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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편집자말]
신안군청이 있는 압해도 송공산 기슭 분재공원에서 매년 12월이면 애기동백 축제가 열린다. 2023년 '섬 겨울꽃 축제' 개막식이 열린 12월 8일 오전 11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압해도의 날씨는 영상 16.3도로 서울(11도)보다 5도가량 더 따뜻했다.

겨울 한 철에 피었다 지는 애기동백

애기동백은 겨울에만 볼 수 있는 꽃이다. 11월 늦가을부터 꽃망울을 맺기 시작해 2월이면 꽃이 진다. 서리 내릴 때 꽃이 피어 서리동백이라는 애칭도 있다. 꽃잎으로 차를 우린다고 해서 산다화(山茶花)라는 이름도 가진 자생(自生)식물이다.

동백(冬栢)은 꽃 이름엔 겨울 동(冬)자가 붙어 있지만 제주도와 바닷가 따뜻한 남쪽 지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에서 봄에 꽃이 핀다. 동백이 아니라 춘백(春栢)인 셈이다. 겨울 한 철에 피었다 지는 애기동백이 진짜 동백이라고 할 수 있다.

분재공원 부지 3만8000평에 애기동백 산책로 2km가 꼬불꼬불 이어진다. 애기동백은 동백보다 꽃이 풍성하게 달리고 화려하다. 애기동백 2만 그루에 한 그루당 꽃망울이 1000~4000개가 달려 있다. 그루당 평균 2000개로 잡아도 분재공원에서 애기동백꽃 4000만 송이가 피어난다.
  
눈오는 날 분재공원의 애기동백 산책로.
 눈오는 날 분재공원의 애기동백 산책로.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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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은 수줍어하듯 꽃잎이 완전히 열리지 않지만 애기동백꽃은 활짝 봉오리를 펼친다. 꽃이 질 때도 동백은 모가지가 댕강 통째로 떨어지지만 애기동백은 낱장으로 한 장씩 떨어져 흩날린다. 동백은 꽃잎이 5~7장으로 된 통꽃이고 애기동백은 9~12장으로 된 낱꽃이다. 눈 내리는 날 애기동백 꽃잎이 날리는 모습을 보지 않고서 낙화(落花)를 말하지 말라.

동백은 차나무과 상록교목(常綠喬木)이고 애기동백은 같은 차나무과지만 상록관목(灌木)이다. 교목은 키 큰 나무로 나무둥치가 하나로 올라가다가 가지가 벌어진다. 애기동백은 5m 이상 자라지 않는 '키 작은 나무'(관목). 애기동백은 밑둥치부터 가지가 갈라져 산발적으로 뻗는다. 가지치기로 수형을 잡아주어야 아름답다. 남쪽 지방에서는 울타리 나무로 쓰기도 한다.

애기동백 공원은 1996년 봄 산불이 송공산 일대를 홀랑 태워 민둥산이 된 자리에 조성됐다. 나무를 심으면 원상복구까지 20년 넘게 걸릴 판이었다. 신안군이 산림청 도시웰빙 숲 조성 공모에 선정돼 사업비 30억 원을 받아 처음에는 애기동백 5000 그루를 조림해 2만 그루로 늘렸다. 

애기동백 산책로를 따라 돌다 다리가 피곤해지면 분재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전국에서 최초로 분재를 테마로 조성한 정원이다. 작은 구릉과 연못을 돌며 소나무 주목 소사나무 모과나무 먼나무 팽나무 향나무 금송 피라칸사 등 700여 점의 분재작품이 전시돼 있다.

분재공원에는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쇼나 조각, 야생화원, 미니 수목원, 생태연못, 잔디광장, 화목원, 유리온실, 산림욕장, 미술관 등이 어우러져 있다. 저녁노을미술관에는 신안 출신 우암 박용규 화백의 작품과 함께 다도해의 저녁노을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천사섬 분재공원은 연간 6만~10만 명, 개장 이래 170만 명이 다녀가면서 신안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압해도 분재공원 전경. 앞바다는 지주식 김양식장이다.
 압해도 분재공원 전경. 앞바다는 지주식 김양식장이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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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공원 바로 앞에는 아름다운 5천만 평 바다정원이 펼쳐진다. 바로 앞바다에 널따란 지주(支柱)식 김 양식장이 있다. 지주식 김 양식은 갯벌에 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그물을 매달아 전통 방법으로 김을 햇빛에 충분히 노출시키는 양식법이다. 김 원초가 바닷물 밖으로 노출되는 썰물 때 충분한 햇빛을 쬐기 때문에 파래나 이물질이 끼지 않는다. 자연친화적 김 양식이다.

