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계의 관점에서 바라본 존재의 이중성

입장에서 벗어나 방법으로 경계 선택하기
22.01.05 11:02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경계에 대하여
세상엔 많은 경계들이 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경계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경계도 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물리적 경계라면 마음만 먹으면 넘거나 무너뜨릴 수 있지만, 오히려 마음만 먹으면 넘을 수 있는 심리적 경계를 넘는 것은 물리적 경계를 넘는 것에 비해 훨씬 더 어렵다. 『경계란 무엇인가?』라는 영향력 있는 논문에서 에띠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는 경계선의 "다의성"과 "이종성(heterogeneity)"에 대해 기술하면서, "다수성, 그것들의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속성"이 "그것들을 조금도 덜 실재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라고 기술하였다(산드로 메자드라∙브렛 닐슨, 2021: 26).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물리적 경계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경계인 국경일 것이다. 반면 인류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경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선과 악의 경계이다. 진화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David Buss)는 인간은 악하게 태어나거나 선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도록 태어났으며,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진화과정에 적응해야 했고,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다고 주장했다(정유정, 2016: 170/174).
물리적 경계는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지금은 둘로 갈라져 있는 한반도의 물리적 경계가 지난 5천 년 동안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상상하면 물리적 경계의 변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오래된 심리적 경계인 선과 악은 아직까지도 모든 경계에 침투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스어로 선을 뜻하는 '아가톤(agathon)'이란 단어에는 도덕적 의미 외에도 '득이 된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반면 '악(惡)'을 뜻하는 '카콘(kakon)'이란 단어에는 '득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이 세계에는 부정이나 범죄 등 각종 악행이 만연하지만 순수한 의미에서 '악', 즉 '득이 되지 않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2014: 24/132). 그래서 경계는 그것이 물리적 경계든 심리적 경계든 경계(境界) 밖의 존재나 생각을 경계(警戒)하게 만든다. 그래서 경계는 경계를 기준으로 경계 안은 선이고, 경계 밖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경향성을 갖는다.

경계의 이중성
얼핏 보면 경계가 경계로 나뉘어진 둘(또는 그 이상)을 대립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경계로 나뉘어진 둘은 경계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진화를 이끌어 낸다. 선과 악의 공진화가 진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데이비드 버스의 주장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회가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을 때는 경계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이 더 잘 보였을 수도 있다. 선과 악을 경계에서 바라본 최초의 인물은 역시 소크라테스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누군가가 해(나쁜 것, to kakon)를 줄 수 있다면 그는 이로움(좋은 것, to agathon)도 줄 수 있고, 그 역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다음과 같은 추론에 따른 것이다. 좋은 것을 알면 이로움을 줄 수 있는데, 나쁜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좋은 것을 알 수 없다(플라톤, 2009: 52).
이러한 경계의 관점은 사실 동양사상의 오랜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유교 경전인 주역(周易)에 등장하는 태극은 음과 양으로 나뉘어 있어 그 경계가 분명하지만, 음과 양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 하나의 태극을 이룰 수 있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를 볼 수 있고, 밤이 있어야 낮의 소중함을 알 수 있으며, 겨울을 지나야 여름을 맞을 수 있다. 공자는 논어의 자로 편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 존이구동(存異求同), 즉 생각이 같지 않아도 화합할 수 있으며, 다른 것을 인정하면서도 같은 점을 찾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고 하였다.

경계의 확장
개념을 분리(separate)해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 중 하나다. 자연과 한 덩어리로 존재했던 인간은 이성을 갖게 되면서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분리를 통해 자연을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 인간은 객관으로 존재하는 자연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분류(categorize)를 시작한다. 인간은 자연을 생명의 유무를 기준으로 생물과 무생물로, 다시 생물을 운동성과 세포벽의 유무 차이를 기준으로 동물과 식물로, 그리고 그 각각을 다시 종-속-과-목-강-문-계-역으로 분류하며 적극적으로 자연을 이해해 왔다.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분리 능력으로 이제 인간 스스로를 인종과 성, 나이 등으로 분리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분리는 객관을 대상으로 하는 분류와는 다른 개념으로, 차라리 분열(division)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은 생존을 위해 물리적 경계인 강을 건너기도 하고 인간이 쳐 놓은 울타리를 넘기도 한다. 이성을 가지지 않은 동물도 심리적 경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적어도 아직까지 심리적 경계는 동물적 본성이 아닌 이성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성은 자연과 인간을 나누는 경계의 기준이다. 동시에 이성은 인간 사회 안에서의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해 왔다. 신자유주의를 통해 세계화가 진행된 이후 다양한 경계를 횡단하는 이종교배의 패러다임이 등장했지만, 이러한 전지구화 과정은 오히려 경계의 감소가 아닌 확산을 낳았다(산드로 메자드라∙브렛 닐슨, 2021: 105-106).
인간이 문명의 과정에서 확장해 온 다양한 심리적 경계를 모두 헤아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간 사회 안에서 가장 세밀하게 물리적 경계를 나눈다면 그 끝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이 존재할 것이다. 개인은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물리적 경계의 최소 단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개인은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무한에 가까운 심리적 경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인간의 심리적 경계는 어떤 기준으로 생성되거나 소멸되어 왔을까?

