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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술계의 큰 화제 가운데 하나가 원로 미술사학자 강우방이 후배 미술사학자 유홍준의 새로 나온 책 <추사 김정희-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창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책에 인용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작품 가운데 상당수가 위작이라고 지적한 예민한 문제이다.

가는 곳마다 '어느 쪽 이야기가 맞느냐' 하는 논쟁이 벌어지고, 필자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한다. 이들의 논쟁을 완전히 해결할만한 능력이 못 되어 대충 대답하고 넘기지만, 마음은 편치 않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너무 자주 반복되고 흥미 위주의 엉뚱한 방향으로 시선이 흘러가니 이대로 넘길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김정희의 것으로 전해오는 작품 가운데 위작(僞作)이 많으니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해 김정희의 서화(書畵)에 대해 올바른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고 지적해왔다. 그러나 미술계에는 김정희의 서화에 대해서 모르는 이도 없고, 제대로 아는 이도 없다고 할 정도로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아 올바른 학술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작품의 진위에 대한 감정 문제에서는 이런 불화가 더욱 심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뜻을 나타내는 것을 꺼려했다. 감정 문제로 치달으면 정확한 근거에 의한 합리적인 주장이 아니라, 감성적인 인상비평에 그치거나 권위를 내세워 자신의 뜻을 강하게 주장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런 경향은 김정희 작품의 감정이 어려운 면도 있지만, 작품 가격이 매우 높아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정희 작품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나 미술사의 발전을 위해서도 이런 태도는 지양돼야만 한다.

이번에 강우방이 제기한 김정희 작품에 대한 위작 지적은 일견 타당한 면이 없지 않으나, 위작이라는 정확한 근거없이 지나치게 감정적인 어조로 접근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술사학자 강우방-유홍준의 '김정희 진위 논쟁'을 보며

고서화에 대한 위작 지적은 정확해야 한다. 고서화는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것들이라 증명할 만한 객관적인 주변 증거들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로지 작품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위작 증거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증명하기 어렵다. 위작이 분명해도 심증으로만 위작이라고 지적한다면 다시 미궁에 빠지는 악순환이 지속된다. 그래서 위작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심미안에 입각한 추론이든 객관적 증명이든, 누구나 합리적인 이해가 가능한 정도의 증거들을 채집해 제시해야만 위작이라는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김정희 작품들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의 하나가 이번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삼성미술관(리움) 소장의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다. 이 작품은 1950년대 미술계에 처음 나타났을 당시부터 진위 논란이 많았던 작품이다. 그러나 유력한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자리잡은 이후 이러한 의문이 눈 녹듯 사라지고 명품으로 자리 잡았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이 작품이 김정희의 친필이 아님을 느끼고 명확한 근거를 들어가며 위작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소장 미술관의 권위와 권위있는 연구자들의 다른 주장에 묻혀 미술계에 이러한 의견이 반영되지 못했다. 마침 미술계에 이 문제가 다시 대두된 상황에서 필자는 이 작품이 진품이 될 수 없는 뚜렷한 근거를 제시해 김정희 서화의 진위를 판단하는 준거로 삼고자 한다.
"산은 드높고 바다는 깊으니, 하늘에서 즐기고 바다에서 노닌다"는 뜻의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 삼성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진품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삼성미술관
"산은 드높고 바다는 깊으니, 하늘에서 즐기고 바다에서 노닌다"는 의미의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는 현재 <산숭해심>과 <유천희해> 두 점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두 작품은 종이 질이나 작품의 상태 등으로 미뤄볼 때 같은 시기에 함께 제작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크기나 형태 등으로 미루어 나무 현판을 제작하기 위해 쓴 글씨로 보인다.

어떤 이는 본래 글씨가 한 장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인데, 너무 길어 두 점으로 나눈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실제 이 작품은 각각 세로 42cm, 가로 207cm의 보기 드문 크기다. 먹으로 종이에 쓴 글씨 가운데에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무 현판까지 범위를 확대하면 규모 면에서 특별히 대단한 것은 아니다.

김정희의 글씨 가운데 이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것도 여러 점 있다. 절필 작품이라는 <판전(板殿)>의 글씨도 그렇고, 은해사의 <불광(佛光)>이나 <대웅전(大雄殿)>, 그리고 <보화루(寶華樓)>나 <일로향각(一爐香閣)> 등의 글씨도 규모 면에서 <산숭해심 유천희해>를 훨씬 압도한다.

또한 어느 학자는 두 점으로 나뉘는 과정에서 이름 인장이 없었는데, 어떤 이가 인장을 의도적으로 찍어 넣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전제 자체가 이 작품에 많은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가 도판으로 처음 소개된 것은 1957년 명동 대한고미술협회 회관에서 있었던 고미술협회의 행사인 고미술품감상회에 출품되면서이다. ⓒ 황정수
<산숭해심 유천희해>가 도판으로 처음 소개된 것은 1957년 명동 대한고미술협회 회관에서 있었던 고미술협회의 행사인 고미술품감상회에 출품되면서다. 이때부터 이미 <산숭해심>과 <유천희해> 두 작품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전시회는 경매를 전제로 한 행사였는데, 각 24, 25번 작품이었다.

