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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 갈현동 퍽치기 사건 관련 기사에 붙은 댓글들.
 은평구 갈현동 퍽치기 사건 관련 기사에 붙은 댓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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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오전 0시 20분경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서 신아무개씨가 괴한으로부터 소위 '퍽치기'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보도에 의하면 괴한은 쓰러진 신씨를 수차례 더 폭행한 후 차까지 빼앗아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언론이 주목한 문제는 그 다음의 상황이었다.

당시 신씨의 범죄 피해를 서너명의 시민이 지켜보고 있었으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언론의 실종된 시민의식에 대한 비난과 달리 누리꾼들의 반응은 영 딴판이다.

종합 포털사이트인 '다음'의 관련 뉴스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아이디 '마징가'는 "목격자 증언 한번 했다가 8년동안 경찰서, 검찰에 불려 다니고 상대한테 폭언, 협박 들어본 후에야 아~ 내가 이상한 나라에서 살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며 "위증, 손해 배상으로 두차례 재판을 받고서야 무혐의로 풀려났다, 누가 8년간의 마음 고생과 변호사 선임료 물어줄 텐가?"라며 남의 사건에 증인으로 나섰다가 고생한 사연을 적었다.

이처럼 기사에 붙은 1000여 개의 댓글 중 피해자를 외면한 시민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댓글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어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뜻밖의 반응이 주를 이룬다.

불현듯 내가 당한 그 때 그 사건이 떠올랐다.

1초의 고민 없는 정의감이 악몽이 된 그 사건

2002년 5월 31일. 막차를 타고 도착한 서울 구로 전철역에서 나는, 20대 초반의 공익요원이 만취한 30대 남자로부터 마구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당시 인권단체 활동가로 일하던 나의 정의감은 단 1초의 고민도 필요하지 않았다. 바로 다가가 구타당하는 공익요원을 피하게 한 후 가해자의 폭행을 말렸다. 하지만 행패는 중단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나의 넥타이로 내 목을 감아 졸랐다. 

결국 경찰이 출동했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출동한 경찰이 "미안하지만 증언이 필요하니 협조해 달라"며 공익요원과 나에게 경찰서까지 동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집에 가는 것이 급했으나 경찰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시민정신이라고 생각해서 응했다. 여기까지는 밤 거리에서 흔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음을 나는 미처 몰랐다. 문제는 경찰서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경찰은 만취 가해자와 우리를 나란히 같은 의자에 앉혔다. 여전히 만취하여 흥분한 상태인 가해자와 나란히 앉는 것이 불안하다 싶어 주저했는데 그때였다.

가해자가 호주머니를 뒤적이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내 머리를 10여 회 내리찍었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볼펜이었다. 경찰이 해준 역할은 나를 인근 구로병원 정문 앞까지 데려다 준 것이 다였다. 담당 경찰은 "바빠서 돌아갈 테니 치료는 자비로 하고 피해 진술을 위해 반드시 경찰서로 돌아오라"는 말만 남기고 떠나갔다. 어이가 없었다. 경찰서 내에서 보호 의무를 다 하지 않아 빚어진 폭력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데 그냥 알아서 하라니….

뭔가 황당했지만 일단 치료부터 받아야했다. 결국 내 돈으로 치료를 마친 후 다시 경찰서로 가야 했는데 새벽 2시가 넘은 거리에는 택시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경찰서로 갔다. 이게 뭔 꼴인가 싶었다. 차라리 그때 그냥 집으로 갔으면 그 다음 험한 꼴과 상처는 받지 않았을 텐데…. 나의 순진한 기행은 계속되었다.

반말로 항의했다가, 순식간에 피의자가 되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그제야 사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공익요원이 당한 피해 사실을 증언해주면 나의 헌신에 가까운 선행에 대해 공익요원과 경찰이 고마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시민정신'이라고 칭찬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반전은 이때부터였다. 이후 진행된 경찰조사에서 폭행당한 공익요원은 '가해자에게 맞았지만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내가 가해자와 시비가 붙은 이유는 잘 모르겠다며 자기를 빨리 집으로 돌려 보내달라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마디로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상황이었다. 이럴수가…. 그때 난 너무 당황스러워 말조차 더듬거렸던 것 같다.