경계의 기준
앞에서 인용한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말처럼 심리적 경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기준은 생존일 것이다. 생존이라는 가장 동물적인 본성은 이성에 의해 은폐되기도 하고, 또 그럴듯하게 포장되기도 한다. 농경시대의 공동체는 집단을 이루어 농사를 짓는 것이 생존에 필요했기 때문에 형성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관계를 중심으로 문명을 개척해 온 인류에게 공동체는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공동체는 과잉생산의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오랜 기간에 걸쳐 과잉생산에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와 시스템을 구축해 왔다. 물리적 경계의 최소 단위가 개인인 것처럼, 소비도 그 최소 단위가 공동체나 집단이 아닌 개인이 되어야 자본주의에 유리하다. 그래야 과잉생산의 맞은편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과소비와 중복 소비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광고는 과소비를 촉진하며, 유행은 중복 소비를 부추긴다. 그리고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금융 시스템은 미래까지도 소비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인간은 인간이 아닌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해 집단, 즉 관계의 공동체에서 빠져나와 소비에 굶주린 개인으로 살아간다.
때때로 생존은 이성과 결합해 생존 그 자체를 초월하기도 한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인 신념도 종교와 다르지 않게 인간을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는 매우 강한 존재로 만든다.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은 필연의 결과일까, 아니면 우연의 결과일까? 신념은 오롯이 개인의 자발적 의지가 만들어 낸 것일까? 아니면 내가 처한 시대적 상황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일까? 인간의 신념은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30년 전 대학생들이 반독재∙민주화를 외쳤던 이유는 그 시대에 총칼을 앞세워 국가 권력을 장학한 신군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학생들은 30년 전과는 전혀 다른 고민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이 필연적 의지로 자신이 살아갈 시대를 선택할 수 없다면 우연의 영역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경계의 이동
심리적 경계의 기준과 시대 변화에 따른 경계의 이동 ⓒ 채희태
 

중세 이전까지는 집단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에 우선했다. 집단에 득이 되는 것이 선이고, 집단에 득이 되지 않은 것은 악이었다(경계의 첫 번째 기준: 집단).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과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이 눈부신 성취를 이루었지만, 인간을 신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게 할 수준은 아니었다(경계의 두 번째 기준: 신이 관장한 우연). 11세기 초반에 등장한 부르주아지는 오랫동안 상업을 통해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이끌었다. 이후 과학혁명을 통해 이룩한 문명의 성취는 신이 아닌 인간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경계의 세 번째 기준: 인간에 의한 필연). 과학문명을 통해 다양한 결핍에서 벗어나게 된 인간은 생존을 위해 더 이상 집단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손해나 피해를 감수할 개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경계의 네 번째 기준: 개인).
14세기 발발한 흑사병이 중세의 질서를 흔들었듯, 21세기의 코로나는 과학문명을 통해 한껏 오만해진 인류에게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불확실성을 선물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기준(New Normal)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근대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인류에게 새로운 과제가 던져진 것이다.