당시 전시 도록에 따르면 이 작품은 고미술품을 많이 소장하였던 친일 관료 벽수(碧樹) 윤덕영(尹德榮)의 구장품이라고 적혀 있다. 이 경매에서 <산숭해심>은 55만환, <유천희해>는 121만환에 낙찰됐다고 한다. 두 점은 각각 다른 곳에 판매되었는데, 나중에 삼성미술관 측에서 모두 구매해 지금은 두 점 모두 삼성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삼성미술관이 소장하면서 이 작품은 <세한도>, <불이선란>과 함께 김정희의 대표작 반열에 올랐다. 이 작품이 좋다는 근거는 크게 몇 가지로 제시된다. 우선 보기 드문 대작이라는 점이다. 하나로 이었을 때 4m를 넘기는 대작이다. 또한 기법 면에서 갈필을 사용해 속도감과 힘을 담은 추사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한다.

그리고 글씨의 균형감과 안정감 그리고 움직임 등 어느 하나 다른 작품에 뒤떨어지지 않는 뛰어난 글씨라는 점도 지적한다. 특히 '산(山)'자의 획과 구성에서는 일상적인 붓 흐름에 역행해서 쓰는 특이한 필법을 사용하는 등 다른 서예가들은 상상할 수 없는 서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또한 높게 평가됐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러한 장점들이 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진품이라 보기 어려운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 근거를 차례로 들어본다.

위작의 근거
위는 삼성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산숭해심(山崇海深)>. 아래는 은해사가 소장하고 있는 <산해숭심(山海崇深)>. ⓒ 황정수
첫째, 첫 구절인 '산숭해심(山崇海深)'이란 문구의 '숭(崇)'과 '해(海)' 두 글자가 바뀌어 있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김정희의 <실사구시잠(實事求是箴)>에 있듯이 보통은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 하였는데, 김정희가 특유의 예술적 감각으로 글자의 순서를 바꾸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현재 전하는 일제강점기 이전의 나무 현판들은 거의 '산해숭심'이라는 글자 순서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정희의 글씨 현판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은해사에 있는 매우 오래된 현판도 <산해숭심>이라고 돼있고, 다른 곳에 있는 현판들도 대부분 '산해숭심'이란 문구로 전한다. 김정희 본인 스스로 '산해숭심'이라고 했고, 세상에 전해지는 현판들도 대부분 '산해숭심'인데, 이 글씨는 '산숭해심'이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김정희의 글씨를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던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스승의 글씨를 임모(臨模, 동양 서화묘사의 한 방법으로, 원전을 옆에 두고 이것을 보며 그리는 것)한 것 중에 <산해숭심>이 있는 것으로 봐도 김정희가 본래 쓴 글씨는 '산해숭심'이었을 것이다.

둘째, 글자 구성에서 '공간 감각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 김정희인데, 글씨의 획이 제대로 이뤄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소위 결구(結構)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서예 작품으로서의 올바른 글씨로 보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산숭해심'에서 '산(山)'자의 경우는 좌우가 바뀐 듯한 어색한 모습을 보인다. 마치 손을 바꿔 왼손으로 쓴 듯해 일반적인 필법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이를 김정희의 천재성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오히려 '산해숭심'으로 돼있는 다른 현판의 좌우가 바뀐 '산(山)'자가 필획의 순서에 맞고 훨씬 자연스러워 보인다.

또한, 김정희의 글씨는 단호하고 필획이 빨라 거침없는 필획으로 유명하다. 이는 김정희가 중국을 다녀오며 중국 저명 서예가들의 필력을 배운데다, 먹이 잘 스미는 고급 중국 종이를 쓰면서부터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이 작품의 글씨는 느릿느릿한 필력에 그림을 그리듯 획이 불규칙하게 흘러간다. 그의 진품으로 알려진 분명한 글씨들과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인다.
삼성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산숭해심(山崇海深)>의 '해(海)' 자. 일부 필획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황정수
셋째, <산숭해심>의 '해(海)'자를 보면 글자의 획 가운데 일부 필획이 제대로 연결돼 있지 않다. 붓의 획이 일관되게 진행되지 않고 붓질을 진행하다가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데 획이 이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은 정상적인 서예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이 작품이 진품이 아니라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이다.

