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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 정운현, 정리 : 김태형, 사진 : 남소연 기자

▲ <한국사이야기> 10년 대장정 22권 완간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 오마이뉴스 남소연

구수한 입담과 해박한 역사지식으로 널리 알려진 역사학자 이이화(67). 그가 오랫동안 지방에서 칩거생활을 하며 쓴 <한국사 이야기>(한길사 펴냄) 22권이 최근 마침표를 찍었다. 지난 94년부터 집필을 시작한지 10년, 98년 제1권 <우리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를 선보인지 6년만의 일이다.

그간 관(官)이나 학계에서 집단으로 펴낸 경우는 더러 있었으나 일개인이 이 정도 규모의 대형 역사책을 펴내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총 원고지로 2만6천여장에 이른다. 5척을 조금 넘는 단구인 그의 키에 버금가는, 실로 엄청난 분량이다.

그가 펴낸 <한국사 이야기> 출간의 의미는 단순히 규모가 큰 것만이 아니다. 종래의 역사서들이 왕조, 정치-경제 위주의 서술인데 비해 민중사, 생활사에 주목했으며, 또 정사(正史) 이외에도 당시 개인의 문집·야담집·설화·소설 같은 것도 사료로 활용해 역사서술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이다.

10년 집필, 원고지 2만 6천여장...

특히 그간 국내 역사서에서 금기로 삼아왔던 북한 김일성을 비롯해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사를 과감히 수용해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반쪼가리 역사를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또 아무런 역사적 가치판단 없이 사용되고 있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역사용어에 대해서도 자기나름의 용어를 제정한 점도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번에 그가 펴낸 책은 답사기나 역사 기행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사료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국내외 곳곳의 역사현장을 두루 답사해 그 생생한 이야기를 책에 담아낸 점도 그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90년대 당시 역사기행 강사로도 인기가 높았다.

그를 두고 재야 사학자니, 대학 졸업장이 없다느니, 학위가 없다느니 하면서 폄하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해박한 한문지식을 토대로 수많은 사료를 섭렵하였으며, 특히 민중사를 중시하는 사관을 가진 그는 우리 역사학계에서 독특한 존재로 평가되고도 남음이 있다.

역사현장 답사와 글쓰기에 전력을 다해온 역사학자인 그는 각종 역사관련 단체에 몸담아 힘을 보태오기도 했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그는 내년쯤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 영원히 '야인 이이화'로 남고 싶다고 밝혔다. 그다운 생각이고 포부다.

<한국사 이야기> 완간을 기념해 당초 출판사측은 주례사식 출판기념회를 지양하고 독자들과 함께하는 모임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도와준 분들에게 '인사'는 해야하지 않느냐는 의견 때문에 오는 6월 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간단한 출판기념회를 가질 예정이다. 본격적인 출판기념회는 아차산 등 역사현장에서 대동제 한마당 식으로 꾸린다고.

헌재의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이 나기 이틀전인 지난 12일 오후 <오마이뉴스> 사무실로 그를 초청해 집필 동기, 책의 주요내용, 그리고 향후 계획 등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다음은 이씨와의 일문일답을 간추린 것이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 <한국사 이야기> 22권 완간을 축하드린다. 특별한 집필 계기라도 있었나?
"1994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아 10년 가까이 연구자들과 함께 기념사업을 펼쳐왔다. 이 사업이 마무리된 94년 말 김언호 한길사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 사장은 '연구자들이 펴낸 한국사 역사책이 너무 딱딱하고 또 여러 사람이 참여해 일관성에도 문제가 있다. 10년 계획으로 대중용 통사를 써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 때 내 나이 50대 후반이었는데 처음에는 엄두가 안났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런 기회를 가지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용기를 내 시작했다."

- 서술 방식 등에서 기존 역사서와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인다. 이 책의 특징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포괄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내용에서 민족·민중·생활사에 중점을 뒀다. 기존 역사책이 너무 정치·경제 중심의 역사이다 보니 그 반작용으로 생활사 등을 다뤄보고 싶었다. 또 민족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며, 민중의 고통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그려내려고 나름으로 노력했다. 생활사는 과거 우리 선조들의 생활이 어땠는지를 다룬 것이다.

