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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 문화부 장관을 상대로 낸 '해임무효'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유인촌 문화부 장관을 상대로 낸 '해임무효'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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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다 구세주 오셨네."

유인촌 문화부 장관을 상대로 낸 '해임무효'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65·공주대 명예교수)은 판결 당시 심경을 이렇게 한마디로 표현했다.

2008년 12월 5일 유인촌 문화부 장관의 일명 '참여정부인사 표적물갈이'로 해임처분. 2010년 1월 법원의 '해임효력정지' 결정. 2월부터 한 달 반 동안 이어진 '출근투쟁'과 '한 지붕 두 위원장' 사태. 그리고 2010년 12월 29일 대법원으로부터 마침내 "해임처분이 위법하므로 취소하라"는 결정을 얻어내기까지. 김정헌 전 위원장은 "정신적으로 계속 압박을 받고 고통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출근투쟁' 당시 "유인촌 장관, 재밌다고? 난 더 재밌다", "오광수 위원장과 동반사퇴? 내가 무슨 논개인가" 등의 '어록'을 남기며 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던 김 전 위원장이었지만  "속은 탔다"는 것.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황지우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에 이어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은 김 전 위원장은 "올바른 판결을 받아낸 게 상당히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곧 임기가 끝나는 유인촌 장관에 대해서는 "곧 장관 관두고 본업으로 돌아왔을 때 예술계에 어떻게 얼굴을 내미나"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재판이 진행 중이던 지난해 9월 임기가 종료되면서 '문화예술위원장'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됐지만 김 전 위원장에게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바로 간디가 꿈꾸던 '마을공화국'을 만드는 것.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예마네)'의 대표이기도 한 그는 지난해 6월 제천시 수산면 대전리에 있는 한 폐교를 빌려서 '마을이야기학교'를 만들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제천에 간다는 김 전 위원장은 "마을 노인회에 가입했는데 노인들이 '당신이 유인촌하고 친하다며?'라고 물어보기에 '아, 내가 유인촌하고 친하지'라고 말했다"며 특유의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마을주민들이 자립하고 자생할 수 있는, 예술과 상생할 수 있는 '유나이티드 마을 리퍼블릭'을 만들게 되면 '사무총장'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김 전 위원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7일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진행되었다. 다음은 김 전 위원장과의 일문일답.

"여유는 무슨, 속이야 타지. 수업을 못 하겠더라"

법원에서 '해임효력 정지' 결정을 받아내고 출근을 시도한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2010년 2월 1일 오전 혜화동 한국문화예술위원회 3층 위원장실로 출근하지 못하고, 옆 건물 아르코미술관 관장실에 별도로 마련된 '위원장실'로 출근했다.
 법원에서 '해임효력 정지' 결정을 받아내고 출근을 시도한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2010년 2월 1일 오전 혜화동 한국문화예술위원회 3층 위원장실로 출근하지 못하고, 옆 건물 아르코미술관 관장실에 별도로 마련된 '위원장실'로 출근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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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 29일 대법원에서 '해임처분무효'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았다. 기분이 어땠나. 
"'기쁘다 구세주 오셨네' 했지(웃음). 당연한 걸 받은 거 같다. 그렇게 (승소를) 예상하고 있었고.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부당하고 위법하게 해임을 했다' 그러니까, 올바른 판결을 받아낸 게 상당히 기분이 좋다."

- 오광수 현 위원장이 김 전 위원장 해임의 주요 사유였던 '기금손실 40억 원'에 대해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하기도 했는데.
"그건 아직 진행 중이다. 내가 해임무효소송을 내자마자 예술위원회에서 오광수 위원장 이름으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당시 오 위원장이 나한테 손해배상청구를 하기 위해서 100억 원이 들어가 있던, 나를 해임시키는 데 가장 큰 이유가 되었던 펀드를 해지했다. 해지를 하니까 40억 원 손실을 볼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 진짜 손실이 났다. 그러고는 나한테 손해를 배상하라는 거다. 지금까지 1심, 2심에서 (오 위원장이) 다 깨졌다. 얘기가 안 되는 거지.

