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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선거벽보 부착에 별다른 제약이 없었던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 당시, 부산 우리 동네에 '처음 그대로' 멀쩡하게 붙어있었던 건 김영삼 후보의 벽보 밖에 없었다.

당시 김대중, 김종필, 노태우 후보의 벽보엔 수염이나 뿔이 그려진 것은 물론이고 눈이나 콧구멍을 떼어내 후보들을 '괴물'로 만들어 놓은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김영삼 후보의 것은 대부분 멀쩡했다. 벽보에 낙서를 하던 친구들이 "이건 김영삼 꺼니까 낙서하면 안돼"라고 했다.

군사독재 시절 YS를 든든하게 지켜줬던 부산은 1990년 YS의 3당 합당과 그로 탄생한 민자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이래, 그 후신인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에도 20년 넘게 몰표를 갖다 줬다. 그런데 '부산이 위험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것도 부산 남구에서 4선을 한 김무성 전 원내대표와 YS의 아들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등 한나라당 안에서 나오는 얘기가 그렇다.

위험 징후는 지난 2010년 지방선거에서 이미 나타났다. 부산시장 선거에서 김정길 민주당 후보는 44.57%를 얻었다. 당선자인 허남식 시장(55.42%)에 10%포인트 넘는 격차로 떨어지긴 했지만, 민주당 후보가 40% 이상의 득표율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뉴스였다. 

8일 오전 부산역 맞은편에서 택시를 잡아타자마자 '부산이 위험하다'는 건 정치인들의 엄살이 아니란 걸 실감했다. 개인 택시기사 50대 박아무개씨는 다음 총선 얘길 꺼내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이젠 아무래도 당보다는 인물 위주로 안 뽑겠는교. 인자는 부산 사람들도 성숙해 가 인물만 좋으면 민주당도 당선될끼라."

"박근혜가 대통령 되면 신공항은 밀양으로 가지 않겠나"

박씨는 "신공항이 안된 걸 보면서 (부산 사람들도 이젠) 한나라당을 못 믿겠다는 것이고, 박근혜가 대통령 되면 신공항은 밀양으로 완전히 물 건너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박씨의 말에는 '20년 넘게 밀어줬는데, (동남권 신공항 건설이라는) 대선 공약도 지키지 않은' 한나라당 정권에 대한 원망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8일 오전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조선소 앞.
 8일 오전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조선소 앞.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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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가 향한 곳은 영도다. 부산 대부분이 '열성 한나라당 지역구'지만 여기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을 14대 총선부터 내리 5번 당선시켜준 '김형오 지역구'다. 동시에 한진중공업 파업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장기 고공농성이 벌어져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도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봉래동에서 건재상을 하는 40대 상인은 "누가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봐야지"라고 했다. 어느 당이건 참신한 인물을 출마시키는 쪽이 이길 거란 얘기다.

한진중공업 조선소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던 청학동 40년 토박이 권아무개씨(60대)는 "영도 뿐 아니라 부산 전체적으로도 한나라당 몰표는 안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권씨는 "한나라당이건 민주당이건 젊은 사람이 나와서 영도를 살리는 참신한 공약을 내놓으면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변화를 바라는 영도 유권자들은 젊고 참신한 후보가 나선다면 여당이건 야당이건 가리지 않겠다는 쪽이었다. 

"민주당은 전라도 당, 부산에 뭘 해줄끼고?"

그러나 옆에 있던 권씨의 부인은 여전한 '한나라당 편'이었다. 그는 "그래도 한나라당이지. 민주당은 전라도 당인데 부산에 뭘 해줄 거냐"고 남편의 '논평'에 일침을 가했다. 권씨 부인의 말은 '지역주의에 기반한 한나라당 지지세를 꺾는 게 간단치 않다'는 걸 실감하게 해준다.

또한 야당이 아무리 득표율을 높인다고 해도 당선자를 못 내면 헛일. 실제 6·2 지방선거, 구청장선거, 시의원선거에서 민주당, 국민참여당은 선전했지만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한나라당은 16개 구청장 선거구 중 13개, 42개 시의회 의석 중 37개 의석에 당선자를 냈고 나머지 당선자는 무소속이었다.

다시 영도다리를 건너 점심식사를 해결하러 간 자갈치시장에서는 뜻밖의 분위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30년 넘게 유명세를 유지하고 있는 식당의 60대 여사장은 "나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다"면서도 자신이 느끼는 '작은 변화'를 전달했다. 여사장은 "올해는 한나라당 공천 받으려고 인사 다니는 사람이 아직 안 보인다. 예전과 좀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한나라당 공천은 곧 당선으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에 보통 총선을 1년여 앞둔 시점부터 공천을 따내기 위한 물밑경쟁이 치열한데, 다음 총선을 9개월 앞둔 현 시점에서도 그런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한나라당 공천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다는 게 엿보이는 대목이다.

8일 부산 자갈치 시장.
 8일 부산 자갈치 시장.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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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공항에 당한 민심, 저축은행 사태로 반감 폭발"

저축은행 부실사태의 중심에 있는 부산상호저축은행 피해자들은 초량동 본점 안에서 피해 보상을 요구하면서 두 달째 농성 중이다. 서민들의 피해가 크기에 부산시민들도 사태 추이에 관심이 높다.