수달 장군의 왕국 고이도

고이도는 행정구역상 신안군 압해읍에 속한 섬이나 주민들의 생활권은 무안군이다. 무안군 운남면 신월선착장을 통해 섬을 왕래할 수 있다. 신월선착장과 고이도는 직선거리로 1km 남짓한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눈대중으로도 한강 폭과 비슷하다. 다리가 없어 통통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고이도 주민이 220명인데 교통량이 적어 1천억 원 안팎이 소요되는 다리를 놓기에는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모양이다.

작은 도선이 한 시간 간격으로 고이도와 신월리 선착장을 운항한다. 육중한 철부선이 하루에 두 번 차량과 화물을 싣고 왕래한다. 고이초등학교는 10년 전에 폐교했다. 섬 주민들은 이 초등학생들를 목포로 유학 보낸다. 유아원도 없어서 주민들은 어린 자녀들을 통통배에 태워 해협 건너 무안군 운남면으로 보낸다.
 
고이도(위)와 무안군 운남면 사이에 있는 해협. 아래쪽 튀어나온 곳이
신월리 선착장.
 고이도(위)와 무안군 운남면 사이에 있는 해협. 아래쪽 튀어나온 곳이 신월리 선착장.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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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도는 논농사 밭농사가 주소득원이고, 부업으로 낙지 장어 숭어 등을 잡고 염전과 김양식 새우양식을 한다. 자녀교육은 힘들어도 소득원이 튼실하니 주민들은 섬을 떠나지 않는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고이도는 옛날 해로의 요충(要衝). 서쪽으로는 신안군 마산도 매화도가 있고, 남쪽으로는 신안군 압해도와 무안군 운남면 남촌마을이 건너다보인다. 북쪽으로는 신안군 선도와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고이도에 있는 왕산성 유적.
 고이도에 있는 왕산성 유적.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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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촌마을과 진변마을 사이에 있는 산 정상부의 능선을 둘러싸고 510m의 소규모 산성이 있다. 규모에 비해 이름이 거한 왕산성(王山城)은 적이 침입했을 때 들어가 싸우는 산성이라기보다는 인근 해로를 굽어보는 망루의 기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산성 정상에서는 동쪽과 북쪽의 해로뿐 아니라 성내면 다경포(多慶浦)를 비롯해 무안군 운남면 망운면 등이 한눈에 조망된다.

해발 88.9m에 불과한 야산이 왕산(王山)이라고 불린 것은 산성 안에 왕 또는 장군이 살았다는 역사 기록 또는 구전설화와 관련이 있다. 왕산성을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능창(能昌, ?~910)은 압해현을 근거지로 활약한 해상세력의 장수였다. 능창은 수전(水戰)에 능해 수달이라고 불렸다.

<고려사>에는 반란군의 두령 또는 해적 두목이라고 기록돼 있다. 왕건은 수달을 잡기 위해 해전을 잘하는 병사 10여 명을 영광 갈초도에 보내 매복시켰다. 이 작전이 성공해 갈초도 나룻가에서 작은 배에 탄 능창을 사로잡았다. 왕산성을 쌓은 장수치고는 허망하게 체포를 당한 것이다. 왕건이 능창을 압송하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면서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고 모욕을 준 뒤 죽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일본의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도 당나라에서 9년간 여행을 끝내고 신라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라 고이도에서 하루를 묵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909년 여름 궁예가 왕건에게 명해 진도군을 함락시키고 고이도성(皐夷島城)을 깨뜨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이도의 군사들은 왕건의 군사 2500명을 보고 놀라 스스로 항복했다.
 
왕건은 궁예가 날로 교만하고 포악해지는 것을 보고 다시 변방에 나가려는 뜻을 굳혔다. 마침 궁예가 나주를 근심하여 드디어 왕건에게 가서 지키도록 명령하고 품계를 올린 한찬(韓飡) 해군대장군으로 삼았다…왕건이 진도를 함락하고 다시 나아가서 고이도에 머무니, 성안 사람들이 군대의 의용이 엄숙하고 씩씩한 것을 보고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 <고려사> 권1
 
후삼국 시대에 압해도를 근거지로 서남해에서 활약한 수달장군 능창의 기념비.
 후삼국 시대에 압해도를 근거지로 서남해에서 활약한 수달장군 능창의 기념비.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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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 시조묘와 후손 정약용의 글

압해도에는 정(丁)씨의 도시조(都始祖)로 알려진 정덕성(德盛·대양군)의 묘역이 있다. 신안군 향토자료 제24호인 도시조 묘역은 압해읍 가룡리 압해 정씨 선산(先山)인 유두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옛 기록과 묘역 안내문 등에 따르면 대양군은 당나라 무종·문종 연간에 대승상을 역임하고 신라 문성왕 때 신라 땅 압해도에 유배됐다.

