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1 19:19최종 업데이트 24.03.01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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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군 부림면 신반공원에 있는 '기미삼일독립운동기념비'. ⓒ 윤성효

 
경상남도 중앙인 의령군은 <세종실록> 지리지 의령현 편에 따르면 "땅이 기름지고 기온이 따뜻"한 지방이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벼·조·감·배·보리·모시·목면·뽕나무와 꿀·칠·왕대·종이·사슴가죽·노루가죽·여우가죽과 인삼·맥문동 등등이 이곳에서 생산되거나 공납된다고 말한다.

의령은 이런 생산물뿐 아니라 의병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최초의 임진왜란 의병장이자 대표적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곳 사람이다.


일본군이 임진왜란을 이기지 못한 핵심 원인 중 하나는 이순신의 바다인 남해에서 연전연패하고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데 있다. 이 전쟁을 지휘한 세자 광해군의 핵심 참모였던 어우당 유몽인은 "도적들이 전라도를 범하지 못한 것은 다 재우의 힘이다"라고 <어우야담>에서 평했다. 광해군의 전쟁 참모가 이렇게 말했으니, 광해군 본인도 '곽재우가 아니었다면'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으리라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의병들과 홍의장군 곽재우를 배출한 의령 땅은 3·1운동 때도 항일투사들을 대거 배출했다. 1919년 3월 15일 부림면 신반리 장터 시위의 주역 중 하나인 박재선도 그중 하나다.

일제시대 '태형'의 의미

국가보훈부의 전신인 원호처 산하에 설치된 기구가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다. 이 위원회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서적이 <독립운동사>다. 이 책 제3권 '삼일운동사' 편에서 박재선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태양이 3월 15일 정오 위치에 가게 되자, 박재선과 정주성·황상환·최한규·장요한 등이 품 안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며 군중들 속으로 진입했다고 서술한다.

"정오가 되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주동 인물들은 장 복판에서 재빨리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준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모인 장꾼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서 군중들의 열광적인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2003년에 발간된 의령군 역사서인 <의령군지>에 따르면, 시위 주역들은 일제 경찰의 진압 능력을 사전에 약화시키기 위한 방책도 구상했다. 이들이 정오 시각에 시위를 벌인 것도 그 때문이다. "경찰의 병력 분산을 꾀하기 위해 3월 15일 정오 의령면의 두 번째 의거와 때를 같이하기로 하였다"라고 <의령군지>는 설명한다.

박재선 등이 태극기를 쥐여주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주민들과 행상들도 주저없이 만세를 부르짖었다. "신반장터가 온통 만세 함성으로 들끓었다"라고 <의령군지>는 묘사한다. 일제 지배 9년간에 축적된 응어리가 어떠했을지를 짐작게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만세 소리는 잠시 뒤 비명과 아우성으로 바뀌었다. <독립운동사>는 "당황한 경찰은 황급히 출동하여 총검을 휘두르면서 군중을 야만적으로 탄압하여 해산"시켰다고 말한다. 일제 의령경찰서에서 파견된 순사들은 시위대 속에서 주동 인물들을 찾아냈다. "박재선·박우백은 태(笞) 60을 언도받았다"고 이 책은 알려준다.

<독립운동사>는 박재선이 태형 60대를 받은 사실만 기술하지만, 2021년 3월 1일자 <오마이뉴스> 등에 보도된 것처럼 실제로는 태형에 더해 징역형도 함께 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다고 알려져 있다. (관련기사: "만세의거 주도한 시아버지 명예 찾아드리는 게 평생 소원"https://omn.kr/1s8zm)

국가보훈부의 전신인 국가보훈처는 2019년까지 여섯 차례나 박재선에 대한 심사를 보류했다. 징역형을 받은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다.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1만 7915명 중에서 박재선이 두 명 있지만, 이분들은 의령 출신이 아니라 각각 안동 및 부산 출신이다.

박재선이 받은 태형을 조선시대 사극에 나오는 장형(60~100대)이나 태형(10~50대)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요즘 시대 같으면 '징역 사느니 차라리 60대 맞고 때우겠다'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태형은 달랐다.

일제강점기 때는 태형을 받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는 분위기가 더 강했다. 태형을 직접 체험해 본 사람들이 특히 그랬다고 한다. 작년 6월 <유관순 연구> 제28권 제1호에 실린 김상균 백석대 경찰학부 교수의 논문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사법적 통제에 관한 연구'는 이렇게 말한다.

"관헌의 기록에 의하면 때로 자유형을 기피하고 태형을 희망하는 자가 없지 않지만, 태형의 전과가 있는 자는 그 고통을 경험하여 그 두려움으로 자유형을 희망하는 자가 많음을 볼 때 그 효과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일본은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벌어진 1882년에 태형 제도를 폐지했다. 그랬던 일본이 식민지에는 태형 제도를 적용했다. 일제 식민지배를 받은 한국·대만과 랴오둥반도(요동반도) 관동주 같은 데서는 태형 제도가 시행됐다. 식민지 민중을 길들이는 도구로 매질이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

태형 전과자가 '차라리 들어가 살겠다'고 말하는 일이 많았던 것은 이것이 조선시대의 곤장형과 판이했기 때문이다. "형구의 재질 자체가 가죽으로 바뀌어 채찍과 같은 효과를 내면서 훨씬 혹독한 매질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가혹한 형벌적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라고 위 논문은 설명한다.

일본은 식민지 대만에는 벌금을 부과하는 경우가 많았던 데 반해, 식민지 한국에는 매질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위 논문은 "대만의 경우 저항의 정도가 낮고 배금주의 성향이 강해 재산형의 부과가 적절하였지만, 조선의 경우는 저항의 정도가 높고 지속적이기 때문에 더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처벌 방법이 요구되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라고 말한다.

박재선은 왜 독립유공자가 아닌가
 

2021년 3월 1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신반공원의 "기미삼일독립운동기념비"에서 열린 추모제례에 온 고 박재선 선생의 며느리 정옥이 여사와 최영열 선생의 손자 최경호 유족대표. ⓒ 윤성효

 
일제강점기 태형이 조선시대 태형보다 무서웠고 대만보다 한국에서 태형 집행이 많았던 사실은 국가보훈부의 유공자 심사 방식에도 영향을 미칠 필요가 있다. 

일제가 항일운동을 억압하는 도구로 태형을 활용했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으로 인한 태형 수형자를 항일 유공자로 인정해야 필요성을 보여준다. 징역형이 입증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태형 수형자 박재선을 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현실과 동떨어진다.

<의령군지>에 수록된 '의병의 노래'는 "임진년 사월달에 왜구떼 침노하니/ 의병의 첫함성을 겨레 앞에 외치었네"라며 "홍의장군 앞장서니 맨주먹 백성들이 이 강토 방방곡곡 불길 같이 일어났네"라고 노래한다.

1919년 당시의 박재선도 마치 홍의장군의 후예처럼 산반장터 시위를 앞장서서 주도했다. 그를 비롯한 시위 주역들은 '의병의 노래'의 뒷부분을 연상시키는 모습도 보여줬다.

'의병의 노래'는 위 구절에 뒤이어 "전술도 신출귀몰 왜적떼 몰아내니/ 의병의 구국항쟁 이 나라를 구하였네"라고 노래한다. 부림면 주민들과 박재선은 일경 병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의령면 시위가 열리는 시각에 부림면 시위를 동시에 일으켰다.

정오의 태양은 의령면과 부림면을 함께 비췄지만, 일경은 함께 진압할 수 없어 병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박재선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지만, 박재선이 신출귀몰한 항일장군 곽재우의 계승자라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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