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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는 억새와 같으면서도 다른 식물이다. 같은 볏과의 한해살이풀이지만 자생지역과 색깔, 키 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장호철
  
바야흐로 익어가고 있는 갈대는 커다란 키의 아랫부분은 아직도 푸른빛이고, 윗부분은 누렇게 익어서 특유의 솜이 붙은 갈색 이삭을 늘어뜨렸다. ⓒ 장호철
  
[이전 기사] 지친 마음 어루만져주듯... 반짝이던 황매산 '억새 물결'

황매산 억새를 만나고 나서 순천만 습지의 갈대를 만났다. 불과 닷새 뒤인 지난 7일 일이다. 그러나 두 만남 사이에는 어떤 인과 관계도 없다. 황매산을 찾은 건 억새를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순천만에는 여수 가는 길에 잠깐 들렀을 뿐이다. 순천만에 가는 것이 모두 갈대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니지 않은가.

억새와 갈대는 같으면서도 다른 식물이다. 같은 볏과의 한해살이풀이지만 억새와 갈대는 자생지역과 색깔, 키 등이 서로 다르다. 억새는 주로 산이나 비탈에, 갈대는 냇가나 습지, 물가에 무리를 이뤄 자란다. 은빛이나 흰빛을 띠는 억새와 달리 갈대는 고동색이나 갈색을 띤다. 또 억새의 키는 1~2m에 그치지만 갈대는 2~3m에 이르러 분명히 구분된다.

그러나 군락지에서 만나는 억새와 갈대가 주는 감동은 다르지 않다. 온 산의 능선과 비탈을 뒤덮은 황매산 억새에 지친 마음을 위로받았다면, 순천만의 거대한 갈대 군락에서는 자연이 연출하는 생태계의 신비와 조화에 압도당했다.

갈대의 감동은 억새와 다르지 않다

전남 순천시와 고흥군, 여수시로 둘러싸여 있고, 길게 뻗은 고흥반도와 여수반도로 에워싸인 순천만은 세계 5대 연안(沿岸) 습지다. '연안 습지'는 "만조 시에 수위(水位) 선과 지면이 접하는 경계선으로부터 간조 시에 바다 쪽으로 수심 6m까지의 지역"을 이르는데, 세계의 대규모 습지 대부분을 차지한다.
 
순천만의 해수역은 75㎢가 넘는데 5.4㎢(160만 평)의 빽빽한 갈대밭과 끝이 보이지 않는 22.6㎢(690만 평)의 광활한 갯벌로 이루어져 있다. ⓒ 장호철
 
갈대의 북슬북슬한 씨앗 뭉치가 햇살에 따라 은빛과 잿빛, 금빛 등으로 바뀌는 것도 장관이다. ⓒ 장호철
  
 
갈대숲에 한 마장만 떨어져도 마치 사람들의 모습이 실제보다 훨씬 조그맣게 느껴지는 비현실적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 장호철
      
순천만의 해수역은 75㎢가 넘는데 5.4㎢(160만 평)의 빽빽한 갈대밭과 끝이 보이지 않는 22.6㎢(690만 평)의 광활한 갯벌로 이루어져 있다. 겨울이면 흑두루미, 재두루미, 노랑부리저어새, 큰고니, 검은머리물떼새 등 국제적으로 보호되고 있는 철새 희귀종들이 찾아온다. 순천만에서는 우리나라 전체 조류의 절반 가량이나 되는 230여 종의 철새가 발견된다.

순천만이 2003년 습지 보호지역 지정, 2006년 람사르협약 등록, 2008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41호로 지정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넓은 갯벌과 강 하구의 갈대밭, 염습지, 하천, 그리고 산들이 어우러진 순천만은 한국을 대표하는 연안 습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생태계를 형성했다.

바로 순천시가 '대한민국 생태수도 순천'이라는 도시 슬로건을 내세우는 이유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지방 도시인데 슬로건으로 '수도'를 내세우는 곳이 두 군데가 더 있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경북 안동과 '대한민국 교육 수도'라는 대구광역시다. 글쎄다, 다른 데는 몰라도 순천이 '생태수도'라는 걸 우리는 기꺼이 동의하기로 했다.

담양에서 하룻밤을 묵고 순천만에 닿은 때는 정오가 겨워서였다. 충북 음성, 전북 군산과 고창을 거쳐 창원, 옛 마산을 도는 길고 지루한 여행에 나는 길동무로 아내를 택했다. 관광이 아니라 사진 몇 장 찍느라고 서둘러 도는 지루한 여정에서 순천과 여수는 아내에게 주는 보너스였다.

"오는 길에 순천만에 들렀다가 여수에서 해상 케이블카를 타자고!"

