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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는 굴곡의 역사 속에서 핀 '인천 차이나타운'. 청관회 회장인 윤의웅 화백이 그렸다. 그에게 청관(淸館)은 폐허 속 찬란히 빛나던 아름다움이자 닿을 수 없는 그리움 그리고 꿈이다.[기자말]
청관 폐허의 벽(1972, 종이에 수채, 36.0×54.0cm). 196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예술의 토양이 척박하던 시절, 오래되고 이국적인 정취가 흐르는 청관은 화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작품 속 장소는 현 한중문화관 뒤편. ⓒ 윤의웅 작가
 
폐허 속, 찬란히 빛나는

윤의웅 화백(78)에게 차이나타운에는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한다. 1960년대, 젊은 날의 그는 종이와 그림 도구를 짊어지고 중국인 거리로 나섰다.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도시. 아픈 역사가 남긴 '폐허'에서 그는 시간의 연속성이 낳은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 후로 청관을 찾아가 그리고 또 그렸다.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에도 낮은 집 지붕 아래 숨어들어 기어코 화판을 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배고프던 시절, 예술의 토양은 더 척박했어요. 고태미(古態美)와 퇴적미(堆積美)가 흐르는 청관은 창작 욕구를 쏟아붓게 하는 또 다른 자아이자 안식처였지요."

가난을 넘어 예술가의 삶으로 주저없이 걸어 들어갔다. 자유공원 아래 골목골목엔 속살을 스스럼없이 드러낸 남루한 집이 즐비했다.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삶을 지탱해 내고 있었다. 막 예술의 세계로 들어선 그는, 그 안에서 꺾이지 않는 희망의 빛을 보았다.

오늘, 옛 그림 속 청관은 이제 없다. "'돈때'가 묻었어요. 거리가 돈으로 치장된 거죠." 시간이 흐르고 낮은 목조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는 번쩍번쩍한 새 건물이 들어섰다. 거리는 여행자들의 차지가 됐다. 그는 더는 '이 동네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차이나타운을 찾는다.

"누구에게나 꿈 많던, 생애 가장 빛나던 시절이 있습니다. 이 거리에 오면, 순수한 열정만으로 붓을 잡던 젊은 날의 내가 떠올라요."

삶에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사이, 까까머리 소년은 어느덧 백발 노인이 됐다. 그림 속 풍경은 기억 저편에 머물러 있지만, 청관은 여전히 그 삶의 일부다.
 
청관회 회장인 윤의웅 화백. 작가의 화실에서. ⓒ 임학현 포토디렉터
 
차이나타운 페루. ⓒ 류창현
 
비단 장수와 요리사의 삶
 
인천 화교의 역사는 1883년 1월 1일, 개항과 맞닿아 있다. 1882년 조선과 청나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해 중국인의 개항장 거주와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했다. 1884년 4월 2일에는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맺어 현재의 차이나타운(선린동) 일대에 청나라 조계지를 형성했다.

낯선 배가 제물포항에 닿고 중국 상인들이 밀려들었다. 중국 상하이와 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직물을 수입해 파는 주단포목 상점과 잡화 상점, 중국식 여관인 객잔이 조용하던 바닷가 마을에 솟아났다. 1930년 당시 우리나라 화교 인구는 10만여 명, 인천과 그 주변은 50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방인에게 세상은 너그럽지 않았다. 화교 인구가 늘고 경제권을 쥐자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이어졌다. 1931년 조선화교배척사건, 중일전쟁(1937~1945년) 이후 전시 통제경제로 화교의 상업 활동은 극도로 위축됐다. 광복 직전까지 화교들이 먹고살 길은 춘장을 볶고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일뿐이었다.

1932년, 화교 곡창신(67)씨의 할아버지는 열두 살이던 그의 아버지와 함께 산둥 연태에서 인천으로 왔다. 당시 중국은 정세가 불안해 살기에 녹록지 않았다. 바다를 사이에 둔 단 330km, 많은 중국 사람이 살기 위해 산둥반도에서 인천으로 건너왔다.

곡씨 일가가 뿌리내린 곳은 용현동. 차이나타운에서 상권을 이루지 않은 화교는 대부분 외곽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곡씨의 아버지는 매일 새벽 숭의동 깡시장으로 가 직접 기른 농작물을 내다 팔았다.

어린 아들은 시장통에서 중국 호떡 사 먹는 재미에 눈 비비며 함께 길을 나서곤 했다. 우마차를 타고 건너던 '독정이고개', 분주함이 가득한 시장 한복판, 집으로 가던 길에 부옇게 밝아오던 새벽빛...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청관Ⅰ(1965, 종이에 수채, 73.0×52.0cm). 희망은 절망의 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사람들의 한숨으로 이뤄진 검푸른 풍경, 굴곡의 역사 속 차이나타운. 작가는 그 안에서 꺾이지 않는 희망의 빛을 보았다. ⓒ 윤의웅 작가

인천 토박이, 곡씨
 

그가 여섯 살 때, 농사짓던 곡씨네는 오늘날 숭의동공구상가가 있는 독갑다리에 중국요릿집을 연다. 이 가족사에는 아픈 시대상이 얽혀있다. 1960년대 화교 사회는 외국인 농지 소유 제한을 비롯한 각종 규제로 다시 파고에 휩싸인다. 그의 아버지도 농사는 더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생명처럼 여기던 땅을 팔고야 말았다.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스무 살이 되면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배울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으니까요."