당시 펀드를 투자했던 회사가 지금은 엄청 이익을 내고 있다. 문화예술인들한테 지원해야 할 기금인데 그걸 다 환매하는 바람에 40억 원 투자손실이 발생했다. 이건 예술인들 서명을 받아서라도 오광수한테 책임을 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작년 8월 말에 정년보다 1년 일찍 퇴임했다고 들었다. 
"들락날락 하니까 애들한테도 미안하고 학교한테도 미안하더라. 수업을 하려면 준비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걸 30년 이상을 해왔는데 준비가 안 된 채로 가르치면 거짓말 수업을 할 수밖에 없다. 준비를 하기에는 정신적, 심리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데 '출근투쟁'때도 그렇고 늘 여유 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웃으며) 무슨 여유… 속이야 타지. 뭐,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내가 법원에 해임무효신청을 냈고, 이겼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해야지. 내가 당당하지 않을 게 뭐가 있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김정헌 위원장과 오광수 위원장이 2010년 2월 19일 오전 국회 문방위 전체회의에 동시출석해 나란히 앉아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명패는 현재 오광수 위원장쪽에 놓여 있다.
▲ 명패는 하나, 위원장은 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김정헌 위원장과 오광수 위원장이 2010년 2월 19일 오전 국회 문방위 전체회의에 동시출석해 나란히 앉아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명패는 현재 오광수 위원장쪽에 놓여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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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예술위원회 국회 업무보고에 오광수 위원장과 함께 들어간 것도 인상적이었다. 명패는 하나고 위원장은 둘이고. 그런데도 사진을 보면 표정에 여유가 넘치더라.    
"아, 국회? 거기가 클라이맥스였지. 처음에는 나가기 싫었지. 국회라는 데가 징그러운 데 아니야. 국정감사 받고 예·결산 보고해야 하고. 거기 나가면 기관장은 사람 취급도 안 해주니까 하루 종일 고문 받는 거야. 그런데 야당 민주당 의원들이 '당당하게 출석하자'는 거야. 못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계속 요청을 했다. 

그래서 (문방위원실에) 들어갔더니 거기 자리가 없는 거야. 그 때 고흥길 위원장이 그날 출석한 위원장급들한테 지나가면서 악수를 한 번씩 하면서 나한테 '어떻게 나오셨냐'고. 일부러 실실 놀리는 거다. 그래서 내가 '위원장으로 복귀했다'고, '다시 인사드린다'고. 그렇게 넘어갔는데, 내 자리를 조희문 영화진흥위원장하고 오광수 사이에다가 끼워 넣는 거다. 오광수야 뭐 (팔짱끼고 굳은 표정 지으며) 이러고 있고, 그 때부터 조희문이 계속 궁시렁 궁시렁 대는 거야. 당시 조희문 옆에 한 사람이 더 앉아 있었는데 그 사람이 좀 밀려날 거 아니야. (조 전 위원장이) 그 사람 걱정을 하면서 자꾸만 책상을 자기네들 쪽으로 끌어당기는 거다."

- 황당했겠다.  
"그러고 있는데 전병헌 의원이 오더니, '자리 사이가 왜 이렇게 벌어졌냐'고 직원들 시켜서 책상을 붙였더니 (조 전 위원장이) 계속 자기 쪽이 좁다 그러는 거다. 그래서 전 의원이 '그럼 당신이 뒤로 빠져' 딱 이야기 하니까 그 다음부터 가만히 있더라고. 꼼짝 못하고."