육지에 있던 성씨가 섬에 들어와 정착한 경우는 많지만 섬에 시조 묘가 있고 성씨의 본관이 있는 것은 드문 사례. 압해 정씨의 문중 제각인 추원재(追遠齋)는 1857년 창건돼 한 차례 중수됐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정씨 도시조 묘와 관련해 <압해정승묘변(押海政丞墓辨)>이라는 글을 남겼다. 후손이자 실학자로서 시조묘에 관한 고증을 논리적으로 살핀 글이다. 다산은 가까운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지만 압해도의 시조묘를 찾아보지 못했다.

다산의 5대조 정시윤의 <압해도 성묘기(押海島 省墓記)> 등을 참고해 <압해정승묘변>을 쓴 것 같다. 신안문화원이 발행한 <신안이야기 바다로 간 천사, 섬이 되다> 책에서 <대한민국 정씨의 시조, 압해 정씨>에 나오는 <압해정승묘변>의 번역을 인용한다.
 
나주의 압해섬에 정승동(政丞洞)이 있는데, 그 위에는 정정승(丁政丞)의 무덤이 있고 묘 앞에는 비가 있다. 그 비에 '대상정공지묘'(大相丁公之墓)라고 되어 있다. 고기(古記)에 정공의 휘는 덕(德)인데, 성당(盛唐) 선종 때 벼슬이 승상(丞相)에 이르렀다가 어떤 일로 인하여 신라의 해도(海島)에 귀양 오게 되었고 마침내 압해섬에 유배되어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대로 여장(旅葬)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이곳에 정승묘가 있게 된 것이다… 대저 대신(大臣)을 귀양 보내는 데는 반드시 내지(內地·당나라 영토 안)에 보냈을 것인데, 모르기는 하지만 정공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번국(蕃國·제후의 나라 즉 조선)의 해도에 유배되었단 말인가. 더구나 승상은 한관(漢官)이요, 정승 대상이란 우리나라의 말이다. 당나라에 과연 승상 정승 대상이 있었단 말인가.

이로 말미암아 말하자면 정공이 당나라 사람이었는지는 알지 못할 일이다…그러나 요컨대 압해(押海)는 정씨의 대본(大本)이며 묘 속의 대부(大夫)는 정씨의 대조(大祖)인데 사적이 모두 없어졌으니, 슬프다. 지금 사람들은 옛 사적에 소략(疏略)하여 다시 의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생각했던 것을 기록하여 후일의 군자(君子)를 기다리는 바이다.
 
압해 정씨 시조묘.
 압해 정씨 시조묘.
ⓒ 황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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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전설과 사실을 구분해서 밝혀야 하겠으나 사실을 뒷받침하는 사적(史籍)이 부족해 안타깝다며 판단을 후세(後世)로 유보했다. 정덕성 시조묘를 내려오면 계단 밑으로 정일권 전 국무총리, 정래혁 국회의장, 정세균 국회의장, 정해창 법무부장관, 정시채 농림부장관의 기념 식수가 줄줄이 서 있다. 시조의 묫자리가 명당이어서 명문가로 번성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압해 정씨 기념탑.
 압해 정씨 기념탑.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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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한자 음(音)이 같은 鄭氏(정씨)와 구분하기 위해 압해 丁氏(정씨)를 속칭 '고무래 정씨'라고 불렀다. 고무래는 곡식을 긁어모으는 농기구로 모양이 한자 '丁' 자를 닮았다. 한글전용 세대에겐 고무래보다는 영어 대문자 'T' 자와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야 알아듣기 쉬울 것 같다.

압해읍 가룡리에는 '丁'씨 기념탑이 우뚝 솟아 전국에서 찾아오는 압해 정씨 후손들을 맞는다. 신안군과 후손들을 상징하는 1004개의 작은 글자들이 모여 하나의 큰 丁자를 표현한 작품이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문화유산조사보고서 16 고이도>, 2019
신안군, 《사계절 꽃 피는 바다 위 정원 플로피아》, 2011
이수건 김언종 등, 《나주정씨 선계연구》, 서울 동문선, 2009
최성환, 《신안이야기-바다로 간 천사, 섬이 되다》, 신안문화원, 2012


태그:#신안군, #압해도, #분재공원, #압해정씨시조묘, #정씨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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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탐사보도로 한국기자상을 두해 연속 수상했다. 저서 '박종철 고문치사와 6월항쟁'은 언론 지망생들의 필독서 반열에 들었다.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황호택이 만난 사람을 5년 5개월동안 연재하고 인터뷰 집을 7권 펴냈다. 동아일보 논설주간, 서울시립대 초빙교수를 지냈고 현재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 대학원 겸직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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