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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국가 손해배상 책임 최초 판결과 관련, 민변 소속의 이정일(왼쪽)과 남성욱 변호사가 지난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동화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정일 변호사와 남성욱 변호사 가습기 살균제 국가 손해배상 책임 최초 판결과 관련, 민변 소속의 이정일(왼쪽)과 남성욱 변호사가 지난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동화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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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만 무려 1260명이 넘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국가도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13년 만에 처음 나왔다. 지난 6일 서울고등법원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가족 3명에게 국가가 각각 300만~5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유해물질 유통을 막아야 할 국가가 가습기살균제에 쓰인 화학물질(PHMG·PGH)이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고시한 뒤 10년 가까이 방치했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을 이끈 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남성욱·이정일 변호사다. 2016년 1심에선 국가의 책임이 인정되지 않았지만, 이후 두 변호사가 변론을 맡아 8년간의 항소심 끝에 결론을 뒤집었다. 남 변호사는 "소송을 시작할 때만 해도 법조계엔 비관적인 전망이 많았다"고 했다.

그사이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두 변호사는 지난 2022년 9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아래 사참위)가 내놓은 가습기살균제참사 종합보고서를 꼽았다. 2018년 12월 가습기살균제·세월호 참사 진상조사를 위해 출범한 사참위가 3년 여간의 활동을 마치며 낸 보고서였다.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의 관리책임을 지적한 해당 보고서는 판결문에도 주요하게 언급됐다.
 
"사회적참사진상규명법에 따라 설치된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2018.12.11 '가습기살균제와 관련된 화학물질과 제품에 대한 정부의 안전관리 적정성'을 직권조사하기로 의결했고, 2022.2.17 '가습기살균제참사는 화학물질(환경부, 유해화학물질관리법), 화학물질이 함유된 생활제품(산업통상자원부, 품질경영및공산품안전관리법), 제품의 소비과정(한국소비자원, 소비자기본법)에서 정부의 안전관리 문제점이 있어 발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는 취지의 '가습기살균제와 관련된 화확물질과 제품에 대한 정부의 안전관리 적정성'에 대한 조사 결과보고서를 의결했다." - 판결문 중
 
두 변호사는 이 판결이 최근 대통령 거부권으로 무산된 이태원 참사 독립 조사기구 설치의 필요성을 증명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 변호사는 "현대 재난참사는 수많은 유관 기관들의 복합적인 책임·대응이 얽혀있는 특징이 있다"라며 "전문적이고 광범위한 사참위 조사가 없었다면 가습기살균제 재판에서 국가 책임의 진상이 드러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남 변호사는 "공적 권한을 가진 조사기구 없이 일반인 피해자들이 방대한 정부 자료에 접근하고 공무원들을 불러 조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라며 "국가가 대형참사 조사를 안 하면 대체 누가 할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두 변호사를 지난 13일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13년 만에 방관자→가해자... 국가, 적극 행정 나서야"
 
가습기 살균제 국가 손해배상 책임 최초 판결과 관련, 민변 소속의 남성욱 변호사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동화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남성욱 변호사 가습기 살균제 국가 손해배상 책임 최초 판결과 관련, 민변 소속의 남성욱 변호사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동화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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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일 서울고등법원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김아무개씨 등 5명이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2011년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처음 발생한 후 최초다.

남성욱(남) : "법원 판결대로 애초에 국가가 유해성 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유독물이 아니라고 잘못 공표했다.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터졌을 때, 국가가 몰랐을까. 아니었다. 다 알고 있었다. 이미 국민신문고에도 신고가 올라왔고 환경부, 산자부, 식약처 모두 알았는데도 서로 책임만 떠넘기기 바빴다. 그런데도 지금껏 국가는 '가해자'가 아니었다. 공무원들에 대한 형사 수사가 있었지만 처벌 받은 공무원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법원에서 기업뿐 아니라 국가도 가해자라고 인정한 점은 의미가 크다."

이정일(이) : "이전까지 국가는 마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게 시혜를 베풀듯이, 방관자의 위치에서 도의적인 일을 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 자연스레 피해자 인정과 구제급여 지급 등 지원에 엄격했고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국가도 참사의 책임이 있는 가해자로 인정된 만큼, 이제부턴 더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피해 회복에 나서야 한다. 피해자들이 모두 개별적으로 소송을 진행해 국가배상을 받을 순 없지 않나. 별도의 입법도 필요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당장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조정위원회 등 기존에 마련돼 있는 협의 틀을 활용해 정부가 적극행정을 펼 필요가 있다."