김옥주 피해자 비상대책위원장은 "이 사태가 어떻게 해결되는지 부산시민들의 관심이 커서, 총선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만약 피해자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김 위원장은 "그렇다면 사생결단을 하고 국회 앞에 가서 단식투쟁을 하고 거기서 죽어도 죽어야지. 대한민국이 그렇게 된다면 정부가 없는 거나 같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런 잘못된 일을 알면서 해결을 안한다면 한나라당이건 민주당이건 국정조사위원들을 대상으로 낙선 운동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부산 현역 의원들도 힘들어 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태를 해결 못한 전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부산의 현역 국회의원들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얘기다.

손동호 부산참여자치 시민연대 사무처장은 저축은행 사태가 이미 부산의 정치지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손 사무처장은 "지금도 신공항 문제, 저축은행 사태 등으로 인해 민심은 '바꿔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했다.

손 사무처장은 "애초에 신공항으로 부산 경제를 살린다고 했는데, 이것도 지키지 못했고, 여기에 이은 저축은행 사태는 서민들의 반감을 폭발시켰다"고 분석했다.

16년만에 인구 40만 줄어, 늙어가는 경제가 '반한나라당 정서의 바탕'

저축은행 피해자들이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초량동 부산상호저축은행.
 저축은행 피해자들이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초량동 부산상호저축은행.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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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 부산경제 살리기 시민연대 상임의장도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와 저축은행 사태를 부산민심 변화의 결정적 계기라고 진단했다. 이에 더해 박 의장은 '부산의 정치적·경제적 위상의 후퇴'를 반 한나라당 정서의 근원으로 진단했다.

박 의장은 "해양수산부가 폐지(국토해양부로 통합)된 이후로 해양도시로서 부산의 정책적 순위가 뒤로 밀려서 해양·항만 산업이 후퇴하고 있다"며 "동북아 물류 거점도시인 부산에 대한 투자도 없고, 경제가 활성화 되지 않고 있어서 부산 사람들은 '한나라당 정치인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불만이 매우 높은 상태"라고 전했다.

부산 경제의 특징은 '경제가 늙어간다'는 것.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0년 부산의 청년층(15~29세) 실업률은 8.0%로 전국에서 두번째로 높고, 중장년층(30~59세) 실업률은 전국평균보다 약간 낮은 2.6%를 기록했다. 한마디로 청년층 일할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인구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는 것도 부산 경제 침체의 단면이다.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2010년 11월 1일 기준 부산 인구는 341만 4950명이다. 2005년의 352만 3582명보다 3.1% 가량 감소한 수치이고, 지난 1995년 381만 4325명 이후로 나타나고 있는 감소세가 멈추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수치들은 부산시민들의 '경제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40대 개인택시 기사 설아무개씨는 "괜찮은 산업체는 전부 다 양산, 김해로 빠져 나가고 부산은 이제 소비도시로 전락하고 있다. 대학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으니까 다 서울로 가고…. 아무래도 민심이 나쁠 수밖에 없다"고 '체감 민심'을 전했다.

그는 "여야를 좀 골고루 찍어줘야 정치인들이 부산을 살리려고 서로 경쟁도 할 텐데, 지금은 한나라당 꼬챙이만 꽂아도 당선이 되니까 경쟁이란 걸 하겠느냐"는 견해를 밝혔다.

"두고 봐라, 선거 되면 다 한나라당 찍는다"

'그럼 다음 총선에서 야당이 대거 당선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설씨는 "부산 사람들, 말은 '한나라당 안 찍어준다' 해도 막상 선거전 시작되면 한나라당 다 찍어준다. 두고 보라"고 답했다. 20년이 넘은 지역주의를 깨기 힘들다는 것. 박인호 의장도 "보수 성향 표들이 야당으로 가기 보다는 무소속으로 향하기 쉽다"고 진단했다.

뿌리 깊은 지역주의도 문제지만, 야당이 한나라당에서 이반된 민심을 흡수하기엔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부경대학교 안에서 만난 공대생 최아무개씨는 "부모님이 무조건 한나라당만 찍는 게 이해가 안 된다"면서도 "그렇다고 어떤 야당을 찍을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민주당 등 야당이 '찍어주고 싶은 후보'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인호 의장도 "한나라당에 대한 민심 이반이 일어나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 바로 민주당 표가 될 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했다. "보수성향 표들이 민주당으로 가기보다는 무소속 후보로 향하기 쉽다"는 것이다.

손동호 사무처장도 "민주당이나 야당이 (경제 회복이라는) 부산 시민들의 바람을 이뤄줄 능력이 있는가. 지난해 지방선거만 봐도 (야당 후보의) 상품력이 부족했다"고 진단했다. 손 사무처장은 "부산시민들이 요구하는 바는 간명하다. 각 당들이 시민들이 요구하는 후보를 내놓고, 감동적으로 야권연대를 이뤄내면 찍어주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에서 들은 바닥 민심과 시민사회의 의견을 종합하면, '부산의 반 한나라당 정서가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야당에서 좋은 인물을 공천하면 한나라당 독점구조를 깰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은 이런 전망마저 불확실하게 만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초선 때 3당 합당에 반대해 YS와 결별한 이후, 부산에서 국회의원과 시장직에 3번 도전해 3번 다 패배했다. 당시 '5공 청문회 스타'로 단숨에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훗날에는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한 노무현만큼 좋은 '인물'이 있었던가?

"지역주의의 벽을 깨자"던 노무현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해온 부산시민들이 이제 망자가 된 그에게 때늦은 화답을 할 것인가.


태그:#부산, #민심, #지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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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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