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폐업합니다. 감사합니다.

4년 6개월 영업한 그의 첫 식당 ‘폐업파티’를 가다
20.04.19 19:02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폐업파티'에 다녀왔다. 라오스 쌀국수를 팔던 마포 공덕의 작은 가게서 열린 환송식이었다. 그 가게는 그의 첫 자영업, 그의 첫 식당이었다. 2015년 11월 문 열고, 2020년 4월 18일, 라오스 쌀국수집 맹그로브는 화구의 불을 끈다.  
 
어느새 4년 6개월이 지났다. 2015년 늦가을, 그의 첫 가게 문을 열었을 때의 안내문을 그는 간직하고 있었다. ⓒ 원동업

그는 2015년 봄부터 돼지 잡뼈와 고기로 국물을 내고, 샐러리로 피클을 만들고, 납작하고 말간 쌀국수로 그의 첫 제품을 준비했었다. 우리들-그의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여러 번 그의 국수 '카오소이'와 '라오스 누들'을 시식했다.  

당시 우리들은 그를 도울 방안을 이모저모 찾아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베테랑' 요리사를 소개해 주었다. 일주일에 70~80여 시간씩 30여년을 버텨온 사람. 노점부터 포장마차, 한강 매점을 포함 다채로운 점포 운영도 해봤던 '노장' 마철웅 서울맛집 실장! 만남은 그해 어느 여름 밤 이루어졌다. 업계 신참에게, 백전노장이 건넨 첫 말은 다음과 같았다.

"요리를 만들 근육은 갖고 있소?"

식당을 연다는 건, 음식을 만드는 일을 좋아하고, 한 그릇 음식을 만나세 내는 능력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하루에 100~200그릇쯤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매일매일, 수년 동안 이어질 일이었다. 

불과 칼을 다뤄야 하고, '식중독'의 위험성-위생검열-도 있었다. 조류독감, 돼지열병, 구제역, 광우병파동은 내 능력 바깥에서 닥치는 위험이었다. 장사가 잘 되면 반드시 유사 경쟁자들이 주변에 출몰하겠지. 경쟁자는 이웃에도 있고, 숨어 배달로 파이를 나누었다. 전기와 가스를 끌어오고, 잔반과 재고를 처리하고, 건물의 조건과 관계들, 인테리어까지…, 할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베테랑의 결론엔 완곡한 우려, 반대의 뜻이 있었다. 하지만 신참은 입지를 분석하고, 장소를 물색해 계약을 마쳤다. 마포대로 공덕동의 이면 도로 먹자골목이었다. 반쯤은 지하로, 반쯤은 다락처럼 오를 수 있는 1.5층 형의 건물이었다. 핫한 곳은 아니지만, 주택가와 상업지대 모두를 고객으로 잡을 만한 곳. 깃들기에 아늑한 둥지였다. 오랜 동안 경험하고, 느끼고, 진심을 다해 사람을 만나고, 다른 영역서 장사를 해본 경험도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믿었다. 

계약 직후 도움을 주기로 했던 친구가 참여할 상황이 안 됐다. 모아놓았던 돈을 탈탈 털어 밀고 왔는데, 인테리어 비용이 부족했다. 정원조경을 좀 아는 친구는 정성을 다해 2층 창가에 화단을 만들어 주었다. 덩굴식물을 심었다. 잎새들의 폭포로 자랄 애들이었다. 1층 창가 안팎에도 식재했다. 의상디자인을 공부하고, 미술치료를 하고 있는 선배 미낭도 붓을 잡았다. 함께 벽들과 창을 칠하고 곳곳에 포인트를 주었다. 소개문과 메뉴판도 그녀가 그려주었다.  
 
타로를 펼쳐놓은 그의 선배 미낭. 후배인 그가 물은 건, “무엇을 하며 다음엔 먹고 살까요?”였다. 그가 뽑은 카드엔 ‘치유’가 적혀있었다. ⓒ 원동업
 
가게의 이름은 맹그로브. 아열대 지역서 강물이 바닷물 접경지서 자라는 식물이었다. "황폐해 가는 땅을 움켜잡아 주민들의 삶을 지켜주는 나무". 그런 소개를 담은 그림책도 있었다. 맹그로브의 주인장 윤철원의 꿈도 그런 것이었다. 척박한 땅이지만 단단히 뿌리 내리고, 점차 자라 그늘을 드리워 지친 생명들을 키우는 공간, 그러한 존재. 가게는 차츰차츰 그의 모습을 닮아갔다. 편안하고 동시에 낯선 여행지, 라오스를 느끼게 하는 식당이었다.