순천만은 물론 초행이 아니다. 2010년 5월에 보성을 거쳐 순천만에 들렀었다. 갈대밭은 온통 새파랬는데, 주말이라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사람에 밀려서 움직일 지경이었다. 인파에 질린 데다가 웬일인지 갈대밭의 흥취가 전혀 지금 같지 않았다. 가까운 갈대밭을 한 바퀴 돌고 언제 평일에 다시 찾자면서 우리는 서둘러 그곳을 떠났었다.

'대한민국 생태수도'? 맞다

그리고 8년 만이다. 평일이었고 우리는 맞춤한 늦가을에 다시 순천만을 찾은 것이다. 8년 전에 비기면 아마 순천만 습지는 충분히 정비되었을 것이다.

올해 순천시가 관광객 천만 명 시대를 연다고 하는데 그 6할(6백만 명) 이상을 맡은 데가 습지를 포함한 순천만 국가정원이란다. 관광객은 주로 국가정원으로 몰리는 듯하고, 습지를 찾은 이는 140만을 겨우 넘는다고 한다. 어쩌면 습지의 생태계에는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무진교 아래로 흘러 순천만으로 드는 물은 순천 도심을 가로질러 온 동천(東川),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수역인 기수(汽水)지역이다. ⓒ 장호철
  
무진교 아래 생태체험선 선착장은 포구의 풍경 따위가 익숙하지 못한 내륙 사람의 눈에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장호철
 
동천(東川)을 가로지르는 아치형 다리 무진교를 건너면 갈대숲 탐방로로 이어진다. 무진교? 그렇다. 순천 출신의 소설가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의 그 무진(霧津)일 것이다. 순천만 국가정원 안에 2010년 문을 연 순천문학관은 그와 동화작가 정채봉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세워졌다.

무진교 아래로 흐르는 물은 순천 도심을 가로질러 온 동천,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수역인 기수(汽水)지역이다. 무진교 아래 생태체험선 선착장에는 배  몇 척이 정박하고 있다. 포구의 풍경 따위가 익숙하지 못한 내륙 사람의 눈에 그 '선창(船艙)'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비록 관광객을 태우고 동천을 오르내리는 배이긴 하지만 말이다.

정비된 길을 따라 갈대밭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조금씩 그 장관에 압도되기 시작했다. 8년 전에 들렀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 5월엔 푸른 빛이었던 갈대가 지금 바야흐로 갈색으로 물들고 있어서일까. 한 마장만 떨어져도 사람들의 모습이 실제보다 훨씬 조그맣 보이는 비현실적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

갈대는 시방 바야흐로 익어가고 있었다. 커다란 키의 아랫부분은 아직도 푸른빛이고, 윗부분은 누렇게 익어서 특유의 솜이 붙은 갈색 이삭을 늘어뜨렸다. 갈대의 북슬북슬한 씨앗 뭉치가 햇살에 따라 은빛과 잿빛, 금빛 등으로 바뀌는 것도 장관이다. 갈대는 줄기보다 잎이 무성하여 바람이 불면 금방 한쪽으로 쏠린다. 쉽게 마음이 변하는 사람을 '갈대'로 비유하는 이유다.
 
탐방로 곳곳에서 만난 베이지색 조끼를 입은 어린이들은 인근 인안초등학교 생태탐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어린이 생태해설사’였다. ⓒ 장호철
      
  
휘도는 탐방로 저편으로 떠오르는 새떼들의 모습과 주변 풍경은 저마다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갈대밭을 배경으로 살갑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 장호철
 
 
멀리 가까이 점점이 눈에 들어오는 탐방객을 품은 주변 갈대밭은 황매산 억새밭과 마찬가지로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메밀밭 같기도 했다. ⓒ 장호철
    
  
순천 도심을 가로질러 온 동천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수역인 기수(汽水)지역이다. 동천에 물새떼들이 노놀고 있다. ⓒ 장호철
        
  
동천 건너편의 탐방객들.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과 홀로 생각에 잠간 사람의 모습이 마치 무슨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장호철
 
나무 데크로 만든 갈대숲 탐방로의 길이는 1.2km. 갈대는 말할 것도 없고 갯벌 생물과 철새를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자연생태 학습장이다. 멀리 가까이 점점이 눈에 들어오는 탐방객을 품은 주변 갈대밭은 황매산 억새밭과 마찬가지로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메밀밭 같다.