이제 왕명이나 연대를 외우는 방식의 역사서술은 좀 지양돼야 한다고 본다. 예를들어 대동법이 언제 실시됐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배경과 시행방식, 그리고 민중에 끼친 영향 등이 더 비중있게 소개돼야 한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황진이가 기생의 신분으로 그림·시에 뛰어났다고만 이야기하면 황진이의 삶이 드러나지 않는다. 즉 황진이의 삶을 일화로만 접근할 게 아니라 그 시대의 여성의 삶과 고통 등을 연계해서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왕명이나 연대를 외우는 방식 역사서술 지양돼야

- 5천년 한국사를 다루면서 방대한 자료를 참고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자료들을 참고했나?
"고대사부터 고려사까지는 자료의 한계가 컸다. 그래서 문헌사학 뿐만 아니라 유물-유적 관련 성과도 일부 수용했다. 고려시대 같은 경우는 개인문집 같은 것들을 많이 참조했다. 조선시대는 왕조실록을 비롯해 비교적 자료가 많은 편이다. 사료 선택은 물론 나름의 관점에 따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사(正史)만을 사료로 이용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문집·야담집·설화·소설 같은 것도 사료가 된다고 생각하면 광범위하게 이용했다. 실지로 정사가 다 정확한 것만도 아니다. 역사는 역사가의 손에서 빚어지는 것이고 사료는 있는 그대로만을 보여줄 뿐이다. 역사가는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와 같다. 나는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야사(野史)도 참고용 사료로 활용했다."

역사학자 이이화는 누구?

1937년 주역의 대가인 야산(也山) 이달(李達)의 넷째아들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해방되기 3년 전에 익산으로 이사와 살다가 1945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대둔산에 들어가 한문공부를 하였으며, 열여섯 살 되던 해에 학교를 다니려고 가출하여 부산, 여수, 광주 등지에서 고학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대학에 다니며 문학에 열중하기도 했으나 한국학에 더 매력을 느껴 중퇴하고 역사 분야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한국의 지역갈등과 전통적 신분질서를 타파하는 글을 쓰면서 민족사, 생활사, 민중사를 복원하는 데 열정을 기울였으며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인물을 재평가하는 역사의 현재화, 재미있고 쉬운 문체로 일반에게 다가가는 역사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민족문화추진회, 서울대 규장각 등에 봉직하였고,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도들을 지도했다.

특히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비평』 편집인으로서 근현대사 연구를 위한 사업에 동참했으며,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사업을 주도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사 이야기』를 비롯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이야기 인물한국사』 『조선후기 정치사상과 사회변동』 『한국의 파벌』 『허균』 『우리 겨레의 전통생활』이 있으며, 편서로 『동학농민전쟁 사료총서』(30권)가 있다.
- 집필 과정에서 새로 발굴해 소개한 사료도 있나?
"적지 않았다. 가령 임술년(1860년) 이른바 진주민란으로 불리는 삼남농민봉기의 경우 현지에서 '운초록'(雲樵錄)이라는 관련 기록을 새롭게 발굴해 이를 해당 부분에서 적극 반영했다. 새자료를 가장 많이 반영한 부분은 동학농민전쟁 분야가 아닌가 싶다.

지난 94년 동학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아 30권짜리 자료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자료를 많이 발굴했는데 그 대부분을 책에 반영했다. 전문가들이 들여다보면 깜짝 놀랄 만큼 새 자료들이 많다"

- 집필 도중에 역사현장 답사도 병행한 것으로 안다. 어떤 곳을 답사했고, 어떤 내용들을 책에 반영했나?
"사료도 중요하지만 현장감을 역시 중시했다. 문헌사료를 가지고 보면 상상력에 한계가 온다. 그럴 경우 역사 현장에 가서 자료와 현장을 동시에 느끼면 생생한 기술이 나온다. 이런 점을 나름대로 십분 활용했다. 글쓸 대목 근방에 가서 돌아다닌다. 예를 들어 '조일전쟁'에서 남원전투를 쓰는 대목이면 그 지역 가서 쓴다.

초창기에는 혼자 다니다가 그 다음에는 연구자들, 또는 대중들과 함께 역사기행을 다녔다. 남쪽은 거의 다녔다. 또 중국 일대의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고구려 관련 유적지 등을 20회 이상 돌아다녔다. 마지막 독립운동단체인 독립동맹의 근거지였던 태항산 지구와 연안 일대까지 들어가서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근거지를 직접 조사했다. 다만 북쪽의 평양과 개성을 못 가본게 아쉬움이다."

사회주의운동사 수용으로 반쪼가리 역사 극복

- 그간 남한에서 출간된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빠져있는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사를 포함시켰는데 어떤 의미인가?
"남쪽에서는 그동안 독립운동사를 쓰면서 김일성 뿐만이 아니라 좌파계열은 거의 다 뺐다. 특히 김두봉·김일성은 완전히 뺐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독립운동사>라는 시리즈가 나온 게 있는데, 거기에도 거의 다 빠졌더라. 다만 김원봉 같은 경우는 나중에 광복군에 합류하고 남쪽에 왔다가 북쪽으로 갔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언급돼 있다.