"유인촌 장관, 공식 사과해야... 일본국채 팔아서 보상하면 더 좋고"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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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간 '투쟁'하면서 가장 참담했던 때는 언제인가.
"참담한 거야 뭐, 해임 당했을 때가 제일 그랬지. (2008년) 11월에 당시 문화부 차관이 나하고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부른 거야. 그런데 나는 문화부 직원이 아니야. 독립기관장이야. 차관 정도가 함부로 부를 위치가 아니야, 독립성을 보장하는 기관이니까.

처음에는 갈까 말까 생각했다. 이건 암만해도 위원장 사퇴하라는 그 이야기인데. 뭔가 일을 곧 끝낼 모양이구나. 감을 잡고 있었어. 그러고는 차관실에 들어갔는데 정말로 나보고 빨리 자리를 정리하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소리를 빽 질렀어. (삿대질을 하며) '어디 차관이 말이야, 독립기관장인 나를 오라 말라 하는 것도 웃기는 짓을 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 나한테 관두라는 소리를 당신이 해! 차관 정도가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막 해! 왜 내가 관둬야 하는지 이야기를 해봐!'. 그러면서 야단을 쳤어.

그랬더니 (차관이) 장관께서 어렵게 결심을 했대. 그래서 내가 '무슨 어렵게 결심을 해, 그건 내가 알아서 결정하는 거니까 관둬라 말라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한참 닦달을 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도 내가 사표 낼 기미가 안 보이니까 감사실 직원들을 내보내서 며칠간 표적감사를 했다. '감사 온다, 무엇 때문에 감사를 한다' 그런 통고도 없이 4명이 우르르 몰려와서 직원들 계속 불러들여서 진술서 쓰게 하고. 

사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사퇴 압박이 들어왔을 땐, 그 다음해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어떻게든 이걸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12월 초에 그러는 (해임하는) 바람에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사퇴를 해도 내가 정하는 거지. 너희가 죄를 덮어 씌워가지고 해임을 시켜!'. 이렇게 된 거다."

- 2년에 걸친 재판 끝에 승소했는데 정병국 내정자가 낙마하지 않는다면 유인촌 장관 임기는 곧 끝날 걸로 보인다. 아쉽지 않나.
"아쉽지. 그 사람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문제인데. 중요한 것은 잘못을 한 쪽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내가 정신적으로 계속 압박을 받고 고통을 받았으니까 거기에 대해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 그것 때문에 소송을 또 해야 할지, 이걸로 명예회복이 된 거니까 끝을 내야 할지 고민이다.

김윤수 관장, 황지우 총장 그리고 나까지. 유인촌 장관이 한 게 전부다 위법으로 드러나지 않았나. 다 패소했다. 지금 김윤수, 황지우 나까지 해서 (소송하는 데) 쓴 돈이 얼마야. 국민들 세금 가지고 지네들 마음대로 소송을 걸고 항소하고 재항소하고. 유인촌 장관의 잘못된 해임 건에 대해서 이렇게 국민들 세금을 펑펑 써도 되느냐 말이야. 난 그 돈이 아까워.

유인촌이 기회만 있으면 내가 무능력하고 무책임하고 부도덕하기까지 하다고 하는데 내가 뭐가 부도덕해. 내가 지네들처럼 땅 투기를 했어, 일본 국채를 사들였어, 뭘 했어. 유인촌은 훨씬 더 부도덕하고 나쁜 짓을 했다. 무책임하고."

- 해임 처분 받은 이후로는 유인촌 장관과 만난 적이 없나.
"마주칠 기회가 없었던 게 다행이지. 마주쳤으면 한 마디 해주려 그랬지."

-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계급장 떼고 한 번 붙어볼까(웃음). 아마 자기도 걱정 많이 했을 거야. 내가 장관을 평생 할 것도 아닌데 (장관) 관두고 자기 본업으로 돌아왔을 때 예술계에 어떻게 얼굴을 내미나. 나부터 딱 만나면, '어이, 인촌이 일로 와봐. 응?'. 유인촌이 정식으로 나, 김윤수 관장, 황지우 총장 세 사람한테 사과했으면 한다. 돈으로 피해보상까지 하면 더 좋고. 일본국채 팔아서(웃음)."

