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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멸의 위협 속에 지역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활동과 노력을 소개합니다. 더불어 농촌 문제와 우리 사회 소수자들의 생각을 전합니다.[기자말]
드나드는 이도, 지나치는 이도 별로 없는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봉곡마을에 가면 그곳에 뿌리내려 살았고 지금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담아낸 마을박물관이 있다. 그 마을엔 또 할머니 할아버지와 글쓰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시도 읽고 연극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행복한 노인학교도 있다. 2005년에 이 마을에 들어온 이재철·박후임씨 부부가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이뤄낸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봉곡마을의 마을박물관
▲ 학선리마을박물관 전경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봉곡마을의 마을박물관
ⓒ 월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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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 : "애초에 마을 일을 하려고 이곳으로 온 건 아니었어요. 그저 자연 속에서 인문학 공부도 하고 쉴 수 있는, 마치 개신교의 수도원 같은 걸 꿈꾸면서 내려왔죠. 아마 마을에서 떨어져 살았더라면 지금도 마을과 무관하게 조용히 살았을 거예요. 그런데 마을 한가운데 살다 보니까 시나브로 마을 분들의 삶이 우리의 마음속으로 고스란히 들어오게 된 거죠. 그러면서 물음이 일어났어요. 도대체 이 농촌이라고 하는 게 뭘까? 또 마을이라고 하는 게 뭘까?

이런 물음들 속에서 왜 우리 농촌의 마을들은 어르신들만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까? 그리고 저희도 농사를 짓다 보니까 흙과 농사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분들의 삶이 결코 가볍게 흘려보낼 수 없는 굉장히 훌륭한 삶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쭉 살아오신 분들은 그걸 모르고 계시더라고요. 나는 배우지 못하고 가난해 떠나지 못하고 여기서 그냥 살아왔다는 피해 의식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만은 여기서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들 자녀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런 마음들, 고향을 지키려는 마음과 떠나보내려는 이중성이 있었던 거죠.

당신들이 굉장히 훌륭한 삶을 살았노라고 저희가 말씀을 드려도 본인들 스스로 그것을 인정해야 온전한 사실이 되는데 그게 어렵더라고요. 그 사실을 모두가 발견하고 인정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어떤 매개체가 있을까를 고민하다 사진을 생각하게 된 거죠." 
 
마을박물관의 전시물은 모두 주민들이 내놓은 생활용품들이다.
▲ 학선리마을박물관 전시물 마을박물관의 전시물은 모두 주민들이 내놓은 생활용품들이다.
ⓒ 월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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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박물관의 전시물은 모두 주민들이 내놓은 생활용품들이다.
▲ 학선리마을박물관 마을박물관의 전시물은 모두 주민들이 내놓은 생활용품들이다.
ⓒ 월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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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후임 : "어르신들 집에 가서 앨범을 펼쳐 놓고 사진을 하나하나 같이 보다 보면 이야기가 끝이 없더라고요. 비록 찢어지게 가난하고 몸도 힘들었을 시절의 추억이지만 당시의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할 때면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신이 나서 말을 못 끊을 정도가 되는데 이건 뭘까?라는 물음이 또 일어났지요.

사진 속에는 젊고 싱싱한 육체로 당신들이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내던 시절이 담겨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아무리 세탁기가 있고 냉장고가 있어 편해졌지만, 그때가 좋았지, 그때가 좋았어… 하시는. 그게 답이겠죠. 몸은 힘들지만 삶의 중심으로 있었던 시절이니까요."

이재철 : "어르신들께 옛날 사진을 모아 달라고 그랬죠. 그렇게 사진을 모으다 보니까 집집이 발견되는 게 또 있는 거예요. 앨범을 펼치다가 그 속에서 사성(사주단자의 봉투에 쓰는 말. 사주(四柱)) 같은 게 나오기도 하고, 집 뒤꼍에 가보니까 베틀의 부속품들이 보이기도 하고. 사진과 함께 이런 물건들도 같이 수집해서 하나둘씩 모으게 됐습니다.

제가 마을박물관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완벽한 결말을 그리고 하지는 않았어요. 주위의 반응을 보면서 소박하게 천천히 해야 했습니다. 왜냐면 나는 이런 걸 원하지만 마을 주민 중에는 또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도 있을 수가 있거든요. 남들 앞에 내놓기 민망하거나 밝히고 싶지 않은 사연도 있을 수 있잖아요."  

