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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가지가 일곱개 뻗은 보길도 여항마을 후박나무
 큰 가지가 일곱개 뻗은 보길도 여항마을 후박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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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는 덜봉산이 바람을 막아주고 앞으로는 중리해수욕장이 시원하게 펼쳐진 전남 완도 보길도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여항(余項)마을. 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차를 몰아 통리마을 입구에서 좌회전을 하면 나타나는 마을이다.

여항마을? 처음 간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은 마을이다, 마을이 덜봉산의 하단부에 있고 그 앞은 방풍림으로 심은 후박나무가 가득 차 숲만 보이지 마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처음 간 사람이라면 당황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울창한 후박나무 군락이 거친 바닷바람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주고 있어 주민들이 쾌적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마을 앞에는 목섬이라는 섬이 있다. 목섬 주변엔 여름철이면 자연산 바지락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그래서 한때는 마을 축제로 바지락 캐기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또 이곳에는 '용오리바위'와 '각시바위'가 있는데 용오리바위는 용이 승천할 때 남긴 자국이라 해 서로 다른 암석이 마치 용이 승천하면서 꿈틀대는 모양을 하고 있다.

각시바위에는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옛적에 여항리에 살던 김(金)씨 성을 가진 어부가 고기잡이에 나섰으나 돌아오지 않자, 그의 부인이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바닷가에서 100일 기도를 하자 마치 꿈처럼 살아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도 여항리에선 남편이 큰 바다를 나가면 부인들이 각시바위에서 남편을 기다린다고 한다.     

완도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후박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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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여항마을엔 완도군에서 수령이 가장 오래된 후박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수령은 350여 년, 수고는 20m, 흉고둘레는 310cm로 어른 둘이 안으면 딱 품안에 들어오는 노거수(老巨樹)다. 지난 1982년부터 산림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돼 보호하고 있다. 

여항마을 방풍림은 소나무와 후박나무 군락으로 이루어 졌는데 숲의 80%가 후박나무고 그 중앙에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후박나무 1본이 자라고 있다. 이 후박나무는 바닷가쪽으로 약간 기울어서 심어졌다. 지상에서 5m 정도는 외줄기로 솟아 일곱가지(七支)로 갈라졌는데, 굵은 가지는 마치 목섬의 용오리바위 처럼 뒤틀리고 힘차게 사방으로 뻗었다. 

반들반들한 윤기를 간직한 푸른 잎은 수많은 잔가지와 어우러져 수형이 아주 웅장하다. 마을이 형성될 때 심어졌다고 전해지는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역사성이나 크기, 문화사적, 생물학적으로 보전가지가 매우 높은 나무다. 우리나라 어디에 내놔도 일품(一品)나무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또한 나무가 웅장한 만큼 수형도 뛰어나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커다란 푸른색 우산이 하늘에 펼쳐져있는 것처럼 아름답다.    

후박나무는 우리나라가 원산지로 녹나무과에 속하는 상록활엽교목이다. 

난대수목으로 추위에는 약하지만 내조성이 강해 토질이 비옥한 남해안의 해안지방에서 염기가 가득한 바닷바람을 맞아도 잘 자란다.

수고는 최대 20m 정도로 알려졌는데, 여항마을 후박나무 수고가 20m로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후박나무 중에서는 최대 수고를 자랑한다. 봄이 되면 새순이 돋아나고 5월이 되면 꽃이 피는데 꽃말은 모정(母情)이다. 후박나무의 꽃은 황록색으로 피는데 나무의 크기로 볼 때 꽃이 너무 작아 의외로 꽃이 초라하다. 껍질은 후박피(厚朴皮)라 하여 예로부터 한약재로 널리 이용됐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후박피가 소화를 촉진시키고, 위장을 따듯하게 하며, 토사곽란을 막고 장 기능을 향상시킨다고 기록돼 있다. 또 현대의학에서는 알러지 증상과 당료증상을 개선하고, 피부미용에 도움은 준다고 알려져 있다.  

이 후박나무는 아주 오래전부터 여름철이면 월항마을 주민들의 휴양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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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하나 이 나무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어요"

월항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김영율(71. 월항마을 이장/사진)씨는 ″우리마을은 옛날부터 후박나무 아래를 '새맹달'이라고 불렀다. 그때는 에어컨도 없고 그래서 여름철이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거그로 모테요. 앞으로 중리해수욕장 백사장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수평선의 뭉개구름이 그라고 멋있을 수가 없어요.

또 마파람이 불어서 그라고 시원해요. 그래서 새맹달은 마을 주민들의 휴식처이기도 하지만 요즘으로 치먼 거그가 또 마을의 레이더 기지여요. 거그만 가먼 동내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알 수가 있어요. 누구 집은 머시 어찌고 누구 집은 무슨 일이 일어났고 마을의 크고 작은 이야기가 거기서 모두 소통되고 회자됐어요.

우리가 애릴 때는 집집마다 후박나무 껍질을 벗겨서 말려가지고 팔아 가용(家用)돈도 쓰고 했는디 다른 후박나무 껍질은 다 베께서 말려 팔아도 새맹달 나무껍질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앴어요. 특별히 마을의 당산나무도 아니었는데 누구 하나 그 나무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자라고 있어요.

안타까운 것은 옛날에는 나무뿌리가 밖으로 나오고 지금처럼 자동차가 다니지 안했는디 지금은 주변을 정비한다고 콘크리트로 옹벽을 치고 자동차가 다니게 나무 주변에 복토를 하니 수세가 상당히 약해졌어요. 그래서 지금 마을에서 어떻게 할까 고민중입니다.

우리마을이 보길도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인데 후박나무 방풍림이 가장 좋아요. 저 나무가 심어진 것은 기록은 없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마을의 입도조가 심었다고 전해옵니다.

수령이 350년 정도인데 마을이 형성 된 시기가 조선 효종대로 거의 그 시기이거든요, 그래서 마을의 역사를 증언 할 수 있는 어찌보면 우리 보길도를 대표할 수 있는 노거수(老巨樹)인데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문화재로 지정됐으면 한데 안 돼서 안타깝기도 하고.″ 

김영률 이장의 후박나무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천구리 선착장으로 차를 몰았다.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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