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5 16:39최종 업데이트 24.03.2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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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6개월 뒤인 1946년 2월 11일, 몽양 여운형과 김일성이 평양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틀 전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 된 34세의 김일성은 이날 회담에서 남북을 아우르는 민주주의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면서 50세의 여운형에게 개인적 친밀감을 표시했다. 김일성의 발언 내용을 담은 그달 11일 자 '조선인민당 위원장 려운형과 한 담화'(<김일성 저작집> 제11권)에 따르면,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과거 산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싸울 때 선생과 련계를 가지려고 공작원을 파견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하여 유감스럽게도 선생과 련계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예전부터 선생을 만나고 싶었다며 친근히 대했지만, 서울로 귀환한 여운형은 자기를 따르는 청년들 앞에서 김일성의 남침 가능성을 예언했다고 한다.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승환·최창륜과 함께 이 말을 들었다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1기인 친일파 방원철의 회고에서 그 예언이 언급됐다. 이 회고록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내가 겪은 한국전쟁과 박정희 정부>에 실려 있다.

2021년에 <동방학지> 제197집에 수록된 김선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논문 '국가건설기 여운형 그룹의 북한군 창설 과정 참여와 월남'에 인용된 위 회고록에 따르면, 방원철은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민주국가인 미국의 지도하에 있는 남한이 북을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며, 북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이 벌어질 것은 확실한 일이라고 하였다"라고 회고했다.

여운형은 방원철처럼 일본군 경력이 있는 청년들을 이북에 파견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들을 보내 이북의 군대 창설을 돕고 김일성의 남침을 견제한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고 방원철은 말했다.

위 회고록에 따르면, 여운형은 "남한에는 제군들의 선배·동료들이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으나, 북에는 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라며 "제군들이 북에 가서 군을 장악하는 것만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저지할 수 있는 길이 될 것 같다"고 청년들을 격려했다. 자기 휘하에 들어온 친일파 군인들을 월북시켜 북한 군대를 장악할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1998년 3월 18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132회는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최창윤·박창암·박임항·방원철 등 만군 출신 장교들은 해방 직후 박승환을 중심으로 서울에 모였다가 여운형의 지시를 받고 김일성의 인민군 창설에 참여하기 위하여 1946년 초에 월북"했다는 말로 설명한다.

방원철이 얻은 다섯 번의 기회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1년 선배이자 그와 같이 8단에서 군무했던 방원철. 왼쪽은 중위 시절, 오른쪽은 97년 모습이다. ⓒ 자료사진

 
위 김선호 논문이 '여운형 그룹'으로 지칭한 방원철 등은 1946년 4월까지 월북을 마쳤다. 10여 명 정도인 이들은 군대 편제나 인사 문제 같은 민감한 분야를 제외한 지휘부·보병부대·군관학교 설립 등에 관여했다. 인민군의 군사용어나 제복, 군사교범 같은 것도 이들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이들은 상당히 과학적이었다. 군대 창설에 앞서 이북의 산업생산능력부터 조사했다. 위 논문은 "여운형 그룹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명의로 된 신임장을 가지고 8월 14일부터 1주일 동안 전체 산업체의 생산능력을 조사했다"라며 "이 생산능력에 맞추어 2개 사단 창설에 필요한 각종 장비의 소요량을 일람표로 작성"했다고 설명한다.

이들의 작업에 힘입어 북한은 1948년 2월 8일 평양 역전광장에서 조선인민군 창설식을 열었다. 임무를 마친 이 그룹은 인민군 창군 완료 전에 투옥 등의 형식으로 숙청됐다. 이들은 석방 뒤 육체노동 등에 종사하다가 1948년 중에 월남해 국군 입대 등의 경로를 밟았다. 이들을 북에 보낸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지금의 서울 대학로에서 암살을 당한 뒤였다.

이 그룹 중에서 방원철은 인민군 창설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이력이 있었다. 3·1운동 1년 뒤인 1920년 만주 옌지현(연길현)에서 태어난 그가 만주군 중위까지 지낸 친일 군인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일반적인 친일 군인에 비해 항일군에 상당히 심대한 타격을 줬던 인물이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방원철 편은 1944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팔로군(중국 국민혁명군 예하 제8로군)의 음어(陰語)를 청취하고 이를 해석해 본부로 보고함으로써 2개 대대가 출동해 팔로군 무장대원 20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라고 설명한다.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일본과 만주국을 위해 이 정도 일을 한 그가 인민군 창설에도 관여했던 것이다.

