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0 16:06최종 업데이트 24.03.1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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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1948년 전후에 벌인 것은 건국전쟁이 아니라 친일전쟁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친일파 김성수 및 친일파 노덕술의 행적이다.

해방 직후의 보수세력은 독자적인 대권 후보를 배출하지 못했다. 1947년 7월 30일 자 <동아일보>에도 보도됐듯, 이들의 구심점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은 '친일 원흉'이란 손가락질을 받았고 그래서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기 힘들었다. 한민당 지도자 김성수가 독립운동권의 문제아인 이승만을 '1호 인재'로 영입한 것은 그 때문이다.


친일파들의 후원을 받아 대권을 향해 나아가던 이승만은 헌법 조문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조문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제1대 총선 직후인 1948년 6월 8일 국회 헌법기초위원회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려 하자, 그는 15일과 21일 위원회를 찾아가 대통령중심제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6월 18일 자 <군산신문>에 '이 박사 헌위(憲委)에 임석, 대통령책임제 역설'이란 기사가 났을 정도로 그의 애착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자기에게 불리한 조문이 없는지를 구석구석 살핀 이승만은 헌법 맨 앞의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대목을 문제 삼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선언하고 그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운영하겠다는 뜻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2023년 현재의 극우세력이 내세우는 논리대로라면 3·1운동과 분리된 별도의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 골몰했어야 하지만, 1948년 전후의 이승만은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건국전쟁이 아닌 친일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김성수와 한민당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이 세력의 입지를 굳혀준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또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파들을 적극 비호해준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독립운동가 검거에서 악명 떨쳐

대한제국 선포 2년 뒤인 1899년 6월 1일 울산 혹은 개성에서 출생한 노덕술은 울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한 뒤 일본인 잡화상에서 일하다가 취직을 목적으로 홋카이도에 다녀왔다. 그런 직후에 순사가 됐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5권에 따르면, 이때가 열아홉 살 되는 1918년이다. 3·1운동 전년도인 이 해에 경남 보안과 순사가 됐다.

그 뒤 경부보와 경부를 거쳐 경시 계급까지 승진한 그는 해방 당시에 평남경찰부 수송보안과장이었다. 수송보안과장이란 직함은 수송과 관련된 보안 업무를 얼핏 떠올리게 만들지만, 실제는 훨씬 더 큰 임무를 띠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1944년 6월 전시체제 하에서 경찰의 임무가 치안유지 외에 징병·운송·방공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찰기구가 개편되어 기존의 보안과가 수송보안과로 확대 개편"됐다고 말한다. 첩보나 시국사범 등을 다루던 보안과장이 강제징병과 화물차 징발 등도 함께 담당하는 수송보안과장으로 불리게 됐던 것이다.

순사가 된 청년 노덕술은 독립운동가 검거에서 악명을 떨쳤다. 그의 주무대는 학교였다. 1929년에는 중학교급인 동래고등보통학교의 교원을 체포했고, 동래유치원에서 강연회를 개최한 재일 유학생들을 검거했다.

그의 반민족행위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학생들을 체포한 뒤 고문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부산제2상업학교에서 항일 독서모임인 흑조회를 결성한 독립운동가 김규직이 1929년에 향년 20세로 순국한 것도 그 때문이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14권 김규직 편은 "일경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옥중에서 순국"했다고 알려준다. 그 일경이 바로 노덕술이다.

흑조회 부회장 유진흥도 고문의 결과로 1929년에 재판 과정에서 순국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인용된 1949년 2월 19일 자 <서울신문>은 유진흥이 "고문 끝에 피를 토하며 '노(盧)놈, 노놈' 하고 부르짖으며 절명"했다고 보도했다. 스무 살 전후의 유진흥이 서른 살 된 노덕술을 보며 '노놈, 노놈' 하며 치를 떨 청도로 고문이 악독했음을 느낄 수 있다.

일제는 그런 '공로'를 치하해 1941년에 서보장이라는 훈장을 수여했다. 노덕술은 이 훈장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분발'해 징용·징발에서도 실적을 올렸다. <친일인명사전>은 1944년 무렵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평안남도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재직 시 자동차 수송 통제를 목적으로 조직된 평남자동차수송협력회의 이사를 지내면서 여러 대의 화물자동차를 징발하여 군수품 수송에 제공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고 기술한다.

해방 뒤에도 독립운동가들 죽이려 모의

노덕술은 1918년부터 27년간 일왕(천황)의 녹봉으로 친일 재산을 축적했다. 1945년 일제 패망으로 더는 그 녹봉을 받을 수 없게 됐지만, 그는 해방 뒤에도 경찰 신분을 유지했다. 경기도경찰부 수사과장도 되고 수도관구경찰청(수도경찰청) 수사과장도 됐다.