꿈꿀 자유조차 없었다. 화교로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요리사, 재단사, 이발사로 살아갈 미래가 정해졌다. 그도 열일곱에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닥치는 대로 주방 일을 배웠다. '요리사 곡씨'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1970~1980년대 서울 강남의 유명 중식당을 거쳐 연안부두, 차이나타운까지 평생을 뜨거운 불솥 옆에서 살았다. 오늘, 그는 대만에서 요리를 배운 아들 승호(28)씨와 함께 차이나타운의 요릿집 '곡가(曲家)'를 지키고 있다.

"나는 인천 토박이예요. 친구들도 말해요. '곡 사장이야말로 오리지널 인천 사람'이라고. 자랑스러워요."

마음 깊숙이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고향을 그리고 살지만, 그는 인천 사람이다. 인천은 태어나 자라고 아이들을 키워낸, 몸과 마음이 머무는 '집'이자 언제든 따듯하게 품어주는 어머니의 품이기에.
 
1962년 5월, 중화루 요릿집에서 차이나타운 거리를 바라본 모습. 윤의웅 화백의 작품 속 풍경과 같다.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길성고조(吉星高照)'. 춘절을 맞아 붓글씨를 쓰는 곡창신씨. ⓒ 임학현 포토디렉터
 
인천 화교 140년, 홍등은 빛을 밝히고
 
인천 화교 140년. 개항기부터 인천에 뿌리내려온 노(老)화교는 이제 2500여 명에 불과하다. 고향을 그리며 저세상으로 마지막 길을 가거나, 이 땅에 태어나서도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다 떠난 사람도 많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도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에서 온 신(新)화교가 느는 추세다.

<한반도 화교사>와 <화교가 없는 나라: 경계 밖에 선 한반도 화교 137년의 기록>의 저자 이정희(54)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는 말한다. "화교는 우리 이웃입니다. 140년, 한국과 중국의 다리 역할을 하며 우리나라 발전에 기여한 바도 크지요. 열린 마음으로 그 존재를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풍미(豊美)'는 긴 시간 차이나타운만의 풍미(風味)를 지켜왔다. 조지미(69)씨의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나기 전까지 이 자리에서 '동순동(同順東)'이라는 무역상을 운영했다. 타일이 덧대어 있지만 벽면에는 아직 동순동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전쟁이 끝나고 시할아버지는 일본으로 떠나고, 시아버지만 남아 1957년 풍미를 차렸다. 당시 여인숙이 즐비하던 이 골목에서 유일한 음식점이었다. 부둣가 노동자와 뱃사람들은 이 집 빵과 만두로 주린 배를 채우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청관(1964, 종이에 수채, 73.0x52.0cm). 1960년대 중국요릿집 '풍미'. 조지미씨의 시부모가 선원과 부둣가 노동자를 상대로 음식을 팔았다. 한국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시할아버지가 동순동(同順東)이라는 무역상을 운영했다. ⓒ 윤의웅 작가
 
3대째 '풍미'를 지키는 화교 조지미씨. ⓒ 임학현 포토디렉터
 
조씨가 시부모로부터 식당을 물려받은 건 1979년, 테이블 세 개를 놓으면 꽉 차는 좁고 허름한 집이었다. 인천시청이 중구청 자리에 있을 때지만 장사가 잘되지는 않았다. 1980년대 짜장면을 빚기 전까지 화교학교 학생들에게 200원짜리 라면과 빵을 팔았다. 하루에 1만∼2만 원어치만 매상을 올려도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손때 묻은 가계부에는 부단히도 열심히 살았던 지난 시간이 녹아 있다. "앞으로만 갈 생각에 생활이 고단해도 힘든 줄 몰랐어요." 가난해도, 지금은 곁에 없는 남편과 함께하던 그 시절이 그는 그립다.

춘절(春節)이다. 음력 1월 1일, 우리는 모두 같은 새해를 맞는다. 차이나타운 골목골목 춘장 냄새 비켜간 자리에 중국 빵 만터우(饅頭) 찌는 냄새가 가득하다. 풍미 사람들은 빵과 만두를 빚느라 분주하다.

'길성고조(吉星高照).' 행운의 별이 높은 곳에서 비치기를, 운수 대통하기를. '인천 토박이' 곡창신씨는 정성스레 붓글씨를 써 내려가며 새해를 기다린다. 140년 굴곡의 역사를 뒤로하고 내일, 더 찬란한 빛의 홍등이 인천 차이나타운을 비출 것이다.

취재영상보기 (https://youtu.be/4pFcaIAsM34)
 
한국전쟁 전부터 무역상 ‘동순동’으로역사를 시작한 풍미. ⓒ 임학현 포토디렉터
 
인천화교역사관 ⓒ 임학현 포토디렉터
 
명절에 돈을 넣어주며 축복을 전하는 붉은 봉투. '홍바오(紅包)'. ⓒ 임학현 포토디렉터
  
윤의웅 작가는 사실성과 추상성을 아우르며 한국 현대 수채화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인천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림을 좇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서양학과에 다녔다. 이후 박문여고에서 미술 교사로 35년을 보냈다.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은 행복했다. 한국미술협회와 수채화 연구회 회원이자 청관회 회장이다. ⓒ 윤의웅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2년 2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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