갈대 군락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용산 전망대에 오르지 않고는 갈대밭을 한눈에 담을 수 없다. 그게 산등성이와 비탈에 서면 억새밭이 한눈에 들어오는 황매산과 다른 점이었다. 곧은 일직선으로 또는 좌우로 휘돌아 이어지는 탐방로는 대개 비슷했지만, 그 풍경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저 멀리 순천만으로 사라지는 동천의 물길, 그 서편 하늘에 간명한 붓놀림 같은 구름 조각, 휘도는 길 저편으로 떠오르는 새떼들, 동천 너머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시내에 떠다니는 물새들... 그것들은 저마다 무연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갈대밭을 배경으로 살갑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갈대밭에서 만난 어린이 생태해설사들

갈대 군락을 사진기에 담으며 느릿느릿 걷다가 우리는 탐방로 곳곳에 베이지색 조끼를 입은 어린이들을 만났다. 인근 인안초등학교 생태탐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어린이 생태해설사'였다. 이들은 저학년 아우들을 앉혀 놓고 각자 공부해온 생태를 해설하고 있었다.
   
인근 혁신학교인 인안초등학교의 생태탐사 프로젝트. 6학년 어린이들이 저학년을 대상으로 생태를 해설하고 있다.ⓒ 장호철
 
 
1년쯤 공부한 6학년 어린이 생태해설사들은 꽤 해박한 지식으로 저학년과 탐방객들에게 생태를 가르쳐 주었다.ⓒ 장호철
  
순천만 습지의 갈대군락에 서식하는 게들. 어린이 해설사들은 이 게들에 대해서도 꿰고 있었다.ⓒ 장호철
           
우리는 어린이들의 공부를 한동안 지켜보았고, 해설이 끝난 뒤 잠깐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처에 있던 선생님의 도움 말씀을 통해 나는 단박에 이 상황의 성격과 의미를 눈치챘다. 2011년도만 해도 폐교 위기를 겪어야 했던 인안초등학교가 살아난 것은 2012년부터 무지개학교(전남 혁신학교)로 지정되면서라고 했다. (관련 기사 : 운동장에 국기가 3개, 이 초등학교가 궁금하다)
 
혁신학교 선정 후에 획일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벗어나 학생 배움 중심 등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운영하면서 학생 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수행하는 생태탐사 프로젝트는 1년 동안 주어진 과제를 공부한 6학년 학생들이 하급생들을 대상으로 생태를 해설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마침 우리가 간 날이 바로 그 날이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활동을 흐뭇하게 바라보았고, 곁에서 지켜보는 탐방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이들은 주위의 시선을 쑥스러워하면서도 야무지게 해설을 했고, 탐방객들의 뜻밖의 질문도 잘 소화해 냈다. 사람들은 손뼉을 쳐서 어린이들의 노력을 치하했다.
 
아이들을 지켜보던 여자 선생님에게 내가 갈대밭에 관해서 묻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물어보세요. 쟤들이 저희보다 더 많이 알아요."

정말이었다. 아이들은 내 물음에 거침없이 답변했고, 선생님은 자랑스럽게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감동은 전이된다. 아내와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이도 학교에서 퇴직했다우. 아내가 말했고, 그이가 반색을 했다.

나는 그를 비롯하여 아이들을 지키고 있는 선생님들이 자랑스러웠다. 우리가 한때 꿈꾸었던 교실이, 혁신학교에서 이런 젊은 후배 교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기꺼웠던 것이다.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갈대숲의 빛깔은 달라 보인다. 앞부분은 완전히 익은 잿빛 중간은 아직도 누런 빛이 남아 있다.ⓒ 장호철
  
붉게 반짝이는 갈대숲 저쪽으로 생태탐사에 나선 인안초등 어린이들이 탐방로를 가로지르고 있다.ⓒ 장호철
  
흑두루미 소망 터널에는 탐방객이 소망을 써놓은 손바닥만 한 나무판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 장호철
        
우리는 용산전망대에 오르지 않고 탐방로를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무진교를 건넜다. 순천만 자연생태관에도 천문대와 순천만 역사관에도 가지 않았다. 낭트 정원과 순천문학관에도 들르지 않았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흑두루미 소망 터널에는 탐방객이 소망을 써놓은 손바닥만한 나무판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그 나무판 하나에는 "안녕 ㅠㅠ 다음 여행은 여수…… 우리는 이만 순천을 떠난다."라고 적혀 있었다. 아내가 불쑥 내뱉었다.

"여보, 됐우. 여수엔 안 가도 돼. 갈대밭만으로도 충분해. 바로 마산으로 갑시다."
"아니, 해상 케이블카 타기로 했잖아."
"됐다니까. 나 그거 부산 송도에서 타 봤어. 그냥 가도 돼요."


순천만에서 머문 시간은 짧았다. 그러나 우리는 갈대밭 탐방이 더할 수 없이 만족스러웠다. 그건 갈대밭이 연출해준 풍경 때문이라 해도, 거기서 만난 선생님과 어린이들 덕분이라고 해도 좋았다. 순천만 습지를 벗어날 즈음, 길가의 인안초등학교를 지나치면서 우리가 마주 보며 빙그레 미소지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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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기사 포함, 모두 1천여 편의 글을 썼다. 2019년 5월,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에 연재한 '친일문학 이야기'를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으로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