주목할 것은 그가 하는 일이 해방 전이나 후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그는 해방 뒤에도 독립운동가들을 서슴없이 죽이려 했다.

1948년 9월에 친일청산 기구인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자, 그는 이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위원회 관계자와 독립운동가들을 암살하는 계획에 참여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인용된 허종 경북대 연구원의 저서인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친일파 청산, 그 좌절의 역사>는 그해 10월경에 노덕술이 수도경찰청 수사지도과장 최난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등과 모의한 내용을 이렇게 정리한다.

"암살 대상으로 지목된 인물은 특위 위원장 김상덕, 부위원장 김상돈, 특별검찰관장 권승렬, 특별검찰관 곽상훈·서용길·서성달, 특별재판부장 김병로, 특별재판관 오택관·최국현·홍순옥 등 반민특위의 핵심 관계자 및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의원 이청천뿐 아니라 친일파 처리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청년단체의 간부인 유진산·이철승·김두한도 암살 대상이었다."

1949년 1월에 전모가 폭로된 이 암살 계획은 친일 경찰 몇몇이 임의로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회 반민특위 수뇌부는 물론이고 대법원장 겸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장 김병로, 국회의장 신익희, 전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지청천) 등이 암살 대상으로 선정됐다. 친정부 세력이 입법부와 사법부 수장들까지 제거하는 일은 친위 쿠데타가 아니면 쉽게 볼 수 없는 일이다.

'반민특위 파괴 공작' 노덕술 비호한 이승만
 

포승줄에 묶여 반민특위 재판정에 끌려가는 노덕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세 명의 사람 중에서 맨 왼쪽이 노덕술. ⓒ 친일인명사전

 
노덕술은 악독하기는 해도 친위 쿠데타에 필적할 대형 사고를 칠 만한 인물로는 보기 힘들다. 어린 학생들을 체포해 고문하거나 화물차를 징발하는 일에서는 실적을 냈지만, 거시적인 정세나 판도에 영향을 줄 정치적 사건은 기획한 적이 없었다.

배후에서 움직이는 인물이 있었다는 점은 그가 반민특위에 체포된 직후에 잘 나타났다. 노덕술이 체포되고 이틀 뒤에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한 반민특위 수뇌부 6인이 경무대의 호출을 받았다. 경향신문사 특별취재반이 1977년 8월 2일 자 이 신문에 정리한 '반민특위 제37회'는 이승만이 이들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구속한 사람들은 조사가 끝나면 우리 검찰청에 넘겨야 합네다"라고 말했다고 설명한다.

김상덕 위원장이 특별법인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에 의한 일이므로 넘길 수 없다고 거절하자, 이승만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노덕술을 풀어주어야겠습니다"라는 말을 툭 던졌다. 6인을 호출한 용건이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요구도 거절을 당하자 그는 "그럼 나도 해볼 일이 있읍네다"라고 응수했다. 위 기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며칠 뒤 이승만은 공산 파괴분자의 활동을 들어가며 반민특위의 활동에 신중을 기하라는 위협적인 담화를 내고 뒤이어 반민법 해당 공무원 조사중지 명령을 내린다."

이승만은 친위 쿠데타급의 반민특위 파괴 공작에 참여한 노덕술을 비호했다. 이는 그 일이 노덕술의 뜻에 따른 것인지 이승만의 뜻에 따른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1948년 전후의 이승만이 건국전쟁이 아닌 친일전쟁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이승만이 중점을 둔 것은 친일세력을 비호해 이들을 우군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1919년 건국'이 표기된 헌법 전문을 보고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데서도 나타나듯이 그는 '1919년 건국'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건국전쟁이 아니라 친일전쟁에 불과했다.

친일경찰 노덕술은 이승만이 그 무엇보다 친일파 보호에 골몰했음을 입증하는 데에 결과적으로 기여했다. 그 뒤 무죄 선고를 받은 그는 이승만의 비호하에 육군 헌병대로 자리를 옮겨 제2육군범죄수사단 대장까지 승진했다가 뇌물수수 혐의로 1955년에 징역 6월을 선고받고 파면됐다.

그의 반역사성은 그 뒤에도 계속 나타났다. 4·19혁명 직전도 아닌 그 직후에 국회의원이 되겠다며 총선에 출마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1960년 7월 제5대 총선 때 그는 경남 울산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여기서 낙선한 그는 1968년 4월 1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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