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는이야기

서울

포토뉴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진 해상도가 높아지고, PC 모니터 해상도와 크기, 인터넷 속도 등이 향상 되면서 큰 사진이 선호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에 오마이뉴스가 일부 콘텐츠에 한해 큰 사진 기사를 선보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말]
근현대문화유산 불광대장간의 모습. ⓒ 김민수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흐른다. 망치질 두어번 했더니만 옷이 다 젖을 정도다. 폭염만으로도 견디기 쉽지 않은데, 정치권을 중심으로 들려오는 소식은 불쾌지수를 한껏 높인다.

이 무더운 날, 극한직업에 종사하는 분들을 만난다면 이런 불쾌지수를 날려버릴 것도 같았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 끝에 떠오른 것이 '불광동대장간'이었다. 부엌칼도 하나 살겸, 운이 좋으면 불가마 앞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모루질을 하는 광경을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불광동으로 향했다.
불광대장간 2014년 12월 31일, 근현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불광대장간,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 김민수
불광대장간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3호선 5번 출구로 나와 대조시장을 걷다가 끝자락에서 우측으로 돌아가 조금 올라가니 불광대장간이라는 간판이 보였고, 대장간에서 만든 각종 농기루를 위시해서 철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대장간을 시작한 박경원(78) 할아버지가 아들 박상범(48)씨와 함께 대장간을 지키고 있었다. 멀리서 소문을 듣고 부엌칼을 하나 사러 왔다는 말에 "찾아와 주어 고맙다"고 하신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사진을 담을 수 있었다.
1대 대장장 박경원 박경원(78세) 1대 대장장, 한국전쟁 이후 먹고살기 위해서 대장간을 시작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 김민수
대장간을 시작한 것은 1951년이었다고 했다.

그때는 눈 넘어 배웠고, 전쟁이 끝난 후 배가 고파서 먹고 살기 위해서 대장간을 시작했단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쇠가 없어서 포탄 같은 것들을 녹여서 철물을 만들기도 했단다.

대장간을 하던 지인 중에서는 불발탄이 섞여 들어가 폭발하는 통에 목숨을 잃기도 했단다. 포항제철이 생기면서 쇠의 공급이 원활했고, 그 이전에는 쇠가 될 만한 것들은 모두 녹여서 철물을 만들곤 했단다.
불광대장간 부자관계인 2대 박상범(48세)씨와 1대 박경원(78세) 씨가 함께 포즈를 취해 주었다. ⓒ 김민수
그렇게 10대 후반에 시작한 대장간 일을 지금껏 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이 군대를 다녀온 이후 가업을 잇겠다고 했고, 이후 지금까지 전통적인 방식을 지켜가며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2014년 12월에는 서울시로부터 근현대문화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농사를 많이 질 적에는 그런대로 먹고 살만 했지요. 그러나 이젠 쉽지 않아요. 돈을 너무 많이 벌어도 대장간을 접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돈이 안 되니까 포기했지요. 평생했던 일이고, 가업을 잇겠다고 아들이 나섰는데 잘 살려봐야지요."

아들과 아버지는 닮았다. 웃는 모습이 닮았고, 손이 닮았다. 얼굴을 보지 않고 손만 봐도 '누구의 아들'인지 알 것 같다.
아름다운 손 박경원 할아버지의 손, 지난 60년의 세월의 흔적들이 손에 새겨져 있다. ⓒ 김민수
손에는 굳은살, 팔뚝에는 화상의 흔적들, 손톱도 성하지 않다. 그것은 삶의 흔적이요, 세월의 흔적이요, 대장장이 60년의 삶이 새겨진 아름다운 손이었다. 근래에 만난 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었다.

그 아름다운 손을 보면서 마냥 마음이 아프기만 하지 않았던 것은, 가업을 이어갈 아들이 있다는 것과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해서도 살아갈 삶에 대해서도 편안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손 박상법씨의 손, 굳은 살이 아버지만 못한 이유는 그나마 손관리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손 역시, 아름다운 손이었다. ⓒ 김민수
아들 박상범씨의 손에는 굳은살이 박여있었지만, 그 정도의 굳은살은 현장 노동자들도 박혀있을 만했다. "생각보다 손이 곱다"고 하자 "신경 써서 손관리를 하기 때문이에요"라며 웃는다. 아마 아버지처럼 그냥저냥 대장간 일을 했더라면 손은 훨씬 더 거칠었을 것이다.