남쪽의 젊은 연구자들 가운데는 독립동맹, 조선의용군, 김일성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고 또 연구자도 많다. 사회주의 역사도 분명 우리 역사다. 우리 현대사에서 이런 것을 무시하고 뺀 것은 반쪼가리 역사다. 이제는 이런 내용도 과감하게 수용해야 된다. 그간 일반 통사는 물론 교과서에서도 거의 안다룬 것을 나는 과감하게 수용했다.

다만 북한 김일성의 경우는 그간 너무 신화적인 부분이 없지 않아 이는 적절히 걸렀다. 또한 남한에서 나온 역사책에는 우파계열에 대해 지나치게 영웅사관으로 쓴 대목들이 더러 있어 그것도 균형을 맞추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 '임진왜란'을 '조일전쟁'으로, '병자호란'을 '조청전쟁' 바꾸는 등 기존 역사용어도 새로 명명한 것으로 안다. 그 배경과 대표적 사례는?
"나는 임진, 갑오, 을사 하는 식의 육십갑자를 역사적 사건에 붙이는 것에 반대한다. 우선 과학적이지 못하다. '갑오농민전쟁'이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1894년 농민전쟁'이라는 표현이 더 낫다. '을사조약'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과학적인 용어는 고치려고 노력했다.

다만 너무 많이 새로운 용어를 동원하면 독자들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어 일단 너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고쳤다. 대표적인 게 '조일전쟁' '조청전쟁' 이런 것들이다. '한국'이라는 용어도 좀더 따져보고 사용해야 한다. 즉 '한국'과 '조선'을 엄격히 구분해야 된다.

항일 독립투쟁과정에서 영어로 '코리아'로 표현된 것을 모두 한국·한인으로 다 바꿔놨는데 잘못된 것이다. 이는 전부 조선이란 의미로 쓴 것이다. 조선을 전(前) 역사의 상징적인 의미의 용어로 쓴 것인데 굳이 한국이라고 고쳤다. 그래서 내 책에서는 한국과 조선을 엄격히 구분했다. 전체를 대표를 할 때에는 조선이라고 썼다."

- 한 시대를 평가하는 시각은 다양하고 때론 정반대로 대립할 수도 있다. 한 예로 일제시기를 두고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맞서기도 하는데 이런 사안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견지했나?
"역사적 사안에 대해 사관에 따라 입장이나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런 차이는 그 본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갈린다고 본다. 즉 일제의 식민지 경영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를 따져보면 된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하면서 이 땅에 다리도 놓고 학교도 세우고 철도도 깔았다. 그러나 그들이 조선민족의 복지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막말로 돼지를 잘 먹여 살을 찌운다고 해서 돼지를 위해 살을 찌우는 것인가. 사실은 잘 키워서 사람들이 잡아먹기 위함이 아닌가.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시대사를 지나치게 경제사적인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비롯된 것으로, 이는 적절치 못하다고 본다. 역사의 흐름에 비춰볼 때 식민지 시대에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 향상되었다고 해서 이를 근대화론으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경제사적 측면 강조한 탓

- 마찬가지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도 그런 경우가 있다. 공과가 교차되는 인물은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나?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은 보기나름으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허균을 예로 들어 보자. 과거의 역사책에서는 그를 역적으로, 또 해방공간에서는 '홍길동'의 저자 정도로 기록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그는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민중을 중시한 개혁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또 김활란 같은 인물을 두고도 논란이 있는 줄 안다. 선진 문물 받아들이고 여성문제·교육문제 등에 앞장 선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러나 일제말기 학생들에게 정신대 나가라, 지원병 나가라고 외친 것은 분명 잘못이다. 혹자는 학교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도 여운형·정인보 같이 지조를 지킨 사람들도 많았다.

적어도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나름의 강한 신조가 있어야 하고, 민중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 그가 설령 근대여성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민족적 문제에서 반민족 행위를 한 부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죄를 물어야 된다. 공과를 평가하면서 공이 있다고 해서 과가 묻혀서는 안 된다. 역사인물의 경우 민족 정신사적인 면을 분명히 따져야 한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 제대로 된 역사서는 사실의 나열과 서술 이외에 시대에 대한 저자의 평가와 견해도 적절히 가미돼야 한다고 보는데.
"역사가 사료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실증사학을 비판하는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역사는 객관적 사료를 가지고 주관적인 해석이 곁들여지는 것이다. 있는 것만 가지고 늘여놓는다면 역사서가 아니라 기록일 뿐이다. 역사가는 자기 책속에 자기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마땅하다. 역사가는 사료를 선택해 이를 역사책으로 펴낸다는 점에서 역사요리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역사쓰기의 기본으로 평등사상과 개혁성을 든다. 사료 선택 역시 그 기준에 따랐다."