공익요원에게 물었다.

"당신이 맞고 있어서 피하게 하고 대신 내가 이 사람을 막다가 여기까지 온 거 아니냐?"

하지만 답변이 황당했다. 공익요원은 "어떻게 된 것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요"라며 우물쭈물하더니 "저는 그냥 가면 안 되나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20대 초반의 어린 공익요원은 지금 이 상황에서 경찰서에 있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던 것 같다. 더구나 방금 전 가해자가 흉기로 내 머리를 찍어 피가 흥건한 모습을 보고 겁도 난 듯했다. 그러니 어서 사건을 끝내고 무작정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영화 <공공의 적>의 한 장면.
 영화 <공공의 적>의 한 장면.
ⓒ 시네마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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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범죄 피해자를 도운 '칭찬받을 시민의식'을 가진 이가 아니라 영문도 없이 취객과 시비 붙은 이상한 사람이 돼 버려 있었다. 나는 공익요원의 황당한 언동에 어이가 없어 정신마저 공허해졌다. 잠시 후, 경찰은 피해자이기만 한 공익요원에게만 그만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나는 왜 내가 여기 남아야 하는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공익요원이 아주 잠시 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철문을 밀고 조사계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나의 존재가 갑자기 우스워졌다. 피해자를 돕겠다고 개입했다가 머리에 부상만 입고, 고맙다는 인사는 고사하고 이젠 사건 당사자가 돼 버렸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불행하게도 내 귀에 경찰의 통화 내용이 들렸다. 담당 경찰관이 최초 사건을 접수한 파출소에 전화를 하면서 "거기 고상만이 자료 좀 보내세요"라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 "고상만이가 뭡니까, 적어도 당사자 앞에서는 고상만'씨'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했다. "죄송합니다. 급하다보니 그랬네요" 나는 당연히 경찰이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내가 그렇게 말하건 말건 당신이 뭔데 통화 내용을 가지고 말이 많아?"라는 반말이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었다. 나는 다시 한번 경찰에게 반말하지 말라고 항의했다.

그때부터였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존칭을 하지요. 고상만'씨' 잘 들으세요. 지금 이 순간부터 고상만'씨'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피의자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고상만'씨'는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나의 항의에 경찰은 '씨'자에 악센트를 붙여 조롱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경찰은 나를 폭력 피의자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믿기 어려운 악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경찰의 악의적인 사건 조작 시도, 정말 너무한다

이전까지 최소한 피해자로 취급했던 경찰이 나를 폭력 피의자라며 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피의자냐"며 항의했다. 경찰은 만취 가해자인 그가 주장하기를 내가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고 했으니 이것도 폭력이라고 답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실제로 멱살을 잡았냐 아니냐가 관건이 아닌 항의에 대한 경찰의 감정적 보복이었기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하다가 경찰관의 부정행위를 담당하는 경찰서 내 청문 감사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답변이 걸작이었다. "그 새끼, 더럽게 잘났네, 야, 일해야 하니까 구석에 가 있어"라는 욕설과 모욕이 돌아왔다. 심지어 경찰은 내가 당한 머리 부상 경위마저 조작하려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끼리 "저 새끼가 여기서 스스로 컴퓨터에 부딪혀 다친 것으로 조서에 쓰자"는 대화가 들렸을 때 그 심정은 이래서 사람이 미치는 거구나 싶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너무나 구차해서 이야기를 줄인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 경찰서에서 모두 10시간을 감금된 채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나는 선량한 시민의식의 모범이 아니라 머리에 부상을 입은 채 반말에 항의한 죄로 폭력 피의자가 되어 경찰로부터 온갖 모욕과 핀잔을 받아야 했다. 생각만해도 끔찍한 기억이다.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 담당 경찰 2명 견책 징계