교육이 가지고 있는 복잡한 경계들
대한민국에서 가장 복잡하고 다양한 경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교육이다. 교육의 가장 견고한 경계는 역시 선발과 성장 사이의 경계다. 교육의 선발 기능은 근대의 산물이다. 중세 시대엔 교육을 통해 지배계급인 귀족을 선발하지 않았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교육의 쓸모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자 주체는 바로 대학이다. 입시 경쟁을 뚫고 대학, 그것도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않으면 12년간의 교육은 무용한 것이 된다. 혁신은 변방에서 시작되고, 얼음은 가생이부터 녹는다는 말이 있다. 교육의 중심부에 있는 선발과 성장 사이의 경계가 지나치게 견고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육의 다른 경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바로 마을과 학교 사이의 경계다. 교육이 파생한 심리적 경계의 폐해를 알리려면 눈에 보이는 물리적 경계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마치 부르주아지가 성난 민중을 혁명에 동원하기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으라고 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던 것처럼(이 말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12살이었던 1766년에 이미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에서 했던 말이다), 또는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서로마제국이 남하하는 게르만족을 포교하기 위해 십계명을 어겨가면서까지 우상을 만들었던 것처럼... 대한민국에서 마을과 학교 사이의 경계는 교육의 제도적 경계인 일반행정과 교육행정의 분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교육은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교육의 경계들을 파생했다. 교육 3주체라고 하는 학생, 교사, 학부모 사이의 경계, 근대 교육과 미래 교육 사이의 경계, 일반고와 자사고 사이의 경계, 지식과 정보 사이의 경계, 공교육과 사교육 사이의 경계,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학교교육과 평생교육 사이의 경계까지도…
나아가 교육은 이 사회의 모든 경계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경계가 교육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미 시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성세대와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미래 세대 사이의 경계, 교육을 통해 부가 대물림되는 양극화로 인해 발생하는 경계, 가부장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남학생과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여학생 사이의 경계 등…. 이 모든 경계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교육문제를 더욱 미궁 속으로 몰아넣는다.

방법으로서의 경계
국가 정책의 실패로 등장한 거버넌스는 방법으로서 경계를 선택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거버넌스는 국가 정책이 실패했으므로 다시 부도덕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정책의 권한을 이양하자는 것이 아니다. 초기 자본주의 시절, 시장의 실패는 이미 경험했다. 자본주의가 직면한 불확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시장이 가지고 있는 역동성과 국가정책이 가지고 있는 안정성이 모두 필요하다. 시장의 전문성과 국가의 전문성을 특정한 입장이 아닌 경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바로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에 비유한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피레네 산맥 이 편에서의 진리가 저 편에서는 오류가 될 수 있다며, 산맥이라는 경계 위에서 진리와 오류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살폈다(파스칼, 2003: 101/831). 한의학은 인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지만, 서양의학은 몸을 나누어서 본다. 동양의 세계관은 얽힘과 연결이고, 서양의 세계관은 분리와 맞섬이다. 이철은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을 통합하여 맞선 둘은 하나라는 '맞얽힘'의 세계관을 주장한다(이철, 2021: 316-318).
인류의 역사 속에서 경계의 기준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우연에서 필연으로 이동했고 해서 과거의 기준이 쓸모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권력은 과거에 기준에 익숙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과거의 기준에 익숙한 개인이 존재하고 있는 한 그 기준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의 왼쪽과 오른쪽이 투쟁을 통해 헤게모니를 잡아야 한다는 근대의 역사 발전 법칙이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충분하다.  좌와 우의 경계는 세계를 폐허로 만든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을 비켜간 6∙8 혁명을 거치면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근대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념의 경계가 힘을 잃자 더 많은 경계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새로운 경계가 근대를 양분했던 이전의 경계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경계의 하위 개념쯤으로 인식하거나, 둘 중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경계가 감당할 수 없이 범람하고 있다면 그 경계가 나누고 있는 어떤 입장을 선택하는 대신 경계 자체를 제3의 방법으로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선택한 그 입장이 무수히 많아진 경계로 인해 세상의 절반이 아닌 무한대에 수렴하는 분모 n분의 1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이종필(2012). 『물리학 클래식』. 사이언스북스. eBook.
- 이   철(2021). 『맞얽힘』. 서울: 움직이는책.
- 정유정(2016). 『종의 기원』. 서울: 은행나무.
-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岸見一郎∙古賀史健)(2014). 『미움받을 용기』. 전경아 역. 서울: 인플루엔셜.
- 산드로 메자드라∙브렛 닐슨(Sandro Mezzadra∙Brett Nielson)(2021). 『방법으로서의 경계』. 남청수 역. 서울: 갈무리.
- 파스칼(2003). 『팡세』. 이환 역. 파주: 민음사.
- 플라톤(2009). 『크리톤』. 이기백 역. 서울: 이제이북스.
첨부파일
XL.jpg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