- 그간 재야에서 저술, 강연, 답사 등 활발한 활동을 해오셨는데, 이번에 완간한 <한국사 이야기>에 대한 강단사학계의 평가는 어떤가?
"흔히 딱딱하기 쉬운 역사를 대중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 젊어서 문학활동을 했기 때문에 대체로 내 책의 문체가 쉽고 문장이 대중적이라는 평을 듣는 편이다. 이는 칭찬이라고 본다.

그러나 비판도 많다. 대개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첫째는 '역사 엄숙주의자'들이다. 그 사람들은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반대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둘째 민중사적인 접근과 계급적인 문제에 대해 내가 과감하게 다루고 수용하니까, 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한다. 어느 대학에선 내 책을 인용하면 학위를 안 준다는 말도 들은 바 있다. 셋째 내가 학위도 없고 정통도 아니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사료에 대한 나의 분명한 관점 등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역사 도둑질...현대사의 문제"

-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으로 한중간에 역사전쟁이 우려되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한마디로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핵심은 간단하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한마디로 역사 도둑질이다. 이론이나 사료를 들이대면 중국은 꼼짝도 못할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과거 역사의 영광을 찾으려는게 아니라 현대사의 문제로 삼으려는 것이다. 즉 고구려사를 통해서 국경문제, 남북통일 이후 등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과거 일제시대에도 '임나일본부'를 한반도 침략 근거로 삼지 않았나.

고구려사는 철저하게 현대사의 문제다.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 학계에서는 고구려사 정리가 미흡해서 정리하자는 식으로 주장하며 현대사 문제로 접근하는 인식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면서 국가로부터 예산을 받아 자기들끼리 나눠먹고, 그 안에서 또 학교끼리 경쟁이나 하면서 갈등이나 빚고 있다. 이 문제는 국가적으로 좀더 크고 넓게 고려해야 하며, 고구려 정신을 제대로 선양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적 과제라고 본다."

- 10년간에 걸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대작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데.
"개인이 낸 역사서로는 가장 큰 규모라고는 하나 질이 꼭 그에 상응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개인이 통사를 다룬다는 것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런 점은 앞으로도 보완하고 수정해나갈 생각이다.

아쉬움이 많이 있지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하자면, 첫째, 조선시대의 당쟁 부분을 부정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분량이 많아졌다. 그게 좀 후회스럽다. 또 동학농민혁명을 비교적 자세하고도 충실하게 다룬 반면 홍경래의 관서농민전쟁의 경우 관련자료가 함경·평안지역에 많이 있는데 현지답사와 관련 자료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또 생활사를 많이 쓰겠다고 표방했는데 그에 대한 이론적인 의미 부여가 부족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두루마기를 쓰면서 왕조시대 신분제도를 깬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었는데 그 사회사·제도사적인 의미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 몇 군데서 이론적인 토대가 미흡하지 않았나 하고 반성하고 있다. 앞으로 보완해나갈 예정이다."

▲ 이이화씨의 <한국사 이야기> 시리즈.
ⓒ 한길사
- 10년간 이 작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던데는 주위의 도움도 적지 않았을 텐데..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젊은 강사급 연구자들이 내 원고를 다 한 번씩 검토해줬다. 또 그들이 조사, 연구한 기초자료를 내게 제공해주기도 해 집필에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 독자들도 더러 자료와 의견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작업을 중단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데는 출판사의 도움이 매우 컸다. 한길사에서는 내 책 전담 편집자를 10년간 붙여줬다. 우리 출판계에선 흔히 보기어려운 막대한 투자를 내게 한 셈이다."

"내년쯤 다시 훌쩍 잠적, '야인 이이화'로 남고파"

- 저술 이외에도 여러 단체에서 활동해오고 있는데, 향후 계획은?
"그간 역사문제연구소, 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회 등에서 대표로 활동해왔고, 지금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모두 역사와 관련을 맺고 있는 단체들이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필요하다고 해서 조금 힘을 보태고 있는데 보람을 느낀다.

이런 단체에서 활동을 하면서 역사의 정의가 유린된 데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민간인학살 문제도 그렇고, 친일파 청산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국회에서 친일파 진상규명법은 누더기 꼴이지만 통과됐으나 민간인 학살 관련법은 국회통과가 무산됐다. 금년에 다시 힘을 모아 기어이 특별법 제정을 관철시킬 방침이다.

이런 사업들이 대충 매듭지어지면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역사가는 바른 역사를 쓰는 게 소임이고, 또 의무이다. 내년쯤에는 훌쩍 잠적할 생각이다. 다시 역사가의 본령으로 돌아가 '야인 이이화'로 영원히 남고 싶다."

[2019년/한길사]New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전22권]최신개정신판/이이화/한국사/이야기

, 한길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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