 
마을박물관의 전시물은 모두 주민들이 내놓은 생활용품들이다.
▲ 학선리마을박물관 마을박물관의 전시물은 모두 주민들이 내놓은 생활용품들이다.
ⓒ 월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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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건 아닌데
   
마을박물관에 전시된 주민의 가족사진
▲ 학선리마을박물관 전시물 마을박물관에 전시된 주민의 가족사진
ⓒ 월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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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박물관에 전시된 주민의 가족사진
▲ 학선리마을박물관 전시물 마을박물관에 전시된 주민의 가족사진
ⓒ 월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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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마을 어르신들은 벽에 걸려있는 자신과 가족의 사진을 보며 어떤 반응을 보이시던가요?
이재철 : "사진을 보면서 흐뭇해하시죠. 그러면서 연관된 사진이나 물건이 우리 집에도 있다며 가지고 오십니다. 그렇게 물건들이 하나둘씩 늘어난 거죠. 당신들이 직접 전시물을 설치해 주기도 하고 봉곡교회 목사님도 같이 돌아다니면서 사진도 모아주시고 작업을 같이 해주셨죠. 초창기엔 박물관이 시멘트 바닥이다 보니까 습해서 동네 분들이 벽에다 한지도 붙이고 지저분한 것들 정리도 같이 해주시고 그랬습니다."

- 인건비도 못 받는 적은 지원금만으로, 때론 아무런 지원 없이 마을사업을 해나가기가 간단치는 않았을 텐데 봉곡마을 주민들은 왜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겁니까? 어떤 결과를 기대하고 마을 일을 하는 겁니까?
이재철 : "그러게요. 많은 분이 왜, 어떤 의도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묻습니다. 밖에서 지금의 우리 마을의 모습을 보는 분들은 사실 결과만 본 거지 그동안 마을의 변화 과정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사실 처음부터 무슨 계획을 세워놓고 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걸 해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게 아니라 이거 재밌을 거 같은데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올라오는 때가 있어요. 그렇게 누군가 의견을 내면 옆에서 서로 도와가며 하나씩 하다 보면 마을의 일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 봉곡마을의 주민들과 두 분이 작년에 하신 일들을 대충만 봐도 엄청 많더라고요. 박물관 조성과 운영도 그렇고 행복한 노인학교만 보더라도 어르신 한글 교실, 학생들과의 여행도 여러 번 가셨고, 마을 분들과 마을기록영화(봉곡멋쟁이)도 만들었고, 공유장터도 열었고, 마을의 축제에서 춤 공연도 했고, 주민자치센터에서 할머니들 시 낭송도 하셨고, 행복한 노인학교 작품전시회도 여셨어요. 이 모든 일들이 그냥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마을의 일이라는 게 어느 한 사람의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저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두 분의 말씀을 들어보니 이 모든 게 주민 모두의 협력과 노력이 지어낸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재철 : "우리 마을에서 여러 사업이 벌어지고 있고 일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행복한 노인학교는 봉곡교회와 목사님, 그리고 함께 해주시는 봉사자들이 계셔서 가능했고, 공유장터 썸썸은 문화공간 담쟁이에서 주최하고, 우리는 귀농 귀촌한 여성들과 함께 그저 돕는 정도로 참여하고 있어요. 마을의 기억 저장고로써 박물관을 조성했고 계속 자료정리도 해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면 머리가 멍해져요. 말씀하신 대로 일이 좀 많은 건 사실입니다."
 
마을박물관의 전시물은 모두 주민들이 내놓은 생활용품들이다.
▲ 학선리마을박물관 전시물 마을박물관의 전시물은 모두 주민들이 내놓은 생활용품들이다.
ⓒ 월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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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에 이곳으로 오실 때 이런 일을 하자고 마음먹고 오신 게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살다 보니 마을과 연을 맺게 되고 이 안에서 나의 역할이 무엇인가 고민하다 스스로 역할을 찾아가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역할을 고민한다고 해서 모두가 어떤 시도를 하는 건 아닐텐데요.
박후임 : "저는 그냥 제가 하는 일이 재미있어요. 재미있으니까 하지 재미없으면 안 할 것 같아요. 2008년에 행복한 노인학교를 시작하면서 제가 이야기 반을 맡았어요. 이야기 반을 하면서 어르신들을 만났고 어르신들은 이야기 하시면서 자신의 삶을 만난 거죠. 그렇게 3년 정도 함께 얘기하면서 같이 울고 웃다가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기도 하고 아파서 요양원에도 가시면서 이야기반 운영이 중단됐어요.

