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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범죄도시>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배우 박지환. 10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MC 유재석이 박지환에게 오랜무명 배우의 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물었습니다.

"돈하고 무관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연기를 너무 좋아하니까 아르바이트하며 연기를 하는 게 너무 당연하고 행복했어요. 연기만 나한테서 앗아가지 않으면 평생 돈 없이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바보일까요? 아니면 자본주의를 이용해 거짓말을 하는 천재 연기자일까요? 돈과 상관없이 행복하다는 대답을 하는 화면 속의 그는 연기자도, 바보도 아닌 행복한 사람 그 자체였습니다. 

저 또한 얼마 전 돈과 무관하게 충만한 행복감을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집 근처 동네 도서관에 들러 책을 대출하고 나오는 길에 '우리가 작곡 프로젝트'란 포스터가 눈에 띄었습니다. 6주간 나만의 노래를 만들어 녹음까지 완성한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취지였습니다. 참가비는 3만 원. 

퇴직 뒤 결심한 것... "일단 해보자"
 
삼송도서관 프로그램 포스터
 삼송도서관 프로그램 포스터
ⓒ 삼송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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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악보를 잘 볼 줄 모르고, 박자 감각도 없지만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남의 일이라 여기고 도서관 문을 나서 지하철역을 향해 다시 걸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는 내내 나만의 노래를 만들어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스스로에게 한 다짐을 떠올렸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더 이상 버킷리스트에 담지 말고, 그냥 해보자.'

밥을 먹다 말고, 정원이 5명인 '우리가 작곡 프로젝트'에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내가 클릭한 것이 동네 도서관의 평범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환상적인 음악여행의 티켓일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음악선생님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 같았습니다. 학생들을 도와주는 데에 진심인 사람이었습니다.

"6주라는 시간은 작곡이론을 배우기에도 모자란 시간입니다. 선생님들이 노래에 담고 싶은 이야기를 에세이 형식으로 먼저 저에게 보내주세요. 그 이야기가 가사가 될 겁니다. 그리고 틈 날 때마다 떠오르는 멜로디를 흥얼거린 후, 저에게 녹음파일로 보내주시면 제가 코드를 따고 악보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수업 전개 방식이었고, 과연 이렇게 해서 노래가 될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키팅 선생님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저는 가사에 최근 25년  직장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심경을 담기로 했습니다.

지난 근 오십 년을 남을 따라 살았으니, 제2의 인생은 남들과 다르게 살아보겠노라는 의지를 담아 '날개 달린 물고기'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자작곡 <날개 달린 물고기>악보
▲ 날개 달린 물고기 악보 자작곡 <날개 달린 물고기>악보
ⓒ 김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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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진행되며 가사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은지 선생님이 질문하자 놀라운 이야기들이 쏟아졌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가족에게 모질게 대한 자신을 자책하는 이, 육아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이, 엄마가 되길 갈망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슬픔에 잠긴 이...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낼 때마다 우리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음악 수업과 철학 수업을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희로애락을 가사에 담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시간 낭비라 하겠지만, 내겐 아니었다

가사 작업은 순조로웠지만 문제는 역시 멜로디였습니다. 그리고, 어둠 속을 헤매던 우리에게 해답을 준이는 키팅 선생님이었습니다.

"발라드, 재즈, 댄스 어떤 장르건 좋습니다. 평소 좋아하는 노래를 모티브 삼아 그저 흥얼거려 보세요. 자신만의 멜로디가 떠오를 겁니다. 그리고 공원을 산책하거나 새로운 장소에서 흥얼거리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과 공일오비의 이젠 안녕을 모티브 삼아 시도 때도 흥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어디서 들어본 듯하지만, 나만의 멜로디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방 안에서, 밥을 먹다가도, 산책을 하다가도 멜로디가 떠오르면 흥얼거렸고, 제주도 여행 도중에는 음악여행을 떠난 작곡가처럼 내가 쓴 가사에 멜로디를 덧입히며 음악의 모양새를 갖춰나가기 시작했습니다. 

3주 차부터 각자 만든 멜로디와 가사에 대한 키팅 선생님의 칭찬 폭격이 시작됐습니다. 선생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어설픈 노래를 보듬어주고 다듬어 주며,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먹방 유튜버들이 맛 표현이 가장 힘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칭찬도 천편일률적이면 립 서비스처럼 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키팅 선생님은 우리의 가사와 멜로디를 세심히 읽고 들은 후, 각자에 맞는 칭찬을 매번 들려주었습니다. 돌아보니 그가 돌본 것은 어쩌면 우리의 노래가 아니라 우리의 지친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쉽게 설명해 달라는 지인의 물음에 '좋은 사람과 데이트를 할 때는 시간이 빨리 가지만,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가지. 그게 상대성이론이네'라고 답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나만의 노래를 만드는 즐거운 시간도 랩처럼 빨리 지나갔습니다.

마지막 수업은 대망의 녹음이었습니다. 한 사람당 한 시간이 할애되었지만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녹음은 7시가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녹음 중인 기자
 녹음 중인 기자
ⓒ 김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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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달뜬 마음과 지친 몸을 이끌고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도서관 관계자도 식사를 함께 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대견함을 격려했고, 도서관에서 검토 중인 작은 음악회가 꼭 성사되어 함께 노래를 부를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습니다.

저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동네 도서관에 작곡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나고 왔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수익성면에서는 무익한 프로젝트입니다. 참석자 누구도 자신이 만든 노래로 수익을 기대하지 않으며, 노래를 만드는 과정은 효율성 측면에서도 시간 낭비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돈과 관계없이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돈 되는 일 말고도,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행복은 의외로 돈이 아니라 동네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태그:#도서관강좌, #음악, #제2의인생, #삼송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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