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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돼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된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
 
제주 옛집에 굴뚝이 있을까? 적어도 제주 초가에서는 본 적이 없다. 다른 마을과 달리 굴뚝을 보러 가기보다는 초가에 굴뚝이 없는 특별한 이유를 찾아 나섰다.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제주성읍마을로 들어가 보았다.

   
제주 오름 다랑쉬오름에서 성읍마을 쪽으로 바라다본 정경. 오름은 중산간사람들에게 살아서는 삶터요 죽어서는 뼈를 묻는 곳으로, 살아서 죽어서도 연을 잇는 신앙 같은 존재다.ⓒ 김정봉

   
오름에 안긴 아늑한 마을, 성읍마을
 
제주는 오름 나라다. 368개 오름이 지슬(감자의 제주어)을 닮은 제주 땅에 올록볼록 솟았다. 그 가운데 한라산 북동쪽 중산간은 오름이 널려있는 '오름촌'이다. 오름촌 안에 반반한 땅을 찾아 지슬 싹처럼 움튼 마을이 있다. 성읍마을이다. 어촌도, 산촌도 아닌 제주 중산간의 독특한 문화를 간직한 오래된 읍성마을이다.
 
오래된 마을답게 1000년 묵은 느티나무와 600살 먹은 팽나무가 살고 있다. 마을은 옛날 정의현 현청 소재지였다. 처음 정의현은 성산 고성(古城)리에 있었지만 바닷가 외진 곳이라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세종 5년(1423년) 때니까 마을의 역사가 넉넉히 600년은 된 셈이다.
    
성읍마을 팽나무와 초가 마을 안에는 600년 묵은 팽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팽나무가 자라고 있다. 곁에 둔 1000년 산 느티나무와 어울려 마을의 깊이를 더한다.ⓒ 김정봉

 
 제주는 돌담의 나라다. 제주 사람들의 탯줄이요, 생명줄 같은 까무잡잡한 돌담은 밭과 밭, 마을과 마을을 거쳐, 온 제주를 휘돌아 이 마을에 닿았다. 남문, 동문, 서문을 한 바퀴 돌아 읍성(邑城)을 쌓더니 성안으로 들어와 꼬부랑 길, 올레를 만들었다. 성난 바람을 잠재워준다. 길이 반듯하면 좋지 않다는 제주 사람들의 믿음 또한 깊게 밴 굽은 길이다. 마을 지붕은 오름 허리에서 살랑대는 억새처럼 반질거리는데, 모양은 둥글납작해 오름 능선을 빼닮았다.
    
제주 올래담 고창환고택으로 안내하는 올래담. 시커먼 돌담은 밭에서 밭담 되고 마을에 서는 집으로 안내하는 올래담이 된다. 올래는 성난 바람을 다독이고 악령을 쫓느라 굽었다.ⓒ 김정봉

 
    
성읍마을 지붕 지붕은 한라산 기슭에서 자라는 새로 이어 반짝인다. 바람 무서워 잔뜩 웅크린 모양으로 둥글넓적하여 멀리 있는 오름 능선 닮았다.ⓒ 김정봉

   
마을은 오늘날 군청쯤 되는 근민헌(近民軒, 2014년 복원)과 중앙관리가 내려왔을 때 숙소로 사용한 객사(客舍) 그리고 향교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그야말로 제주 동쪽에서는 잘나가는 마을이었다. 이런 이유로 성안사람들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성읍에서 표선바닷가로 간다고 하면 촌에 간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마을 안에 오래된 집들이 남아있다. 대장간집(19세기말)을 제외하면 주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지어졌다. 남문에서 북으로 고평오고택, 대장간집(고상은고택), 객줏집(조일훈고택)이 나란히 서있다. 서문 근처에 고창환고택(이영숙가옥), 동문에 한봉일고택이 있다. 모두 국가민속문화재로 대접받는 소중한 집들이다.
   
한봉일고택 이문간 올래가 길면 대문을 두지 않거나 정낭이 대신한다. 올래가 길지 않고 거릿길에 붙어 있는 경우 이문간(대문간)을 둔다. 이 고택은 올래 없이 바로 대문이 있다. 이문간 바로 옆에 팽나무가 자라고 있어 마을에서 제일 그윽한 집이다.ⓒ 김정봉

 
 
객주집 통시(변소) 객주집 통시는 인상적이다. 객주집에 드나드는 물설어 하는 이를 배려한 것인지 큰 돌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까지 만들어 놓았다.ⓒ 김정봉
     
    
취사와 난방이 분리된 제주 살림집
 
제주민가의 기본구조를 보면,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가 서로 마주 보고 그 사이에 모거리가 비켜서 있다. 살림이 어렵고 가족이 단출하면 안거리 한 채에 살았다. 며느리를 보거나 가족이 늘면 따로 밖거리에 살림을 차려 나갔다. 육지의 사랑채와 안채처럼 남녀 간 성별분리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 세대를 분리한 것이 특징이다.
    
고평오고택 정경 안거리와 밖거리가 마주보고 있고 모로 모거리가 있는 제주 중산간의 전형적인 초가다. 관원의 숙소로 쓰인 집답게 집이 비교적 큰 편이다.ⓒ 김정봉

딴 살림을 차린 부모와 자식 간 두 세대는 완전히 독립생활을 했다. 정지를 따로 두든지, 한 정지를 쓰더라도 솥을 따로 썼다. 물론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밥을 먹지 않고 특별한 경우에만 며느리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척박하고 맵고 짠 섬 생활은 각자도생, 독자생존이라는 생존철학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안채와 바깥채 살림 공간은 깊고 침침하다. 좁은 공간에 구들(방)과 상방(대청), 고팡(곳간)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구들이 깔리지 않은 큰상방(큰마루방)을 중심으로 한쪽에 안방인 큰구들(큰방)과 고팡(곳간)을, 다른 편에 자식들 방인 작은구들과 작은상방을 두었다.
    
