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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학교에 다니면서 알바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학교에 다니며 알바를 하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공부를 찾아서 하는 게 진짜 어려운 거예요."

아들이 말한, '한 달 알바'에 대한 소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기특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50살인 나는 고2 때, 선배를 따라 처음으로 알바를 했었다. 눈 오던 새벽에 한겨레신문을 배달하던 기억이 새롭다. 아들은 나보다 빨랐다.
 
고1이 된 첫째아들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 어릴 적 아빠와 아들 고1이 된 첫째아들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 김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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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아빠의 등을 귀엽게 밀어주던 그 꼬맹이가 이제 수염도 나고, 제법 어른으로 성장해 가면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지난 2월, 첫째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평소에 갖고 싶은 악기를 자신의 힘으로 사려는 목적으로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었다.
   
첫 도전이었던 프렌차이즈 뷔페 식당은 업무의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고 3일 만에 그만뒀다. 하지만 나름의 좋은 기억도 있었다고 한다. 일을 가르쳐줬던 형 누나들이 따뜻하게 대해줬다고 기억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들에게 첫 알바 소감을 말해 달라고 했다.
 
악기와 각종 장비로 아들의 방이 점점 채워지고 있다.
▲ 첫째아들의 방 악기와 각종 장비로 아들의 방이 점점 채워지고 있다.
ⓒ 김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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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들은 "아빠, 공부가 제일 쉬운 것 같아요"라고 웃으며 답했다.

나는 속으로 학교 다니는 것이 얼마나 편한 일인가 생각하고, 아들이 앞으로 열심히 공부에만 전념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오판이었다.

아들은 또 다른 알바를 찾아 나섰다. 군산에 하나밖에 없는 복합쇼핑몰 떡볶이 가게에서 두 번째 알바에 도전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열심히 공부만 했으면 하는 일반적인 부모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뜻에 반대하지 못했다.

남들은 정규수업이 끝나면, 학교에 남아서 자율학습을 하든지, 학원에서, 스터디 카페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의 일반적인 삶이 아닌가. 며칠 하다가 스스로 지쳐서 그만두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2월 22일부터 3월 22일까지. 주말을 빼고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한 달 꼬박 노동한 알바비 52만 원이 아내의 통장으로 입금됐다. 그 과정에서 아내의 수고가 있었다. 학교가 집에서 멀어져 아침이면 등교를 책임졌다. 알바가 끝나면 대기하고 있다가 아들을 모시고 오기 일쑤였다.
 
엄마 통장으로 아들의 알바비가 입금됐다.
▲ 아들의 생애 첫 시간제 노동 임금 엄마 통장으로 아들의 알바비가 입금됐다.
ⓒ 김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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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간에 아들은 알바를 하고 와서는 기타를 치면서 김광석의 노래 '일어나'를 수십 번 부르는 게 일상이었다. 스피커에서는 부모가 알 수 없는 음악들이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아들은 읽고 싶은 책을 밤새 읽고, 글을 쓰기도 했단다. 늘 아침은 비몽사몽, 학교 가기 전, 기상 시간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엄마와의 실랑이가 저강도에서 고강도를 오간다고 했다.

아들이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었으면
 
아들의 얘기인 것도 같고, 작사를 하려고 쓴 것도 같다.
▲ 아들의 메모 아들의 얘기인 것도 같고, 작사를 하려고 쓴 것도 같다.
ⓒ 김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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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듣자 하니, 아들 녀석이 담임과도 담판을 지었다고 했단다. 수학 시간에 집중하지 않아서 선생님이 아들에 뭐라고 했단다. 아들은 담임과의 상담 과정에서 앞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서 수학은 별도 중요하지 않으니, 수학 시간에 집중이 안 된다고 했단다. 결국, 선생님은 아들이 다른 학생들과 선생님 수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는 선에서 정리가 됐단다.

일주일 만에 만난 아들 녀석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아빠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아빠, 제가 모의고사 성적이 인문계 과정을 기준으로 4∼5등급 안에 들었어요. 알바 안 하고 열심히 공부만하는 친구들보다 제가 성적이 더 잘 나왔어요. 전북 지역 국립대는 갈 수 있대요."

"아들, 수학과 영어는 몇 등급이나 나왔냐?"

"아빠, 수학은 8등급요. 지난 문제를 풀 때는 다 맞았는데. 밤새 책 읽다가 너무 피곤해서 영어회화 시험 시간에 자버렸어요, 아마 영어는 5∽6등급은 나왔을 거예요. 아빠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방치했는데, 이 정도면 엄청나게 잘하는 거잖아요."

"야, 그건 아니지. 엄마 아빠가 방치한 게 아니라 어려서부터 너희에게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빨리 독립할 수 있도록 존중해준 거야."


사실, 두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부부는 맞벌이했다. 아빠는 이곳저곳, 이일 저 일 하느라 거의 육아와 교육과 가정에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아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믿고 싶다. 때로는 너무 과해서 부모와 부딪칠 때도 많다. 하지만 세상사에 기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빠가 아들의 알바 과정에서 기대했던 '노동의 힘듦'을 통해 '열공'하는 학생으로의 전환은 성공하지 못했다. 다만 아들이 자신의 공부와 노동과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점은 나름의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아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아빠, 앞으로 며칠만 알바를 할 거예요. 다음 달부터 시작되는 서울, 부산, 울산쪽 예술고 보컬과로 편입할 때까지 군산 시내 조그마한 건물에 월세를 얻어서 학교 끝나면 보컬, 악기연습, 공부도 할 거예요. 이제 군산에서는 알바 안 하고 방학 때나 편입되면 그 동네에서 알바할 거예요."

아이고, 산 넘어 산이다. 아들의 말을 듣고 엄마는 뭐라고 할지. 집안에 한바탕 태풍이 불지도 모르겠다. 분노 게이지를 누그러뜨리고 나의 옛 추억을 소환한다.

고등학교 때 땡땡이는 기본, 결석은 다반사. 한 반 52명 중 당당히 51등을 했던 기억. 학교 밖 선배들과 의식적으로 몰려다니며 질풍노도의 시절을 보냈었다. 과연 내가 아들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지금까지 나를 있게 한 그 시절에 봤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과 학생들의 모습은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거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

태그:#청소년, #노동, #알바, #아빠,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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