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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의 국어 수행 평가에 대해 물었다. 담당 교사가 나누어 준 수행 평가 계획을 보내주며 한번 살펴보아 달라고 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며. 아들도 담당 교사의 설명을 듣기는 했는데,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단다. 내가 듣기로 전화한 사람의 아들은 그 고등학교에 최상위권 성적으로 입학했다는데, 그런 학생이 어떻게 수행 평가를 준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했으면, 담당 교사의 설명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행 평가 계획을 살펴보고, 이러저러하게 준비하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그 수행 평가 계획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은 '발표 능력' 평가였다. 14개의 채점 기준이 제시되어 있었는데, 만점을 받으려면 그 14개의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했다. 30년 넘게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한 나도 만점을 받을 자신이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중에서 이 14개의 기준을 모두 충족하여 만점을 받는 학생이 몇 명이나 될지 자못 궁금해졌다. 하지만 어떤 의도로 수행평가를 그렇게 계획했는지 알 수 없기에 여기에서 길게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성싶다.

그런데 교직 생활을 하면서 고등학교에서 행해지는 수행 평가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늘 생각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학교의 국어 교과 중 1학년 국어 과목의 수행 평가 계획을 통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내가 근무했던 학교 고3 교실에 붙어 있던 수행 평가 달력. 5월을 '수행 평가의 달'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이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 고3 교실에 붙어 있던 수행 평가 달력. 5월을 '수행 평가의 달'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이다.
ⓒ 이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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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국어 과목은 지필 평가를 60%, 수행 평가를 40% 반영하여 평가하기로 계획하였다. 수행 평가는 다시 2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소통하는 글쓰기'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말 바로 쓰기' 영역인데, 평가 방식은 '서술·논술형'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각각 20% 반영.

한 가지 문제점이 보인다. 평가 방식을 '서술·논술형'이라고 뭉뚱그려 놓으니 어떤 영역을 서술형으로 평가하고 어떤 영역을 논술형으로 평가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소통하는 글쓰기' 영역을 논술형으로 평가하고 '우리말 바로 쓰기' 영역을 서술형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평가 계획을 세울 때, 이렇게 평가 방식을 짐작하게 하면 안 된다.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학교장의 결재가 버젓이 났다.

수행 평가 세부 기준을 살펴보았다. '소통하는 글쓰기' 영역의 평가 방법에 '자신의 관심사와 관련된 경험과 깨달음을 소재로 하여 정해진 분량의 글 서술하기'라고 되어 있고, '우리말 바로 쓰기' 영역의 평가 방법에 '일제식 평가가 아닌 서술형 수행평가 방법으로 수업 중 실시'라고 되어 있다.

두 영역 모두 '서술형'으로 평가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평가 방식을 '서술·논술형'이라고 쓸 필요가 없다. '서술형'이라고만 써야 한다. 실수인가? 학교장 결재가 난 평가 계획에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수행 평가 세부 기준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소통하는 글쓰기' 영역의 평가 요소는 세 가지였다. '주제 선정 및 자료 수집(반영 비율 5%)', '개요 작성 및 초고 작성(반영 비율 5%)', '자신의 관심사를 소개하는 글 완성(반영 비율 10%)'. 

평가 요소를 통해서 볼 때, '소통하는 글쓰기' 영역은 자신의 관심사를 소개하는 제법 긴 글을 쓰게 하고, 이를 평가 요소에 맞춰 평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역은 '서술형'이 아니라 '논술형' 평가 방법을 택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영역의 평가 방식란에 '논술형'이라고 정확하게 명시하고 평가 방법란에는 '자신의 관심사와 관련된 경험과 깨달음을 소재로 하여 정해진 분량의 글 논술하기'라고 적시해야 마땅하다.

'우리말 바로 쓰기' 영역의 평가 요소를 보자. 평가 요소가 무려 여덟 가지였다. '문장을 올바르게 발음하였는가?', '한글 맞춤법에 맞는 단어 표기를 고를 수 있는가?', '표준 발음법 규정을 잘 적용하였는가?', '발음할 때 달라진 음운과 음운 변동의 종류를 잘 표현하였는가?', '음운 변동의 원리와 규칙을 잘 탐구하였는가?', '음운 변동이 일어나는 환경을 잘 표현하였는가?, '음운 변동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는가?', '적용되는 알맞은 한글 맞춤법 규정을 설명하였는가?' 등.

'소통하는 글쓰기' 영역의 평가 요소와 '우리말 바로 쓰기' 영역의 평가 요소를 견주어 보면, 문제점이 단박 보인다. 전자의 평가 요소는 명사로 종결하여 제시한 반면 후자의 평가 요소는 문장으로 제시하였다. 왜 이랬는지 모르겠다. 어느 한쪽으로 통일하여 제시하면 훨씬 깔끔한 평가 계획이 될 텐데 말이다. 또 전자는 평가 요소별 반영 비율이 제시되어 있는데 후자는 그에 따른 반영 비율이 제시되어 있지 않는 것도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채점 기준을 살펴보자. '소통하는 글쓰기' 영역의 평가 요소 중 하나인 '자신의 관심사를 소개하는 글 완성' 부분의 채점 기준은 여덟 개다. '자신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경험에 따른 깨달음의 설명이 타당한가?', '내용이 잘 드러나도록 육하원칙의 내용을 충실히 갖추었는가?', '글 전체의 통일성, 응집성을 해치지 않는 문단과 문장이 구성되어 있는가?', '명확하고 창의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내용을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는가?', '문장부호 사용이 적절한가?', '자료를 인용했을 경우 적절한 자료를, 출처를 밝혀 사용하고 있는가?', '정해진 분량의 글을 작성하였는가?', '수행 과제물을 시간 안에 제출하였는가?' 등.