그 후 2011년에 제가 한글반을 맡게 되었는데 지난 3년 동안의 학습으로 어르신들이 어느 정도 쓰기가 가능해지셔서 저는 읽기와 함께 글쓰기를 했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였는데 1년 동안 주제를 정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걸 글로 쓰게 했어요. 어르신마다 본인이 직접 자서전을 쓰고 돌아가며 그걸 읽었는데 읽으면서 많이 우셨어요. 그냥 글을 쓰고 읽기만 했는데도 굉장히 치유가 많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자서전 작업을 1년 정도 했지요.  

그런 과정을 보면서 어르신들의 글을 제가 아는 연극 연출자에게 보여주고 연극을 한번 하자고 그랬죠. 연출가가 좋다고 하더군요. 어르신들과 친해지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 연출가가 6개월간 서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내려와 어르신들하고 친해지는 과정을 겪었어요. 그리고 우리 집에서 한 달가량 같이 지내면서 자서전을 바탕으로 어르신들과 시나리오도 같이 쓰고 연극 연습도 했어요. 드디어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제목으로 음악극을 무대에 올리게 됐어요. 대단했지요. 가족분들이 엄청나게 좋아하셨어요."

어르신들이 좀 재미있게 사시라고
 
노인학교에서 글쓰기 수업 중인 어르신들
▲ 학선리의 행복한 노인학교 노인학교에서 글쓰기 수업 중인 어르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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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노인학교는 어떻게, 왜 시작되었습니까?
박후임 : "저는 서울에서 이미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농을 해서는 더 이상 공적인 일은 하지 않고 농사만 지을 거다, 그런 마음이었어요. 그전까지 마을 할머니들은 내가 농사짓는 데 도움받는 정도의, 내 필요에 의한 수단으로서의 이웃이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바뀐 거예요. 내가 바뀌고 나니까 할머니들의 존재가 내 안으로 자연스럽게 온전히 들어왔어요. 그렇게 이 마을 사람이 되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마을 사람의 시선으로 살펴보니 어르신들의 삶이 농사 이외에는 거의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르신들이 좀 재미있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봉곡교회 목사님한테 교회가 뭘 좀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목사님이 어르신들한테 뭐가 필요한지 일일이 물어보시게 된 거예요. 그 결과로 노인학교를 하자 해서 2008년부터 행복한 노인학교를 열게 된 겁니다. 

노인학교를 시작하고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시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그분들과 이야기하면서 어르신들의 옛날 삶은 어땠는지, 그분들의 문화가 궁금했어요. 가령 팬티는 언제부터 입게 되셨을까? 샴푸가 나오기 전엔 머리는 무엇으로 감았는지, 그 많은 빨래는 어떻게 했을까? 이런 게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면 어르신들은 또 너무너무 재미있게 얘기해 주시고. 그러면서 조금 더 깊게 알아가게 됐습니다."
 
어르신들의 수업 작품전시회
▲ 행복한노인학교 작품전시회 어르신들의 수업 작품전시회
ⓒ 월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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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선리 마을박물관과 행복한 노인학교가 탄생하게 된 건 봉곡마을 주민들과 두 분의 자발적인 시민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봅니다. 이런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이 다른 마을로 번져나갈 수 있도록, 또는 이런 활동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이재철 : "저는 좀 길게 봤으면 좋겠어요. 지금 도시의 삶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유목 문화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여태껏 그런 문화에 길들여져 생활했는데 이제는 여기에 뿌리를 내린 땅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내가 죽을 때까지 이어갈 수 있는 이런 일들이 가능해지는 거죠."
 
어르신들의 수업 작품 전시회
▲ 행복한노인학교 작품전시회 어르신들의 수업 작품 전시회
ⓒ 월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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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의 삶을 뒤로하고 한 곳에 깊게 정착해 살아가는 이들만이 어떤 성과나 결과를 위해서가 아닌 내 삶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완성해 갈 수 있으리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마을의 사람으로, 마을 안에서 더디지만 소박하고 온전하게 하나씩 이뤄가는 봉곡마을의 주민과 주민이 된 활동가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이들의 성취를 보며 다른 마을들도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크다.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라도 행정의 보조나 지원에만 의존해선 의미도 지속성도 장담할 수 없다. 필요를 느끼는 주체적인 시민의 움직임이 먼저여야 한다. 그런 움직임, 실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민이 그리운 때다.

>> 인터뷰 정리 이규홍, 사진 전재영, 자료제공 이재철.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월간광장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월간광장, #학선리마을박물관, #행복한노인학교, #진안군, #동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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