경찰청 홈페이지
 경찰청 홈페이지
ⓒ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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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는 모 인권단체에서 발행하는 인권관련 신문 등에 내가 당한 이 황당한 사건에 대해 기고했다. 그리고 우연히 이 기사를 읽은 당시 누리꾼들이 경찰청 홈페이지 등에 기사를 올리며 담당경찰의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을 내기도 했다. 경찰청 담당 직원으로부터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연락이 받고서야 나도 모르게 이런 일들이 진행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결국 다행스럽게 나에게 씌어진 황당한 폭력 혐의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 그리고 당시 담당 경찰이었던 2명에게 견책 등 징계를 내렸다는 통지를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악몽같은 그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정말 잊혀지지 않는 끔찍한 기억은 따로 있다.

사건 당일 오전 9시경이었다. 밤새 악몽의 시간을 보내며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있을 때였다. 경찰관들이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 저기 책상과 컴퓨터에 피가 묻어있다며 난리였다. 아마 내 머리에서 솟구친 피가 사방으로 비산되면서 여기저기 뿌려진 모양이었다. 그러자 담당 경찰관이 그들에게 고자질하듯 나를 지목하며 '저 사람 피'라고 했다. 일순간 경찰들이 "야, 이거 니가 묻혔으니까 니가 와서 다 닦아"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순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 모멸과 치욕감은 지금까지도 내 주위를 뱅뱅 돈다. 참 어렵게 말했다. 화낼 힘도 없었다. "제가 실수로 오뎅 국물을 흘린 것도 아니고 여기 경찰서에서 폭행당해 다치면서 일어난 일인데 그걸 제가 닦아야 합니까?" 이 처연한 물음에 경찰의 답변은 간단했다. "그럼 누가 닦아?" 나는 여전히 그 피를 누가 닦아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다시 또 그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범죄 현장을 보고도 외면한 시민 의식을 개탄하기 전에, 그리고 이런 비정한 뉴스를 접하면서도 '절대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결정'이라는 댓글이 주를 이루는 것에 대해 비난하기 전에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올바른 공권력의 집행과 판단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와 '엄한 놈 옆에 서 있다 손해본다'는 말을 살면서 안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정의로운 일에도 앞장 서지 말라는 말과 괜히 다른 사람 일에 개입하지 말라는 이 뜻의 속담이 고래로 지금까지 여전히 유효하다면 틀린 지적일까.

공권력은 현상만을 다룬다. 남의 차 유리를 깬 것만 판단하지 그 안에 갇힌 아이를 꺼내기 위한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법 조문에 없는 눈물까지 판단할 수 없다는 식의 반응이다. 그러면서 이같은 상황에서 성숙한 시민 의식을 요구하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지적이다.

생각해본다. 만약 지금 다시 그 8년 전, 그 당시 그 현장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폭행당하고 있었던 공익요원을 위해 그때처럼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개입할까. 아니면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무심히, 또는 공익요원이 더 맞나 아니면 싱겁게 그냥 끝나나 구경하고 있을까. 답은 나에게 없다.

적어도 공권력이 시민 의식을 발휘하는 사람에게 상은 못 줘도 손해는 주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지 않는 이상 나는 앞으로도 금번 은평구에서 있었던 비극적인 시민의 외면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일은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1%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정의감을 가진 1%의 시민들이 있어 우리 사회는 여전히 건강하게 움직인다고 믿는다. 그들이 바로 우리를 숱하게 감동시키며 선행의 미담이 되었던 무명의 의사자들이다. 그 희망을 믿기에 그 사건 이후 1초는 아니고 한 2초쯤 더 고민하다 여전히 내가 직면한 어떤 일들에 결국 개입하게 된다.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숙명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끝으로 시민 의식을 발휘하는 모든 분들께 존경과 고마움을 표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대안신문 '시민사회신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고상만, #인권, #시민의식, #경찰, #공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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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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