- 국가 책임은 인정됐지만 소송을 낸 피해자 5명 중 2명은 이미 정부로부터 받은 구제급여조정금이 위자료 성격이라는 이유로 배상액을 받지 못했다.

: "그 부분은 아쉽다. 소송을 낸 5명은 두 가족인데, 이중 2명은 2010년생 A의 부모다. A는 태어난 지 1년도 안돼 지난 2011년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사망했다. A의 부모 2명은 이후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에 따라 정부로부터 구제급여조정금을 받았지만, 우리는 그 성격이 자식을 잃은 부모가 아닌 사망한 영아 A 본인에 대한 위자료라고 봤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머지 3명, 즉 2009년생 B와 그 부모에게는 각각 300만 원, 400만 원, 500만 원의 국가 배상액이 산정됐는데, 이 역시 실질적인 배상으로 보기엔 액수가 너무 적다. B는 현재 산소호흡기 없이 생활이 불가능하고, 중학생 나이인데 학교도 못 가고 있다. 몸은 크는데 폐가 크지 않아 증상이 더 심해지고 있다. 부모 역시 B의 간병을 위해 모두 회사를 그만둔 상태다.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면 보다 실질적인 배상액이 나왔어야 한다."

: "오로지 법과 정의에 복무해야 할 사법부가 지나치게 정부 예산을 걱정한 게 아닌가 싶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정부에서 인정한 피해자만 5667명, 신청자만 7901명에 달한다. 미국 같은 경우 대형 인명피해를 야기한 기업에게는 회사가 망할 정도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내린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뭔가. 안전 사회를 위해 원칙을 꺾지 않겠다는 일종의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법원의 판단에 따라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한다. 지금처럼 사법부가 고민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알아서 고려하게 되면 우리 사회가 안전 사회로 바뀔 가능성은 없다."

"판결 뒤집은 사참위 보고서... 이태원 참사 조사기구 필요성 증명"
 
가습기 살균제 국가 손해배상 책임 최초 판결과 관련, 민변 소속의 이정일 변호사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동화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정일 변호사 가습기 살균제 국가 손해배상 책임 최초 판결과 관련, 민변 소속의 이정일 변호사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동화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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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심에선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되지 않았다. 8년 만에 판결이 뒤집힌 이유는 뭔가.

: "2022년에 제출된 사참위 보고서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유해성 심사 과정에서의 과실 등 실제 이번 판결에서 환경부의 책임이 인정된 근거가 모두 사참위 보고서에서 비롯됐다. 보고서에 화학물질 유통 관계에 각 국가기관들이 관여한 책임 정도, 질병관리본부가 문제를 파악했음에도 사용수거 명령까지 왜 시간이 지체됐는지, 피해가 확산됨에도 빠르게 대응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한 공무원들의 구체적 진술들이 담겼다. 사참위 보고서가 제출된 이후 재판부가 정부 측에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을 정도였다."

: "가습기살균제 재판은 결국 화학물질과 인체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핵심인데, 그 입증 책임이 피해자인 원고에게 있다. 기본적으로 피해자에게 불리한 구조다. 정부의 안전관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참위의 공식 보고서가 없었다면 항소심에서도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 이태원 참사에 대해선 아직 사참위 같은 독립 조사기구조차 없는 상태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를 통과한 이태원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이 결국 무산됐다.

: "가습기살균제를 조사한 사참위 보고서를 보면 일반 피해자나 변호사는 접근할 수 없는, 막대한 국가 기록물과 조사 자료들이 포함돼있다. 사참위가 3년여의 기간 동안 환경부, 산자부 등 10곳이 넘는 정부 부처를 조사한 결과다. 사참위 같은 국가기관이 아니라면 과연 그 많은 부처 공무원들을 불러다 조사하고 진술서를 받을 수 있을까? 국가가 진상조사를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나서서 그런 조사를 할 수 있을까? 시민단체가? 불가능하다. 한다 하더라도 법원에서 이만큼 신뢰성을 인정받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공식적인 진상조사가 이뤄지지 않으면 피해자들에게만 계속 입증 책임 부담이 지어진다는 점이다. 아무 잘못 없이 참사 피해자가 됐는데 진상조사까지 직접 하라고 방치하는 꼴이다. 국가의 독립된 조사기구가 꼭 필요한 이유다."