김정희와 같은 속필을 사용하는 능수들의 글씨에서는 나올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나무 현판이나 탁본을 바탕으로 글자를 임모할 때, 부분적으로 작업을 한 다음 다시 연결하는 경우에나 나올 수 있다. 나무 현판으로 만들어진 후 현판이 외적인 힘에 의해 변형된 흔적이 많을 때 이런 끊김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이 글씨는 나무 현판을 바탕으로 임모한 작품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니 이 '해'자 한 글자만 보더라도 이 작품은 김정희가 직접 쓴 친필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삼성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 붓의 필획이라고 보기 어려운 덧칠이 지나치게 많다. ⓒ 황정수
넷째, 덧칠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 또한 의문을 더한다. 김정희뿐만 아니라 일정 수준의 전문 서예가들은 한 획을 한 번에 쓰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붓을 천천히 사용하는 예서나 전서를 쓰는 경우에도 호흡만은 한 호흡에 이뤄내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누구보다 강한 필력에 빠른 붓질을 선호한 김정희가 큰 글씨를 쓴다고 덕지덕지 덧칠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떤 학자는 김정희가 글씨의 완성을 위해 덧칠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의견을 피력하는데, 이는 김정희 서예의 경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더러 그의 예술을 모독하는 견해다.

붓을 일상 필기도구로 사용했던 조선시대 전문 서예가들의 작품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덧칠이 많은 조선시대 명필의 글씨가 있다면 이는 글씨를 모작한 임모본을 만들 때 나오는 기능적 현상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전문적으로 임모하는 전문가들이 많이 있었다. 어느 학자가 김정희가 덧칠을 자주 한다는 판단을 했다면, 그는 후대인이 임모한 글씨를 보고 진품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다섯째, 김정희의 글씨로는 이례적으로 종이를 많이 이어 붙여 쓰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희는 결벽증이 있다고 할 정도로 문방사우에 대해 편애가 심했다. 좋은 종이에 좋은 먹과 좋은 붓을 썼으며, 편지나 초고를 쓸 때가 아니면 늘 잘 갖추어진 좋은 종이를 사용했다. 종이를 이어 붙이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이 작품이 비교적 크기가 크다 하나, 세로 42cm 정도의 조선 특산 장지이다. 당시에 조선 장지는 1m 이상의 크기가 제작되었으니 두 장만 연결하면 되는데, 굳이 작은 종이를 여러 장 이어 붙일 이유가 전혀 없다.

이런 조각을 사용하는 경우라면 김정희는 글씨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종이를 구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김정희가 종이를 못 구할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쪼가리 종이를 붙여 쓸 이유가 없다. 김정희는 글씨를 쓸 때 주로 옥판선지나 당지 등 좋은 중국 종이를 주로 사용했다. 그러니 이렇게 중요한 글씨를 썼다면 중국 종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정희의 글씨라 전해오는 것 가운데 이런 장지를 사용한 것은 대개 임모인 경우가 많다. 장지는 매우 질긴 특성이 있는데 글씨나 그림을 그리는데 사용하기도 했지만 임모를 하는 경우에도 많이 사용했다.
사진 왼쪽부터 완당(阮堂), 김정희인(金正熹印), 유천희해(遊天戱海)의 인장.ⓒ 황정수
여섯째, 이 작품의 인장(印章)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 속에 있는 인장은 모두 세 개다. <산숭해심>의 마지막에 있는 '완당(阮堂)'이란 인장과 <유천희해>의 마지막에 있는 '김정희인(金正喜印)'이란 두 개의 인장은 누군가 김정희 작품임을 드러내기 위해 찍어 넣은 가짜 인장이다. 인장의 크기도 맞지 않고 인장 찍은 격식도 당시의 풍습에 맞지 않는다. 또한 전각 솜씨나 찍힌 흔적 등도 모두 훗날 조작한 흔적이 역력하다. 글씨가 진품이 아님을 알면서도 세상을 속이기 위해 조작한 흔적이다.

이 가운데 정상적인 인장은 <유천희해>의 두인으로 쓰인 '유희한인(游戱閒人)'이라 새겨져 있는 인장 하나뿐이다. 그러나 이 인장의 주인은 알 수 없다. 김정희가 사용한 인장이 아닌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을 임모한 사람의 것으로 보인다. 인장의 전각 솜씨나 인주의 빛깔, 종이에 배어들어간 느낌 등을 고려하여 볼 때 일제강점기 즈음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임모본일 가능성
정벽가 소장의 <유천희해(遊天戱海)> 탁본과 임모본.ⓒ 추사박물관 제공
그렇다면 삼성미술관 소장의 <산숭해심 유천희해>의 정체는 무엇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나무 현판으로 있었던 김정희 글씨를 보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임모한 임모본이다. 먼저 현판의 탁본을 뜬 후 다시 이를 바탕으로 임모한 글씨로 추정된다. 이와 유사한 형태로 김정희와 가까웠던 정벽(貞碧) 유최관(柳最寬)의 후손 집에 전하는 <유천희해>가 있다. 모두 두 점인데 한 점은 나무 현판을 탁본한 것이고, 다른 한 점은 탁본을 바탕으로 똑같이 임모한 것이다.

이 임모한 글씨를 삼성미술관 소장의 <유천희해>와 비교해 보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종이도 유사한 장지를 썼고, 글씨의 획이나 비백 구성에서도 비슷한 양태를 보인다. 이러한 과정을 참고해보면 삼성미술관 소장의 <산숭해심 유천희해>는 실제 김정희가 쓴 진품 글씨가 아니라 임모한 글씨임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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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