박경원 할아버지가 대화를 듣다가 거드신다.

"장갑이요, 저것도 귀했지요. 면장갑이 생긴 것도 한참 후의 일이고, 거의 맨손으로 하다시피 했었지요."
불광대장간 물건을 팔기 전에 날을 세워주고 있는 중이다. ⓒ 김민수
불광대장간 작은 물건 하나를 팔 때에도 정성을 다한다. 물론, 만들 때도 지극정성인 것은 물론이다. ⓒ 김민수
부엌칼을 추천받고 하나 구입을 하니 그냥 있는 물건을 내주는 것이 아니다. 20여 분간 갈고 벼려서 날을 세운다. 녹이 슬지 않은 칼이고, 이렇게 세운 날은 한참 가도 무뎌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무뎌지면 한 번 나들이 삼아 와도 좋고 정 시간이 안 되면 택배를 이용해도 된다고 한다.
불광대장간 대장간에서 만든 물건들이 즐비한 가운데, 엿장수들의 가위가 눈에 들어왔다. 추억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 김민수
그 사이 대장간 안을 구경했다. 갖가지 철물들이 즐비한 가운데 어릴 적 고물장수나 엿장수들이 사용하던 가위가 눈에 들어왔다.

'쩔꺼덕 쩔꺼덕'

그 소리가 들려오면 아이들은 공병이나 고무신 등 고물장수에게 넘길 것을 찾았다. 엿장수가 아니라 고물장수라고 한 것은, 고물을 가져가면 뻥튀기에서부터 구슬, 엿과 맞바꿔주었기 때문이다. 엿뿐 아니라, 문구점이나 가게가 귀하던 시절 고물장수는 아이들에게 신세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장난감을 구할 수 있는 마술사 같은 존재였다.

가위질은 또한 예술이었다. 여름방학을 앞둔 이맘 때는 고무물총을 가져와 고물과 바꿔주기도 했고, 고무물총을 얻기 위해 애궂은 고무신을 벅벅 갈아 바꾸던 철부지도 있었다.
불광대장간 오랫동안 사용된 모루의 표면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오랜 세월, 인고의 세월은 쇠처럼 단단한 존재조차도 부드럽게 만드는 듯하다. ⓒ 김민수
그 외의 농기구들과 철물들도 그런 추억을 하나 둘 꺼내게 만들었다.

불가마 앞에는 모루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의 흔적을 담아서인지 부드러워 보였다, 모난 곳이 없이 부드러워 보이지만, 얼마나 많은 쇠를 단련시켰을까 생각하니, 강인함의 끝은 곧 부러움과 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불가마에는 불씨가 꺼지지 않고 타고 있었다.
불광대장간 작업중인 박상범씨, 무더운 날에도 대장간 불가마의 불씨는 살아있었다. ⓒ 김민수
박경원 할아버지는 요즘은 폭염이 이어져서 불가마 작업을 거의 하지 못한다고 했다. 꼭 해야만 할 작업이 있으면 폭염 할아버지가 와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쉬엄쉬엄한다고 했다. 돈 벌려고 욕심을 부리면 한도 끝도 없고, 일할 수 있고, 그래서 먹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한 일이 아니겠냐고 했다.

평생 쇠를 만진 사나이, 그리고 아들도 20년 가까이 쇠를 만졌건만 부자의 마음은 부드럽다. 잘 웃고, 흔쾌하게 사진을 찍게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려준다. 무더위와 경기침체로 장사도 잘 안 되는데, 사진 찍자고 달려들면 대부분 손사래질을 치기 마련인데 언제든지 오고 싶으면 오고, 불가마 작업하는 것을 찍고 싶으면 미리 연락해서 시간을 맞춰서 오라고 귀띔을 해준다.

60평생 대장장이의 삶이 새겨진 손과 대를 이어 20여 년 대장장이의 삶을 새겨놓은 손은 아름다움을 넘어서 거룩해 보였다. 그런 손들이 있어 그래도 이만큼 살만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고마웠다.

그곳에 머물던 시간은 폭염과 정치권의 이런저런 소식들로 올라갔던 불쾌지수가 사라지는 시간이었다.
○ 편집ㅣ박혜경 기자

덧붙이는 글 | 2015년 7월 16일 다녀왔습니다.

태그:#불광대장간, #모루, #아름다운손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