씩 지날 때 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갈수록 막강해지지. 셋째 문지기만 되어도 나조차 쳐다보기도 어렵다구."

농부는 법이란 "누구에게나 언제나 개방되어 있어야 마땅한 것이거늘 하고 생각하지만" 문지기를 보자 입장허가를 받기로 마음먹는다. 농부는 그때부터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문지기 눈치만 본다. 한 번은 문지기를 매수하려 시도 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야속하게도 문을 열어줄 듯 열어줄 듯 열어주지 않는다. 그러던 차 농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문지기에게 묻는다.

"모든 사람들이 법을 얻고자 노력할진대, 이 여러 해를 두고 나 말고는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는 사람이 없으니 어쩐 일이지요?"

이러자 문지기는 농부의 귀에다 대고 고함을 지른다.

"여기서는 다른 그 누구도 입장 허가를 받을 수 없었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문을 닫고 가겠소."
프라하 마담 투소 박물관에 전시된 프란츠 카프카 밀랍인형. ⓒ 지유석

이 대목에서 잠깐 작가를 살펴보자. 카프카는 독문학 연구자들 사이엔 '박사제조기'로 통할만큼 주요하게 다뤄지는 작가다. 그러나 정작 작가 자신은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심판』, 『판결』 등 그의 작품은 법 냄새를 풍긴다.

그는 원래 작가를 지망했다. 그런 그가 법 공부를 한 건 순전히 아버지 헤르만 때문이었다. 헤르만은 "법학(Rechtswissenschaft)은 밥학(Brotwissenschaft)"이라며 아들을 다그쳤다. 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안정된 밥벌이와 높은 지위를 보장해주는 보증수표다. 부르조아였던 아버지가 아들을 법조인으로 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카프카는 법학 공부가 무척 싫었나 보다. 그러나 그는 법을 공부하면서 법이 기득권 유지 수단임을 인식했다. 단편 <법 앞에서>는 이런 법의 속성을 예리하게 갈파한 작품이다.

문지기 역할 톡톡히 하는 '전관' 관행 

작가의 통찰을 지금에 대입해보자. 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하고,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 여기서 잠깐, 올해 2월 타계한 미국 소설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작가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의 입을 빌어 법의 정의를 강력하게 설파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창조되지 않았음을 압니다. 물론 몇몇은 그렇게 믿을 수도 있습니다만, 어떤 이는 보다 더 영리하고,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난 환경 덕분에 더 많은 기회를 갖습니다. 어떤 이는 돈을 더 많이 벌기도 하고, 어떤 여성은 더 맛있는 케이크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표준 이상의 능력을 선물받고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 한 곳이 있습니다. 가난뱅이와 록펠러를, 백치와 아인슈타인을, 무식쟁이와 대학총장을 동등하게 하는 인류의 공공기관이 있는 것입니다. 신사 여러분, 그 기관은 바로 이 법정인 것입니다. 그것은 미 합중국의 최고 대법원이거나 가장 초라한 지방법원이거나 간에 여러분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존경받을 만한 법정인 것입니다."

애티커스의 변론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실은 법의 정의와는 무관하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전관' 관행은 법의 문을 굳게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물론 이따금씩 약자가 문지기를 통과해 승리를 거두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등법원, 대법원 등 관문이 거듭될 수록 더욱 힘센 문지기가 등장해 길목을 가로 막는다.

돈 많고 죄 많은 부자들은 아예 첫 관문에서부터 강력한 문지기를 기용해 법의 문을 굳게 막아선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낸 옥시 레킷벤키저가 국내 최대 로펌인 '김 & 장'을 기용한 일이나, 화장품 회사 '네이처 리퍼블릭' 정운호 대표가 형을 면하기 위해 '전관' 출신인 최유정 변호사에게 100억을 건넨 일이 대표적이다.
프라하 유대인 지구에 서 있는 카프카 문학 동상 ⓒ 지유석

이런 현실이다 보니 <법 앞에서>에서 "방을 하나씩 지날 때 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갈수록 막강해지지"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문지기의 독백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모골이 송연하다. 도무지 이 소설이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쓰여진 작품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만약 카프카가 지금 법조 게이트로 뒤숭숭한 대한민국에 환생한다면? 아무래도 법의 부조리를 주제로 한 대하소설 한 편 쯤은 어렵지 않게 써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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