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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그냥 좀 놔둬. 불금이잖아."

아이들은 금요일 저녁을 먹고 나면 당당하게 각자 휴대폰을 붙들고 드러누워 버린다.

"자기야, 나 오늘 약속 있어. 늦을 거야."

남편은 금요일 저녁이면 편안하게 술 약속을 잡는다.

"오늘 불금인데 뭐 할 거예요?"

가끔 통화하는 지인들이 그렇게 묻곤 하지만, 금요일 저녁에 나를 불러내는 사람은 없다. 낮에는 직장일을 하면서, 저녁에는 해도 해도 티 안 나는 집안일을 하면서 '월화수목금토일' 거의 비슷한 일상을 보내지만, 금요일 저녁만큼은 나도 좀 쉬고 싶다.

남편과 아이들이 집에서 하루 세 끼를 먹는 주말이 나에게는 특근일이기에 내가 진정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은 금요일 저녁뿐이다. 남들이 말하는 '불금'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평소와는 조금 다른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막상 그 시간에 딱히 새로운 짓을 하지는 못하고 지냈다. 그저 집안이 좀 어수선해도 못 본 척 하고 티브이 채널을 돌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다 얼마 전 금요일에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조용한 집안에 앉아 티브이 채널을 돌리고 있다가 문득 이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를 재우기 전까지 두 시간 정도, 일주일간 수고한 나를 위한 이벤트를 열고 싶었다. 

우리 집에는 코로나로 외출이 제한되던 때 남편이 방 한쪽에 설치한 빔프로젝터가 있다. 그때 값비싼 스피커도 장만했다. 남편은 주말이면 침대에 누워 그 큰 프로젝터로 유튜브를 보면서 지냈는데, 너무 방 안에서 꼼짝 안 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가끔 유튜브나 보려고 그리 비싼 스피커를 장만했냐고 잔소리도 해댔다.

그런데 그날 보니 그걸 날 위해 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나만을 위한 영화관을 오픈하는 거다. 보고 싶었던 영화 한 편을 보며 팝콘과 맥주를 마시는 두 시간, 딱 그거면 혼자서도 행복한 금요일 밤이 될 것 같았다.
 
영화를 더욱 재밌게 보기 위한 필수 준비물, 팝콘과 맥주
▲ 팝콘과 맥주 영화를 더욱 재밌게 보기 위한 필수 준비물, 팝콘과 맥주
ⓒ 윤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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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영화관 이름을 '더 방구석 시네마'라고 지었다. 영화 상영시간은 금요일 저녁 여덟 시, 팝콘과 맥주를 준비해 놓고 방문을 닫았다. 아이들한테 두 시간 동안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했다. 

'더 방구석 시네마'에서 내가 처음 본 영화는 <인생은 아름다워>로 류승룡, 염정아 주연의 뮤지컬 영화다. 다른 뮤지컬 영화처럼 배우들이 노래를 매우 잘하거나 웅장한 음악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귀에 익은 반가운 가요를 들으며 추억을 되새길 수 있어서 좋았다. 

영화의 내용은 공무원인 남편, 아이 둘과 함께 짠내 나는 삶을 살던 주인공이 말기 암 진단을 받고, 남편과 함께 첫사랑을 찾아 떠난다는 다소 엉뚱한 이야기였다. 가볍게 웃으면서 보다가 주인공의 아이들이 엄마의 암 투병을 알게 되는 순간과 남편이 아내를 위해 준비한 마지막 잔치 장면에서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마지막 잔치 장면은 너무 유쾌하고 담담해서 오히려 슬펐던 것 같다. 
 
더방구석시네마에서 본 첫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중 한 장면
▲ 빔프로젝터 더방구석시네마에서 본 첫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중 한 장면
ⓒ 윤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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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남편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요즘에 사람들이 죽고 난 다음에 하는 장례식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결혼식 하듯 살아있을 때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행사를 하기도 한다더라."
"전에 <서른, 아홉>이라는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어. 그런데 아직 주변에서 그런 경우는 보지 못했는데, 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그런 자리를 갖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해."

드라마 <서른, 아홉>에 이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한번 더 죽음을 앞두고 사는 동안 추억을 나눈 사람들을 초대해 잔치를 열고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보니,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앞둔 내가 초대를 했을 때 기꺼이 참석해 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다. 
 
jtbc드라마 <서른, 아홉>에서 죽음을 앞둔 친구를 위해 지인들을 초대해 인사를 나누는 장면
▲ 드라마 <서른, 아홉> jtbc드라마 <서른, 아홉>에서 죽음을 앞둔 친구를 위해 지인들을 초대해 인사를 나누는 장면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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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민은 내가 과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현재를 잘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죽음을 앞두고 내 인생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나를 아름답게 기억해 줄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어야 할 텐데... 죽음 이후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를 결정하는 건 다름 아닌 '오늘의 나'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하루 내게 주어진 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 해야겠다.

지난주에는 설 연휴로 '더 방구석 시네마'를 오픈하지 못해 아쉬웠다. 오늘은 어떤 영화를 보면 좋을지, 그 영화가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 상상하니 하루 종일 설렌다. 혹시라도 남편이 일찍 들어와서 내 시간을 방해하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그 시간이 즐겁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브런치에 발행 예정입니다.


태그:#빔프로젝터, #영화, #인생은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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