이 : "정치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니까 논란거리가 되는 것뿐이지, 참사가 일어나면 조사기구를 통해 원인을 파악하고 진상을 밝히는 것은 당연히 국가가 할 일이다. 지금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 역시 아주 기본적인 것 아닌가. 아이가 언제 죽었고, 조치는 언제 어떻게 받았고, 병원은 언제 어디로 갔냐는 것이다. 국가는 조사하고 설명할 의무가 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해 정부는 형사책임을 묻는 수사가 다 이뤄졌으니 충분하다고 하는데, 이는 진상조사와 전혀 다른 얘기다. 대형참사의 원인은 수없이 많고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형사책임이란 특정 개인이 특정 시점에 한 행위가 법적으로 문제가 있냐 없냐만 따진다. 만일 우리가 알아야 할 사고 원인이 100가지라고 한다면, 형사책임 문제는 그 중 한둘뿐이다. 그 사이에 공백이 너무 크다. 단지 몇몇에 대한 형사처벌이 아니라 원인규명과 진상조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가습기 판결과 사참위 보고서가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진상조사와 형사처벌 차이 커... 공백 메우는 조사기록의 힘"
 
이태원참사 유가족들과 민변 변호사 등이 지난 1월 30일 오후 서울광장 분향소 앞에서 '10.29 이태원 참사 특별법 국무회의 심의 결과에 대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 "윤석열 정부는 역사에 남을 죄를 지은 위헌정부!" 이태원참사 유가족들과 민변 변호사 등이 지난 1월 30일 오후 서울광장 분향소 앞에서 '10.29 이태원 참사 특별법 국무회의 심의 결과에 대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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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습기살균제와 세월호를 겪고도 이태원 같은 대형참사가 이어지고 있다. 8년간 가습기살균제 참사 재판을 해온 전문가로서,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게 뭐라고 보나.

: "세 참사의 공통점은 국가 조직이나 공무원들이 '뭔가를 해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뭔가를 안 해서' 문제가 생겼다는 점이다.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감지됐을 때 공무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딴 데서 알아서 하겠지'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모두가 안 하고 있었다. 세월호와 이태원도 마찬가지였다. 책임의 '회색 지대' 같은 게 생긴다는 느낌이다.

결국은 책임 있는 사람들이 종전처럼 '괜히 나섰다가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간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도록 경각심을 주는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가습기살균제 국가배상 판결은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은 국가의 부작위 책임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 "참사가 일어나고 그 진상을 밝히는 데까지 여전히 수많은 정쟁이 일어나지만, 결국 남는 건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판결을 뒤집은 사참위 보고서 같은 기록. 그 기록이야말로 국가가 만든 독립된 조사기구가 시민들에게 최종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미국 같은 경우 진상조사 보고서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한다. 당장 그런 수준까지 바라긴 어렵지만, 우리도 시민들이 언제든 쉽게 읽을 수 있는 200~250쪽 분량의 종합보고서들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이나 국회는 그 보고서가 내놓은 권고사항을 명확히 이행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힘들게 만든 조사기구의 결론에는 관심이 없다.

앞선 참사의 경험으로 '진상조사기구 무용론'까지 나오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참사 대응의 경험을 축적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10년 전만 해도 법원에선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조사한 피해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사례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가습기살균제 국가 배상 항소심에서 사참위 보고서가 중요한 역할을 했듯이, 적어도 국가의 조사기구가 내놓은 결론에 대해 정부와 사법부가 존중할 수밖에 없게 되어가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이 생기고 있다고 본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태원 참사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진상조사 기구 같은 일로 싸우지 않는, 그런 건 당연히 만들어지는 사회로 어쨌든 가고 있다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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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국가 책임 첫 인정… "정부, 유독물 잘못 공표" https://omn.kr/27cgp

태그:#가습기살균제, #이태원참사, #진상조사, #사참위, #국가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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