"권력이 폭력화되는 것 피할 수 없어... '마을공화국 연합' 만들 것"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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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어떻게 지내나.
"재미나게 지낸다. 백수가 원래 재밌잖아. 책임 같은 거 안 져도 되고. 해임되고 나서 문래동에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라고 사단법인 연구소를 하나 만들었다. 예술과 마을을 연결 시켜서 일을 좀 해보려고. 그리고 작년 6월에는 제천에 폐교를 하나 빌렸다. 학교 이름은 '마을이야기'. 마을에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콘텐츠로 해서 예술가들이 작업을 하는 거다. 지금은 '새 만화책'이라고 만화가들이 들어와서 작업을 하고, 나는 미술 하니까 미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영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학교가 70~80년 된 학교여서 동문들이 몇 천 명씩 된다. 그 동문들이 매년 여는 체육대회가 있는데, 체육대회라고 하면 보통 줄다리기, 풍선 터트리기 이런 거다. 그런데 체육대회만 하지 말고 학교와 관련된 사진을 가지고 전시회를 하자, 그래서 지금 60~70세 된 사람들 초등학교 때 사진들 모아서 교실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체육대회만 하고 술 마시고 끝나는 게 아니라 사진전도 열고 카페처럼 열어서 차도 마시고."

- 마을 공동체에 원래 관심이 많았나.
"마을공동체와 관련된 것들이 너무 많이 부서졌다. 마을에 좀 활력을 불어 넣고 살려야겠는데 예술이 할 역할이 없을까 생각했다. 예술이라는 것이 항상 비유, 메타포로 세상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세상을 쭉 살아온 주민들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예술가들이 끄집어낸 걸 가지고 작업을 하는 거다. 마을 주민들은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자기 삶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고, 예술가들은 그걸 콘텐츠로 해서 작업을 할 수도 있고."

- 마을 규모가 어느 정도 되나.
"40~50가구, 100명이 채 안 된다. 혼자 사는 노인들도 많고. 여기에 도시에서 살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조금씩 생기고, 컴퓨터 기술자도 한 사람 들어와 있고. 오늘도 제천에 갔다 오는 길인데 그 마을 노인회에도 가입했다. (노인들이) '얼핏 들으니까 당신이 저 유인촌하고 친하다며(웃음)'. (내가) '아, 유인촌하고 친하지'. 마을에, 교실에 불이 꺼져 있다가 불이 켜지고 젊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니까 노인들이 그렇게 좋아한다.

사실 농한기에 주민들이 만날 고스톱 치는 것도 물리잖아. 아무리 해도 싫증 안 나는 놀이긴 하지만 한도가 있지. 그런데 우리가 들어가서 미술교실, 한글교실, 영어교실을 만들었어. 영어교실이 그렇게 인기가 좋아. 어제는 10명이 넘게 왔어. 와 가지고 A, B, C서부터 계속 쓰는 거야."

-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나.
"국가 폭력, 자본의 폭력, 권력이라는 것이 폭력화되는 것, 이건 뭐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천천히, 할 수 있는 데까지 마을 공화국을 한 번 만들어 보려고 한다. 톨스토이 생각하고 비슷한 거야. 일종의 무정부주의. 마을공화국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고, 주민들 사이에 자치, 자립이 가능한 그런 개념의 마을들이 몇 개만 생겨도 좋겠다. 예술이 매개가 되어서 예술과 마을이 같이 상생할 수 있는. 국제연합처럼 마을 공화국 연합을 만들어서 거기서 내가 사무총장을 하고 싶다. 반기문처럼(웃음). 유나이티드 마을 리퍼블릭을 만드는 거다."


태그:#김정헌 , #유인촌 , #문화예술위원회, #표적 물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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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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