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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자료사진)
 벚꽃(자료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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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운동하러 나가면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 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보호자로 보이는 젊은 여자이다. 거동이 불편한 어른에게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고 나온 모양이다.

다정한 두 사람을 보니 자꾸만 엄마가 생각났다. 이렇게 봄꽃이 필 때면 더 그렇다. 목련이 고고한 자태로 꽃망울을 터뜨리고 벚꽃도 개화를 서두른다. 그런 몸으로라도 봄기운 가득한 공기와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는 어르신이 부럽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라고 하지 않던가.

3년 전 이맘때 육종암으로 투병 중이던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꽃이라도 마음껏 보게 하려고 땀 뻘뻘 흘리며 동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병이 깊어질수록 우울해하며 말이 없어져 자식들 애를 태웠다.

자식인 우리는 엄마를 조금이라도 웃게 하려고 별짓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꽃 한 송이를 꺾어 귓등에 꽂으며 예쁘다고 해줘도 그저 멍하게 쳐다볼 뿐이다. 그런 엄마가 휠체어 미느라 힘드니 쉬면서 하라며 날 걱정하며 던진 그 말이 지금껏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며 가슴을 후빈다. 가족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만 하다 좋은 시절은 살아보지도 못하고 결국 병만 얻은 엄마에 비하면 그까짓 게 뭐라고, 생각하면 슬프다.

엄마는 한복 바느질을 해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다. 쫄딱 망한 집으로 시집와 살길이 막막해 시작한 바느질이 생계 수단이 됐다. 아기를 낳고도 허구한 날 굶는 새댁(엄마)이 안돼 보였는지 이웃 아주머니 한 분이 쌀을 주면서 한복이라도 지어 보라는 말을 하더란다. 그 말을 헛듣지 않고 한복 한 벌을 구해다 일일이 뜯어 이리저리 맞춰 보고 노력한 끝에 스스로 요령을 터득했다. 

다행히 당시 70~80년대에는 지금과 달리 결혼할 때 한복을 여러 벌 하는 것이 대세였다. 신랑, 신부, 양가 어른 한복은 물론 두루마기까지 합하면 보통 열 벌까지 주문한 집도 있다. 부지런하고 손끝이 야무진 덕에 금방 입소문이 나면서 우리 집은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결혼 손님, 여름에는 삼베와 모시 그리고 깨끼 한복을 하려는 사람으로 붐볐다. 

엄마는 밥 하는 시간을 빼고는 날마다 일에 매달리느라 매일 스물네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손님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고, 약속을 지키려고 날마다 밤을 꼬박 새웠다. 한복들을 많이 구하는 결혼 철이 되면, 한복을 만드느라 엄마가 이불 덮고 편히 잠자리에 드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밤새 가위질과 재봉틀 페달 밟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애처롭게 들릴 뿐이다. 
 
재봉틀(자료사진).
 재봉틀(자료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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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러다 지치면 옷감 뭉치를 한쪽으로 제쳐 놓고 그 자리에서 쪽잠을 잤고, 한두 시간 후 다시 일어나 또 한복을 지었다. 그런 엄마가 가여워 나와 언니는 옆에 앉아 시침질(두 장의 옷감이 서로 밀리지 않도록 일시적으로 꿰매는 방법)을 했고, 재봉질해 놓은 옷고름을 뒤집어 다리미판을 깔고 다림질도 맡아했다. 잔손 가는 일이라도 도와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냇동생 대학 졸업과 함께 엄마의 쪽잠이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추석날 외할아버지 성묘 다녀오다 넘어진 아버지가 목뼈를 다치는 큰 사고를 당해 2년여 동안 병원 생활을 하면서 계속되었다. 그 사고로 전신 마비가 된 아버지를 12년 동안 병간호하느라, 엄마가 제대로 못 자는 것은 여전했다(전신 마비 환자는 움직일 수 없어 새벽에도 몇 번씩 몸을 이쪽저쪽으로 돌려줘야 한다). 

엄마를 생각하면... 고맙고 안타깝다

하지만 엄마의 그런 희생으로 우리 가족이 살아남았고 6남매가 다 잘 공부를 마쳤다. 억척스러운 생활력과 교육열 덕분에 얻게 된 '교사자격증'으로 나는 예순이 넘도록 대우받으며 일할 수 있어 엄마께 항상 고마웠다. 우리 6남매 키울 때와 아버지 병간호할 때는 잠이 부족해보여서 안타까웠고, 나중에 암이 한창 진행되고 나서는 엄마가 약 기운 때문에 잠에 취해 있는 시간이 많아서 안타까웠다. 

아침에 눈을 뜨니 여섯 시 50분, 다시 이불을 목까지 올리고 눈을 감는다. 정년퇴직을 해 아침 시간이 느긋하고 여유롭다. 특히 비라도 오는 날이면 뜨끈뜨끈한 침대에 계속 누워 있어도 된다. 엄마를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과분하다. 독박 육아로 잠 좀 원 없이 자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의 쪽잠에 비하면 그것조차도 사치다. 

거리에는 온통 봄꽃이 만발했고,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엄마의 힘들고 고단한 삶을 지켜보는 것은 끝이 났지만, 봄만 되면 되살아나 마음 한쪽이 아린다. 함께 사진 찍었던 나무 아래에 도착해 말을 걸었다. 

엄마, 이곳은 천지가 꽃이야. 그곳은 어때? 건강한 몸으로 아버지, 언니랑 만나 좋아하는 꽃구경하고 있지?

태그:#벚꽃, #엄마의쪽잠, #그리움,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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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수석 교사입니다. 학교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사연을 기사로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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