이때 모든 평가 요소를 충족하면 10점, 6~7개를 충족하면 9점, 4~5개 충족하면 8점, 2~3개를 충족하면 7점, 0~1개를 충족하면 6점을 부여한다. '주제 선정 및 자료 수집'과 '개요 작성 및 초고 작성' 부분의 채점 기준은 각각 다섯이고 충족 개수에 따라 5점에서 1점을 부여한다. 

'우리말 바로 쓰기' 영역의 채점 기준은 평가 요소별로 제시하지 않고 뭉뚱그려 제시하고 있다. 총 다섯 단계이다. '총점 90% 이상의 올바른 발음과 맞춤법을 알고, 각각 적용되는 음운 변동의 원리와 한글 맞춤법 규정을 설명한 경우'는 20점, '총점 89~75%의 올바른 발음과 맞춤법을 알고, 각각 적용되는 음운 변동의 원리와 한글 맞춤법 규정을 설명한 경우'는 18점, '총점 74~55%의 올바른 발음과 맞춤법을 알고, 각각 적용되는 음운 변동의 원리와 한글 맞춤법 규정을 설명한 경우'는 16점, '총점 54~40%의 올바른 발음과 맞춤법을 알고, 각각 적용되는 음운 변동의 원리와 한글 맞춤법 규정을 설명한 경우'는 14점, '총점 40% 미만의 올바른 발음과 맞춤법을 알고, 각각 적용되는 음운 변동의 원리와 한글 맞춤법 규정을 설명한 경우'는 12점을 부여한다. 

채점 기준에도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소통하는 글쓰기' 영역에서는 평가 요소 충족 개수에 따라 점수를 부여했는데 '우리말 바로 쓰기' 영역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말 바로 쓰기' 영역에서는 평가 요소 충족 개수에 따라 점수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이 영역은 서술형 문제를 출제하여 학생들이 획득한 점수에 따라 수행 평가 점수를 부여하는 영역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 영역에서는 굳이 평가 요소를 제시할 필요가 없다. 서술형 문제를 출제한 다음 각 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과 부분 점수 부여 기준을 제시하면 되기 때문이다. 평가 계획을 세울 당시에는 서술형 문제를 출제했을 리가 없을 테니 '우리말 바로 쓰기' 영역의 채점 기준은 '서술형 문제 출제 후 제시'라고 명시해야 옳다.

수행 평가 계획을 왜 이렇게 허술하게 세울까? 그 이유 중 하나는 교사들이 수행 평가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청에서 수행 평가를 일정 비율 이상(내가 근무했던 지역의 경우 40%) 반영하여 평가 계획을 세우라고 하니, 마지못해 수행 평가를 하다 보니 생기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 보니 전년도의 수행 평가 계획을 그대로 제출하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하지만 수행 평가는 매우 중요하다. 수행 평가를 잘 계획하면 학생부종합 전형의 주요 요소로 활용되는 '과목별 세부 능력 및 특기사항'을 충실하게 쓸 수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필 평가로는 도저히 키울 수 없는 학생들의 창의성, 문제해결력, 논리력, 글쓰기 능력, 협동심 등등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수행 평가 계획에 대한 검증 체계가 매우 부실하기 때문이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의 수행 평가 계획 결재 과정은 대략 이러했다. 우선 과목 담당 교사가 수행 평가 계획을 세운다. 그런 다음 이 계획을 교과 부장 교사에게 보낸다. 교과 부장 교사가 해당 교과 모든 과목의 수행 평가 계획을 수립하여 평가 담당 부서로 제출한다. 그런 후 평가 담당 교사, 평가 담당 부장 교사, 교감, 교장의 결재를 거쳐 수행 평가 계획이 확정된다.

여러 단계의 결재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이 과정에서 평가 계획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교과 부장 교사는 평가 계획을 수합하기만 하고 평가 담당 부서에서는 오탈자 수정 정도만 요구하였다. 교감과 교장은 그저 결재 버튼을 꾹 누르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과목 담당 교사들끼리 합의하여 수행 평가 계획을 수립하여 제출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사형통인 것이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학생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수행 평가 계획을 검증을 거의 하지 않고 확정해서는 안 된다. 설계 도면만 믿고 제대로 된 감리를 시행하지 않으면 부실시공이 되지 않겠는가. 수행 평가 계획에 대한 촘촘한 검증 체계를 꼭 만들어야 하는데 학교 현장에서는 그런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현직에 있는 후배 교사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자신이 맡은 과목 특성에 걸맞은 수행 평가 계획을 촘촘하게 세우기를. 수행 평가 계획을 잘 짜면 교사들이 그토록 쓰기 힘들어 하는 과목별 세부 능력 및 특기사항 한 꼭지를 멋들어지게 쓸 수 있고, 학생들은 잘 짜인 수행 평가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숨어 있는 능력을 보여 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태그:#수행평가, #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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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교사로 재직 중. 2년을 제외하고 고등학교에서 근무. 교사들이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음.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 몹시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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