위 사전에 따르면, 그는 룽징(용정) 광명중학교 3학년 무렵에 여운형의 강의를 듣고, 5학년 때 만주군 장교인 정일권의 '군관에 응모하라'는 강의를 들었다. 훗날 여운형의 지시에 따라 월북한 것을 보면, 3학년 무렵의 그 강의가 상당한 감응을 일으켰으리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응은 5학년 때 들은 정일권의 강의에 덮이고, 그는 만주군에 들어가 일본의 녹봉을 받는 친일군인이 됐다. 팔로군 200명을 희생시킨 데서도 나타나듯이, 그는 일왕의 녹봉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했다.

방원철은 해방 1개월 전인 1945년 7월에 '일제가 패망할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휴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휴가를 가지 못하고 팔로군 소탕전에 투입됐다. 그런 뒤 '즉시 귀대하라'는 본부 부관 박정희의 지시를 받고 8월 10일 본부에 귀대했고, 7일 뒤 패망 소식을 듣고 무장해제를 당했다.

'군관에 응모하라'는 강의는 이 시기의 그를 또다시 움직였다. 1946년 2월 서울에 온 26세의 방원철은 미군정 휘하의 남한 장교가 되기 위해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여운형 지지자인 박승환의 권유로 입학을 포기했다.

그런 방원철에게 '이북 군대를 창설하라'는 여운형의 지시가 내려졌다. '군관에 응모하라'의 세 번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월북해 북한군 창설을 도운 그는 그 뒤 숙청돼 1년 3개월 정도 수감 생활을 한 다음, 전찻길 노동자로 일하다가 추석인 1948년 9월 23일 월남했다.

새로운 군대로 그를 부르는 '군관에 응모하라'는 부름은 그의 인생에 다섯 번 있었다. 제1회 응모는 만주군에, 제2회 응모는 미군정하의 남한군에, 제3회 응모는 장래에 세워질 북한군에 대한 것이었다. 네 번째는 1948년 월남 뒤에 있었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1949년 12월 이용문 정보국장(일본 육사 50기)의 도움으로 육군 소령으로 임관했고, 이후 육군 중령으로 진급한 뒤 초대 전사감, 국방부 제3국 행정과장, 2사단 17연대 부연대장을 거쳤다. 육군 대령으로 진급해 33사단(수도사단) 102연대(기갑연대) 연대장, 육군본부 군사발전국 전투과장 등을 지냈다."

'군관에 응모하라'는 네 번째 부름이 정부수립 뒤의 남한 정부에서 나온 데 이어, 다섯 번째 외침은 해방 직전에 본부 귀대 명령을 내린 박정희에게서 나왔다. 41세가 된 그는 박정희를 따라 1961년 5·16쿠데타에 가담했다. 군사적인 활로가 보일 때마다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군사정권인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정보분과위원회 전문위원이 됐다. 또 경찰 요직에도 배치됐다. 그해 7월 26일자 <조선일보> 1면 중간은 "치안국 정보과장에 방원철 대령을 보임"하였다고 보도했다.

만주군, 인민군, 국군까지... 혼란스러운 발자취
 

1963년 7월 29일자 <경향신문> 기사 '김종필과의 충돌로 제거당했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제1회 '응모'는 일제의 패망으로 귀결됐고, 제2회 응모는 여운형 지지자의 권유로 무산됐고, 제3회 응모는 북한 정권의 숙청으로 귀결됐다. 제4회 응모는 국군에 대한 그 자신의 배신으로 귀결(쿠데타 가담)됐다. 박정희를 따라간 제5회 응모는 국군 내의 만주군 인맥이 숙청된 1963년의 '반혁명 사건'으로 귀결됐다. 그는 박정희 정권 전복을 꾀했다는 이 역모 사건의 주모자 급으로 분류됐다.

그해 7월 29일자 <경향신문> 기사 '김종필과의 충돌로 제거당했다'에 따르면, 방원철은 법정에서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므로 공소취하가 타당하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1939년 만주 군관학교에 진학해 6년간 친일재산으로 생활하며 일제에 충성한 방원철은 이 군대 저 군대를 넘나들며 파란만장하고 혼란스러운 발자취를 남겼다. 일본 편에도 서고 미군정 편에도 서려 하고 여운형 편에도 서고 북한 편에도 서고 국군 편에도 서고 박정희 편에도 섰다.

이승만 정권 때인 1954년에 충무무공훈장을, 박정희 군사정권기인 1962년에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은 그는 자신을 숙청한 박정희 정권에 다시 기용돼 1968년에 중앙정보부 대남전략 교수가 됐다. 1999년에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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