"여러 나라를 가보았는데 나는 라오스가 좋았어요. 그 곳에서도 루앙프라방."

메콩강과 남강, 두 개의 강이 감싸고 도는 불상의 도시. 내륙의 나라 북쪽 산간지역. 오랜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유럽인들이 휴양처로 사랑했던 곳. 현재도 정말 맛난 크로아상과 바케트빵을 먹을 수 있고, 아름다운 수제공예품이 팔리는 견실한 시장이 있는 곳. 그곳서 만난 음식이 그들의 주식 국수 카오쏘이였다.

"이 맛난 국수 한 그릇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맛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도시 '맛집'이기도 한 단골집서 열심히 배웠다. 풍채가 있는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출가한 딸과 과년한 막내딸이 있는 패밀리 비즈니스 가게였다. 그는 자주 둘째딸의 예비사위로 오해받곤 했다. 아마도 그 위쪽 땅 윈난에 기원을 가진 국수일 듯 싶었다.

주변 베트남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와 어딘가 닮고 또 어느 면에선 다른 그 쌀국수를 그는 지난 4년 6개월여 동안 만들었다. 일요일 하루를 빼곤 달라지지 않는 일상이었다. 많은 알바와 임시 직원들도 그와 이곳 맹그로브를 거쳐 갔다. 떠날 때 그들은 다시 그와 만났으면 했었다. 유명한 음식방송 텔레비전 팀도 맹그로브에 왔었다.

"네 번쯤 방송출연을 거절했어요."

가졌던 돈을 투자하고, 인생을 갈아 넣으며, 매일매일 혼신을 다하는 자영업자들을 철원 씨는 알고 있었다. 그 식당 주인들은 자신의 분신같았다. 방송은 그런 이들에게서 '빌런'을 찾고(때로는 만들며) 방송을 만드는 것 같았다. 모욕당하는 것 같아, 내키질 않았다. 그러다 출연키로 마음을 바꾼 건 '그래도 내가 서있는 이곳 골목상권을 살리는 데 도움 하나 돼야지.'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내 가게도 어쨌든 좀 나아지겠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들이 지나갔다. 중요한 건 언제나 나의 마음, 나로부터 시작하는 힘이었다. 

"왜 접느냐구요? 좀 지쳤나? 올해 말까지는 일단 쉽니다."

 장사를 시작한 지 6개월여 만에 그는 신용보증재단서 3천쯤 첫 대출을 받았다. 그간 버텨온 '실적'과 '능력'으로 빌린 돈이었다. 1년 거치 2년 상환이 끝났을 무렵 다시 대출을 받았다. 코로나19가 본격화하면서도 신청했다.

점심시간에, 아침 8시에, 새벽 4시에…. 점차 일찍 일어나 줄을 섰지만, 기회를 얻을 번호표조차 받기 어려웠다. 대출은 라오스의 커다란 흰 코끼리 같았다. 작지 않은 삶의 무게였다. 그 무게를 벗으며 다시 온 길을 돌아보았다. 앞 길은 어쩌면 이전의 길이 가르쳐줄 것이었다. 

"조리기구, 냉장고, 기타 물건들…. 갖고 가시는 분이 그러세요. 대금을 드릴 수는 없다고."

폐업을 결정했지만, 그는 그걸 써붙이진 않았다. 다만 식당을 연 동안 자신의 국수를 먹어준 친구들에겐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 마치 집들이처럼 그는 사람들을 불러 한 상 대접을 했다. 특히나 근처의 단골들… 한겨레신문사, 법원 검찰청, 금성출판사 푸르넷 그리고 엘지 광고회사 희성애드의 '직장인들'에겐 특별한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개업 때도, 영업 때도 쓰지 않았던 이 기사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사를 남기고 싶었다.

"그 분들 덕분에 제가 먹고 산 거잖아요. 감사한 일이죠."  

풍성한 고수 아래 감겨있던 쌀국수는 한 젓가락씩 내게 옮겨왔다. 첫 젓가락질을 끝냈는데도, 그릇엔 뜨겁고 풍부한 국물, 말간 국수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물 맹그로브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서 자란다. 바닷물 토지에 뿌리박고, 하늘 향해 자란다. 5년여 잘 자란 식물들처럼 맹그로브의 주인장도 “스스로 잘 잘 컸다.”고 답했다. ⓒ 원동업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