고창환고택 정지 제주 살림집의 가장 큰 특징은 난방과 취사가 분리된 점이다. 사진 왼쪽이 밥 짓는 곳이다. 다른 편에 부뚜막 없이 불 때는 군불아궁이가 따로 있다.ⓒ 김정봉

 
    
고평오고택 정지 밥 짓는 곳은 돌 세 개를 세워 그 위에 솥을 걸어 화덕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돌 세 개는 여신인 화신(火神)으로 숭배됐다는 연구도 있다.ⓒ 김정봉

고팡은 반드시 큰구들 옆에 두는데 고팡을 관리하는 사람이 집안의 주도권을 갖는다는 의미다. 부모가 나이가 들거나 손주를 보면 밖거리에 나가 있는 자식에게 안거리를 내주게 된다. 이를 '고팡물림' 한다고 한다.
 
취사와 난방은 분리됐다. 밥 짓는 곳과 군불아궁이(제주어로 '굴묵'이라 함)를 따로 두었다. 취사는 부뚜막이 아니라 화덕(솥덕)에서 했다. 화덕은 돌 세 개를 세워 밥솥과 국솥, 서너 개를 걸어서 만들었다. 난방은 정지의 군불아궁이를 이용하거나 방이 두 개인 경우 정지와 별도로 불 때는 조그만 공간(제주어로 '굴목'이라 함)에 군불아궁이를 두어 방을 덥혔다. 난방과 취사, 조명을 위해 상방이나 정지에 돌화로인 '부섭'을 두는 집도 있었다.
    
고평오고택 안채의 굴목 정지와 별도로, 한 사람 겨우 드나들 정도로 좁은 공간에 불 때는 아궁이를 따로 두었다. 육지의 ‘아랫정지’와 비슷하나 작고 부뚜막이 없이 군불아궁이만 있는 점이 다르다. ⓒ 김정봉


성읍마을 굴뚝
 
밥 짓는 곳과 군불아궁이에 굴뚝은 없다. 이유가 뭘까? 대개 추운 북쪽지방 굴뚝은 높고 따뜻한 남쪽지방으로 갈수록 낮아지며 제주도에 와서는 사라져 민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제주의 인문, 자연환경과 관련 있다.
 
자연환경으로는 따뜻하고 바람이 많은 날씨와 땔감의 부족을 들 수 있다. 인문환경으로는 애당초 구들과 굴뚝의 보급이 늦어진 데다 취사와 난방이 분리된 채, 화덕과 부섭을 사용하는 제주의 독특한 난방문화가 폭넓게 자리 잡으면서 구들과 굴뚝의 북방문화 유입을 늦추었을 가능성이 있다.
 
제주는 바람이 많아 바람에 쓰러지고 열을 쉽게 빼앗기는 높은 굴뚝은 생각조차 안 했을 듯싶다. 그렇다고 굴뚝을 낮게 만들면 세찬 바람에 연기가 역류하기 십상이어서 낮게 만들지도 못했다.
 
말똥, 소똥을 땔감으로 사용하는 제주는 늘 땔감이 부족했다. 물 부족, 땔감 부족에 시달려온 제주 사람들은 땅으로 꺼지는 물 한 방울도 아까워 '촘항'에 받아쓰고, 하늘로 솟는 한 줌 연기가 아까워 구들 밑 고래(연기가 통해 나가는 길)에 가두려 했다. 연기가 쉬 빠지게 하기보다는 굴뚝을 없애 불김이 고래에 오래 머물게 한 것이다.
 
아궁이 옆에 늘 널돌을 준비해 놓고 불을 지핀 다음 땔감이 오래 타도록 널돌로 아궁이를 막은 것을 보면 매우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물론 널돌은 바람으로부터 화재를 막는 역할도 하였다.
 
기술과 문화적인 이유도 있다. 제주에 구들이 들어온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처음에는 객사나 동헌에 먼저 설치되고 차츰 민가에 보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가의 구들과 굴뚝 기술은 그만큼 부족했다. 여기에 제주의 독특한 난방, 취사문화가 구들과 굴뚝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더디게 한 건 아닌지 모른다.
    
성읍마을 객사 굴뚝 객사 굴뚝은 동서 익사(날개집)에 하나씩 두 개 있다. 익사 벽체와 기단과 똑같은 무늬의 돌을 사용하여 숨은 것처럼 보인다.ⓒ 김정봉

 
    
성읍마을 근민헌 굴뚝 근민헌은 정의 현감이 사무를 보던 청사로 굴뚝은 두 개 있다. 굴뚝은 벽체와 똑같은 색으로 맞추어 일부러 숨긴 듯 ‘은폐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봉

 
그렇다면 굴뚝이 전혀 없었을까? 성읍마을 객사와 근민헌에 굴뚝이 남아 있다. 2014년에 복원돼 예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남아 있는 굴뚝은 현무암으로 둘러싸인 튼튼한 굴뚝이다. 거무튀튀한 벽체와 같은 무늬, 같은 색이어서 굴뚝은 숨은 듯 보인다.
 
성읍마을은 제주라 해도 겨울이면 해가 일찍 떨어지고 찬 바람이 부는 중산간마을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민가에 굴뚝이 없었지만 굴뚝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육지에는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구들과 굴뚝기술, 이를 테면 고래개자리, 굴뚝개자리, 내굴길(연도)로 열을 다스리고 바람에 끄떡없는 굴뚝을 만들 수만 있었다면 중산간의 맵짠 날씨에 굴뚝이 없을 이유는 없다. 민가에는 없고 객사와 근민헌에만 있는 굴뚝 '존재'가 이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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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